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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서 독립운동하다 귀국… 58세 고령에도 ‘물대포’ 맞으며 시위 앞장

하와이서 독립운동하다 귀국… 58세 고령에도 ‘물대포’ 맞으며 시위 앞장

Posted March. 23, 2019 08:39,   

Updated March. 23, 201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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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부도정시장 4·2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인사도 있었다. 1919년 당시 58세의 나이에 시위대의 맨 앞에서 소방호스 물을 맞아가며 독립 만세를 외친 고채주(1861∼1920·사진·건국훈장 애국장)다.

 통영향교 장의(掌議)였던 그는 시위 주동자로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뒤 감옥 생활을 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자택에서 숨졌다. 통영에선 그를 기미년 만세운동 3열사로 부른다. 나머지는 이학이와 허장완이다. 원문공원에 있는 3·1운동기념비 옆에 그의 묘비가 있다.

  ‘통영군사’와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채주는 40세였던 1901년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적지 않은 나이에 도미(渡美)한 이유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국의 현실을 걱정하면서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발달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익혀 동포들을 널리 깨우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채주는 하와이의 막가월리 농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한인 교포들을 규합했다. 그는 교포들의 단결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1906년 송건 홍정표 이묵원 등과 함께 ‘자강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 하와이에서 20여 개의 교포단체가 난립하는 것을 보고 이듬해 호놀룰루에서 ‘한인합성협회’로 통합하는 데 앞장섰다. 1909년에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 등 미주 지역 한인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한 ‘국민회’의 산파역을 맡았고, 같은 해 귀국했다.

 고채주의 후손인 고석윤 통영 3·1동지회 회장은 그가 귀국한 이유에 대해 “특별한 밀명(密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후손들이 1978년 당시 원호처(현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공적 개요에 따르면 고채주는 귀국 후 통영향교 장의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또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미주의 국민회와 상하이 임시정부 사이의 연락책으로서 군자금 조달 등 지하운동을 펼쳤다.


성동기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