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굴림체 쓰시나요?

  • 동아닷컴
  • 입력 2009년 4월 18일 14시 25분


[표]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기업/공공기관 폰트
[표]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기업/공공기관 폰트
떠오르는 폰트 비즈니스, "아직도 굴림 쓰세요?"

미국 애플사의 CEO 스티브 잡스는 회고 강연에서 '맥(매킨토시의 애칭) 대히트'의 숨겨진 이유로 아름다운 서체를 거론한 적이 있다.

"캘리포니아 리드대를 중퇴하고 타이포그래피(활자학) 수업을 청강하며 시간을 보냈다. 훗날 이 공부가 IBM에는 없는 아름다운 서체를 맥에 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곤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서체가 주목받고 있다.

서체는 이제 휴대전화나 PMP 등 새로운 IT기기를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설정 가운데 하나다. 미니홈피에서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 '웹 폰트'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현재 싸이월드, 네이버 등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유료 글꼴의 종류는 700여개. 개인용 글꼴시장은 200억 원대 규모로 추정된다.

● 기업들의 정체성 이제는 폰트!

예전엔 폰트 개발이 신문사들을 중심으로 진행됐으나 이제는 포털 사이트나 쇼핑회사들이 나서서 새로운 폰트를 개발해 무료 배포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서체의 독점은 시각 아이덴티티를 독점하는 것"이라는 전략에 따른 행동이다.

폰트가 기업 이미지 확립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은 삼성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오래전부터 삼성은 자사의 모든 제품에 적용되는 폰트 개발을 위해 국내외 최고 폰트회사들과 손잡고 한글은 물론 숫자와 알파벳 심지어 한자까지 새롭게 디자인해왔다. 이른바 삼성체다.

공공단체도 폰트 개발에 나섰다. 지난해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남산체'와 '서울한강체'가 대표적이다. '서울남산체'는 직선이 강조된 글꼴이고, '서울한강체'는 물이 흐르는 한강의 모양을 따 곡선이 강조된 글꼴이다.

● 본격적인 서체독립, 맑은 고딕

요즘 각광받는 첨단 서체는 2007년 '윈도우 비스타'와 함께 배포되기 시작한 '맑은고딕'이다. 맑은고딕은 비트맵 폰트 없이 온스크린 전용폰트로 개발된 최초의 한글폰트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사가 적극적으로 이 폰트를 배포하며 비스타 사용자가 아닌 XP사용자들에게도 폭넓게 쓰이고 있다. 블로거들도 재빠르게 맑은고딕을 기본 서체로 채택하고 "디자인의 격이 올라갔다, 눈이 한결 편해졌다"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윈도 기본 서체였던 굴림을 대체해 확산되어 가는 맑은고딕의 탄생과정을 되짚어 보면 가히 '한글 서체 독립'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굴림체는 윈도 뿐 아니라 한동안 워드프로세스 시장을 장악한 '한글'에서도 주로 쓰였다. 1995년 MS 윈도의 한글판에 탑재되며 우리 눈을 장악한 굴림체는 따지고 보면 한국 문화와 무관한 일제에 가깝다. 1960년대 일본의 나카무라 유키히로가 개발한 '나루체(둥근고딕)'에 바탕을 두고 급조된 서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민서체인 이 글꼴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서체가 굴림인데 이를 윈도우가 채택하고 컴퓨터 환경을 장악하면서 우리 눈에 익숙해진 상황이 된 것. 글꼴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굴림체는 민족 문화의 대참사"라는 지적까지 나오기도 한다. 당시 한국 MS의 글꼴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해 십 년 이상 컴퓨터에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사장시켰다는 것.

실제 넓고 둥근 모양의 굴림체는 박스 안에 일률적으로 답은 듯 사용자들에게 답답하고 불편한 느낌을 안겼을 뿐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한글 폰트는 아름답지 않다"는 편견을 디자이너들은 물론 전 세계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각인시키고 말았다.

맑은고딕은 이 같은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적 조형미를 살리고 현대적이며 가독성을 극대화시킨 서체로 컴퓨터 위에서 한글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끔 디자인됐다.

● LCD에서 최적화, 보이는 대로 프린트

폰트는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최첨단 컴퓨팅 기술은 물론 각종 디자인 감각이 집약돼 있다.

맑은고딕이 굴림이나 바탕보다 진일보해 보이는 이유는 어떤 크기에서도 깨지지 않고 선명하게 표시될 뿐만 아니라 LCD창에 보이는 대로 프린터로 출력된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화면으로 보는 한글이 불편해 반드시 프린터로 출력했던 사람이라면 컴퓨터 폰트 환경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맑은고딕에는 사상 최초로 '클리어타입 매뉴얼 힌팅(hinting)'이라는 기술이 적용됐다. 힌팅은 모니터처럼 점으로 표현되는 화면상에서 해상도의 제한으로 인한 글자의 왜곡을 최소화하는 아웃라인 수정기술이다. 맑은고딕 개발을 담당한 산돌커뮤니케이션(대표 석금호)에서는 15명의 디자이너가 약 10억 원 및 2년여의 시간을 들여 표준한글 2350자와 한글 조합형 1만1172자를 모두 힌팅해 MS에 공급했다.

네이버가 보급하는 '나눔고딕'과 '나눔명조'등 최근 개발된 첨단 서체들은 이 힌팅 기술을 적용해 출시되고 있다. 컴퓨팅 환경이 진보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급 폰트의 수요가 생긴 것. 한편으로 맑은고딕이 급속하게 주류로 자리 잡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급속한 LCD의 보급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과거에는 10pt로 충분했지만 화면이 커지고 고화질로 바뀐 뒤부터 12pt로 키워도 아름답게 보이는 폰트가 필요했다는 얘기다.

맑은고딕의 급성장과 함께 한국에서도 폰트 경쟁의 막이 올랐다. 과연 누가 한국인들의 눈을 장악할 수 있을 을까?

[인터뷰] 산돌커뮤니케이션 수석디자이너 권경석.

"맑은고딕이라는 이름은 '맑고 투명한 이미지' 라는 뜻입니다. 잘 지은 이름이죠?"

일찍부터 서체 디자인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투자해온 산돌커뮤니케이션은 다양한 한글 서체관련 사업으로 주목 받고 있다. 5월 사상 최초로 국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글 체험관을 오픈하며 해외에도 한글 디자인 상품을 수출하고 있다.

2006년 맑은고딕 서체 디자인을 지휘한 권경석 수석디자이너는 200여종 이상의 폰트 개발에 참여해온 국내 폰트디자이너 1세대에 속한다.

- 최근 맑은고딕에 대한 호응이 높다. 어떻게 MS 윈도에 공급하게 됐나?

"2002년 당시 최초 비스타용 한글 버전을 MS본사에서 검토했는데 회의적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한글이 워낙 복잡하고 그 수가 많아 '힌팅' 기술을 접목하기 힘들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한국MS는 차근차근 본사를 설득해 비스타에 적합한 한국어 서체 개발을 요구했고 결국 디자인 기술이 앞선 우리가 개발해 납품하게 됐다. 현재는 각국이 자국어 UI 버전을 가지고 있지만 자국의 기술로 힌팅 기술을 글꼴에 접목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 폰트 비즈니스가 왜 중요한가?

"첫째는 활자를 통해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것 그 자체로 엄청난 위력을 가진다. 삼성TV에 '파브'나 '삼성'의 로고가 없다면 삼성TV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문자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제 LCD 모니터 위에서 문명이 펼쳐지게 됐다. 화면에 보다 또렷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디자인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국내 디자인 환경은 어떤가?

"일본에 갈 때마다 일본 디자이너들이 한국을 부러워한다. 폰트디자인을 하겠다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많기 때문인데, 실제 역동적이고 다이내믹하게 발전하는 상황이다. 현재 유럽문자의 디자인은 거의 완료된 상황이다. 더 이상 새로운 디자인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나 한글은 이제 시작이다. 무궁무진한 폰트 시장이 열린다는 얘기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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