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영욕 너머로 떠난 노무현 전 대통령

  • 입력 2009년 5월 24일 02시 54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가 국민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두 달 전 검찰 수사를 받기 시작해 어제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 근처의 절벽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유난히 도덕성을 내세웠던 전직 대통령으로서 심적 고통이 컸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가족이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 컴퓨터에 유서를 남겨놓고 뒷산 바위로 발길을 옮기던 전직 대통령의 좌절 절망 치욕감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이나, 비판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다만 법률가 출신의 대통령이 수사를 받다가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밖에 대처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노 전 대통령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 간 인물도 드물다. 빈농(貧農)의 가정 출신에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인권변호사와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영욕이 교차하는 굴곡진 한평생을 살고 갔다. 그는 2002년 국민경선 드라마와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의 기대, 젊은 세대의 인터넷 파워에 힘입어 대통령이 됐다. 집권 초기에는 권위주의 청산, 부패와 특권의 타파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임기 초 불법 대선자금과 대북송금, 정보기관의 휴대전화 도청 수사를 통해 투명한 정치문화를 만들어 가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지지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 파병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타결한 것도 평가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권위와 품위에 걸맞지 않은 언행으로 빈번히 비난을 자초했고 선거 개입 발언으로 2004년에는 탄핵 위기까지 가는 오점을 남겼다. 지나치게 좌(左)로 기운 경제 사회 교육 정책은 다수 국민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6·25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13위의 경제 강국으로 일어선 대한민국의 역사를 ‘오욕의 역사’로 규정해 분열과 갈등을 키웠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극명하게 평가 갈린 정치 실험, 역사 속으로

노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숙제와 교훈을 남겨놓고 떠났다. 최고 권력자와 관련한 비리와 부패는 역대 모든 정권이 해결하지 못한 과제다. 부정과 비리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어서 권력을 잡은 사람이나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게 마련이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천문학적인 뇌물수수죄로 처벌을 받았다. 민주화 이후에도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아들들이 구속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럼에도 최고 권력자 주변에 불법과 비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한 통찰이 따라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을 계기로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거나, 부패나 비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 사회 일각의 분위기에 일대 반성이 필요하다.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이 적절한 견제를 받지 못하면 부패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여전히 대통령이나 청와대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통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대통령 가족이나 친인척, 측근 인물에 대한 주변의 유혹을 감시하고 차단하려면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을 비롯한 사정시스템의 강화가 필요하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사건이 보여주는 것처럼 비리 예방을 책임지고 있는 민정수석비서관까지 비리에 연루된 상황을 감안한다면 제도적 보완만으로는 부족하다. 청와대 사정 업무는 사적 인연을 가진 사람을 배제하고 높은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불행한 종말은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전직 대통령이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전국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정치와 무관하게 국민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모든 이의 간절한 소망이다. 재임 때보다 퇴임 후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대통령을 배출하자면 우리 모두 힘을 보태야 한다. 이번 비극을 끝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거보(巨步)를 내디딜 때다.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가족과 핵심 측근들은 이번 사태를 교훈으로 삼아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다. 이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의 불행을 종식시키고 한국 정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야 할 막중한 과제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노 전 대통령의 비극을 국민 분열의 재료로 이용하려는 책동은 경계할 일이다. 일부 세력은 마치 그의 죽음에 이명박 정부와 검찰이 책임이 있는 양 선동하고 나섰다. 우리 국민은 그런 억지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만큼 성숙하다고 믿는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애석한 일이긴 하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원인은 어디까지나 권력 비리였다. 그리고 유서에 쓴 것처럼 ‘삶과 죽음을 자연의 한 조각’으로 파악한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우리의 관심은 최고 권력자의 도덕성에 대한 성찰과 함께 다시는 이런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대통령 주변비리 차단할 강력한 시스템 필요

검찰의 무리한 수사가 비극을 불렀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검찰은 비리가 드러나면 피의자와 관련 참고인을 불러 심문하고 철저하게 증거를 수집해 기소하는 것이 고유한 책무이다. 노 전 대통령은 수사과정에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배려와 예우를 받을 만큼 받았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비리 혐의가 있어도 묻어두는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 정권의 정치적 보복 의도가 개입된 것처럼 몰아가는 주장도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정(司正)이 뒤따랐지만 중요한 것은 집권기간에 권력자가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국가 사회의 안정을 깨는 새로운 빌미가 된다면 고인을 욕되게 할 뿐이다. 우리는 고인의 대통령 재임 시 증폭됐던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그의 서거가 또 다른 갈등의 기폭제가 된다면 국가적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는 어제 그의 사망 시점을 기해 종료됐다. 검찰은 형사처벌 대상자가 없어졌으므로 법적으로는 ‘공소권 없음’ 결정을 이미 내렸다. 그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40만 달러를 받은 혐의에 대해 “몰랐다” “퇴임 후 알았다” “집에서 부탁해 받은 것이다”는 등으로 해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대부분의 혐의사실을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부인 권양숙 씨와 아들딸의 형사책임도 묻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 전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국회의원과 법조계 인사, 전현직 고위 공직자, 그리고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는 흔들림 없이 계속돼야 한다.

또 다른 갈등 부를 ‘정치적 악용’ 말아야

노 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한 방식은 국가 이미지를 손상하고 청소년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을 단 한 명도 갖지 못한 국민의 고통과 상처도 깊고 크다.

노 전 대통령은 ‘깨끗한 정치’와 도덕성을 내세워 당선됐지만 퇴임 후 본인은 물론 가족과 형의 비리 혐의가 불거지면서 도덕의 깃발은 무참히 찢겨졌다. 결국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전직 대통령이 됐다. 그의 삶과 죽음은 한계에 도전하다 끝내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한 인간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노 전 대통령은 열정과 이상은 뜨거웠지만 현실 정치를 통해 승화시키지 못하고 자신이 높이 내건 도덕성과 개혁의 칼날에 스스로 베이고 말았다. ‘정치인 노무현’의 공과에 대한 궁극적 평가는 역사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다.


▲동아닷컴 뉴스콘텐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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