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대통령 옆자리의 ‘의료민영화’

  • 입력 2009년 6월 1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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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깜짝 놀랐다. 기자실로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신임 인사차 기자실을 찾은 황명수 민자당 사무총장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대통령이 기자실로 전화를 걸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무슨 급한 일도 아니었다. 그냥 잘하라는 당부였다. 황 총장은 부동자세로 “예, 각하.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뿐이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모두 그 전화의 의미를 깨달았다. ‘약체’ 소리를 듣던 황 총장이라, 기자들과 당직자들이 보는 앞에서 힘을 실어주려는 제스처였다.

대통령의 국정행위는 말이나 법, 인사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수많은 말보다 때로는 이런 장면 하나가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 5월 8일 이명박 대통령의 ‘옆자리’도 내겐 그런 장면으로 보였다. 그날 청와대에선 서비스산업 선진화를 위한 민관합동회의가 열렸고, 경만호 대한의사협회장이 대통령의 옆자리에 앉았다. 신문 사진과 TV 화면은 이 대통령과 경 회장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는 서비스산업, 그중에서도 의료산업 선진화에 승부를 걸고 있다. 그러니 의사협회장을 대통령의 옆자리에 앉히는 자리배치도 그리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그뿐일까.

경 회장은 시장기능을 중시하는 미국식 의료체계를 주장한다. 얼마 전 기자간담회 때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비싼 비용을 물더라도 더 유명한 의사를 선택하고 싶을 수 있다. 이런 걸 허용해줘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의사들을 대변하는 의사협회장이니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영리병원 허용론을 대입해보면 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윤 장관은 이상할 만큼 영리병원에 ‘집착’을 보이고 있다. 문외한이 들으면 경제장관이 왜 저럴까 싶을 정도다. 오죽하면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결정은 (재정부 장관이 아니라 복지부 장관인) 내가 한다”고 했겠는가.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결국 의료서비스의 빈부(貧富) 양극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해도 윤 장관은 “현행 공공의료 시스템의 토대인 당연지정제는 유지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의료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의사협회장도 “영리법인을 허용하면 당연지정제는 저절로 무너지게 돼 있다”며 웃는데 윤 장관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문득 의심이 든다. 4대 강 정비사업과 대운하의 관계를 둘러싼 논란과 비슷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정부는 거듭 부인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4대 강 정비사업을 대운하의 전(前) 단계로 의심하고 있다. 영리병원도 결국 의료민영화로 가기 위한 전 단계 아닐까. 경 회장을 대통령 옆자리에 앉힌 건 결국 그런 암시를 위한 ‘의전(儀典) 정치’ 아닐까. 경 회장이 ‘정권 핵심과 소통하는 정치력’을 공약한 것도 알고 보면 그런 뜻 아닐까.

음모론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업자득이다. 대운하 논란이 왜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는지 생각해보면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알 것이다.

PS) 어느 자리에서 윤 장관의 ‘영리병원 집착’이 화제에 오르자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경제 수장(首長)이 경제 얘기만 계속하는 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딴 얘기를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김창혁 교육생활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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