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安의사 집안 사람” 치마 올 풀어 수놓은 태극기 감옥에 걸어

  • 입력 2009년 8월 14일 02시 54분


최선옥 수녀-시조카 내외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종질부 안노길 할머니(가운데)와 안 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는 최선옥 수녀(왼쪽), 안 할머니의 시조카 정덕재 씨(오른쪽) 내외. 안 할머니는 안 의사가 100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중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에서 외롭게 말년을 보내고 있다. 선양=연합뉴스
최선옥 수녀-시조카 내외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종질부 안노길 할머니(가운데)와 안 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는 최선옥 수녀(왼쪽), 안 할머니의 시조카 정덕재 씨(오른쪽) 내외. 안 할머니는 안 의사가 100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중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에서 외롭게 말년을 보내고 있다. 선양=연합뉴스
‘안중근 의사 조카며느리’ 안노길 할머니 파란만장한 삶
中 당국의 압박-회유에도 독립군 모자 쓰고 ‘항일’ 표시
“安의사 의거 있던곳 못떠나” 어려운 삶에도 터전 지켜
中국적 받는 것 거부하자 세례명 음역해 억지 등재

중국 땅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반혁명 분자로 몰려 40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던 안 의사의 종질부 안노길 할머니.

1913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난 안 할머니는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등 4명이 1929년 헤이룽장 성 하이룬 현 하이베이 진으로 갔다. 이듬해 그곳에서 마을 사람의 소개로 안 의사의 사촌 동생인 홍근(洪根) 씨의 3남 무생(武生) 씨와 결혼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됐다.

결혼 생활 14년 만인 1944년 남편이 일제의 앞잡이들에 의해 억울하게 구타당해 사망하면서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졌다. 그는 일제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의사 가문의 며느리라는 데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남편까지 친일 분자들에게 사망하자 원래 차(車)씨였던 성도 안(安)씨로 바꾸고 안 의사 활동 알리기와 ‘항일 활동’에 나섰다.

남편이 사망한 뒤 하이룬 현에서 하얼빈으로 이주해 온 안 할머니는 삯바느질 등으로 어렵게 살았다. 하지만 안 의사의 공적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손수 태극기를 만들어 집에 걸어놓고 독립군을 상징하는 군복에 별을 새긴 모자를 쓰고 다니기도 했다. 13일 기자가 안 할머니가 사는 하얼빈 집을 방문했을 때 평소에 입지 않던 독립군복과 별을 새긴 모자를 꺼내 입어 보여 주었다.

안 할머니의 안 의사 알리기와 태극기 사랑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탄압 대상이 됐다. 결국 1958년 1월 하얼빈역 광장과 하얼빈 다오리 구 공안분국 앞에서 태극기와 안 의사 초상화를 앞세우고 1인 시위를 하다 체포됐다. 당시 적대국이었던 대한민국의 국기를 흔들며 시위를 벌인 안 할머니의 행위는 중국에서는 반혁명죄에 해당됐다. 안 할머니는 무기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게 됐다.

하지만 옥에서도 할머니는 투옥될 때 입고 들어간 한복의 치마에서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등의 실을 풀어 수를 놓아 태극기를 만들어 감옥 벽에 걸어놓고, 독립군복과 모자도 만들어 입었다. 개조 불능의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안 할머니는 1972년 네이멍구(內蒙古)의 오지 전라이 노동교화 감옥에 넘겨져 6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1978년 이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안 할머니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었다. 이 감옥에서 운영하는 농장에서 또 20년을 갇혀 일하도록 했다.

중국 내 개혁개방 바람이 불고 한국과의 수교가 이뤄진 뒤에도 억압된 상태에 있었던 안 할머니는 1998년 9월에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85세 때였다. 하얼빈으로 돌아왔지만 아무 친인척이 없어 동가식서가숙했다.

그러다 한국에서 온 최선옥 수녀(72)를 만났다. 우연히 안 할머니의 딱한 사연을 알게 된 최 수녀의 도움으로 그의 아파트에 방 한 칸을 얻어 함께 생활하면서 안 할머니는 비로소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최 수녀가 집을 마련하는 데는 신부이기도 한 동생(현재 경기 여주군 옹기동산 청학박물관 관장)의 도움이 컸다. 또 강제노역을 시켰던 전라이 감옥농장에서 뒤늦게 매달 지급하고 있는 200위안(약 3만7000원)의 보조비도 그나마 생활에 보탬이 됐다.

그녀는 광복 후 마을 사람들이 한국으로 갔지만 중국에 남기를 고집했다. 안 의사의 의거가 있었고 남편의 뼈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 국민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 간 협정에 따라 재중 동포들에게 중국 국적을 부여할 때 호구를 찢어 버리기도 했다. 안 할머니는 호구에 올리는 이름으로 천주교 세례명을 고집하며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중국 당국은 하는 수 없이 ‘안 누시아’로 불리던 그녀의 세례명을 중국어로 음역해 ‘안노길(安路吉)’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호구에 올렸다.

뒤늦게 그녀의 출옥 사실을 알게 된 친척들은 한국 당국이 관심을 가져 주길 바라고 있다. 반평생의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를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해 조국의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하얼빈=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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