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던 만세운동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는 무엇일까.
바로 ‘아리랑’이다.
30년 동안 아리랑을 연구해 온 김연갑 한민족아리랑협회 상임이사는 3·1운동 90주년을 앞둔 27일 ‘3·1운동 당시 아리랑의 역할에 대한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김 이사는 “전국 곳곳의 만세운동을 기록한 자료를 종합해 보면 현장에서 주로 불렸던 노래는 애국가, 찬송가, 아리랑이었다”며 “가장 인기 있었던 노래는 학생뿐 아니라 배우지 못한 일반 국민도 쉽게 부를 수 있는 아리랑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총독부가 3·1운동 당시 연행했던 사람들을 조사해 기록한 취조문서에 따르면 당시 집회는 집결-애국가 제창-독립선언서 낭독-시가행진-번화가 집결-연설-노래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집회는 항상 일반 시민과 학생들의 아리랑 합창으로 마무리됐다.
김 이사는 “당시 지역마다 각기 다른 가사의 아리랑이 존재했다”며 “각 지역의 3·1운동 상황은 아리랑의 가사로 전국에 전파돼 다른 지역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모의 흉계 시해 항일을 낳고/일제의 기습합방 항일을 낳았다/삼순(三旬)에 구식(九食)하여 아사(餓死)를 낳고/우리네 순절함이 절신을 낳네.’(충남 대전)
‘논둑아 밭둑아 날 살리라/이 불콩이 날 죽인다….”(경남)
강원 춘천시에서는 ‘춘천 의병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독립군들은 아리랑의 선율에 가사를 바꿔 암호로 사용하기도 했다. 독립군들 사이에서 일본군의 수를 전달할 때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가사를 일본군의 수에 따라 ‘이십 리도 못 가서’ 또는 ‘삼십 리도 못 가서’라는 식으로 아리랑을 불렀다는 것.
이렇게 독립군들 사이에서 불렸던 아리랑은 1941년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발행한 ‘광복군 군가집’에도 수록됐다.
김 이사는 “제대로 된 언론도 없던 시절 전국에 3·1운동의 물결을 몇 달 동안 일으켰던 동력 가운데 하나는 입에서 입을 타고 퍼져나간 아리랑이었다”며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아리랑은 훗날 독립운동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