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위기… 인터넷 집단지식의 한계

  • 입력 2009년 1월 12일 02시 58분


‘미네르바 사건’이 보여준 한국의 지식 생산구조 문제점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경제위기를 전망한 글들을 인터넷에 올린 이가 경제학 전공자도 아니고 금융계 종사자도 아닌 30대 박모 씨로 드러났다.

그런 박 씨가 인터넷 서핑을 통한 정보와 독학한 경제학 지식으로 쓴 글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전문가 집단이 지식을 독점적으로 생산해 대중에게 공급해 온 전문가 체계(expert system)의 위기를 보여준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미네르바가 신분을 위장한 채 일부 검증되지 않은 글을 올린 것을 둘러싸고 일부 누리꾼이 열광하며 그를 영웅시한 것은 전문가 집단을 비판하는 인터넷 집단지식(개인들이 인터넷상에서 서로 소통하며 쌓아가는 지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지적도 있다.

전문직업 사회학(sociology of profession)의 ‘전통적 전문가와 일반인의 관계’에 따르면 전문가는 △지적 권위 △도덕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비전문적인 일반인에게 지식을 공급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일반인은 전문가를 신뢰하며 그 권위와 영향을 받아들인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이런 관계로 이뤄진 사회 제도를 전문가 체계라고 불렀다. 그러나 미네르바 사건에서 보듯 현재 한국의 전문가 체계는 지적 권위와 도덕적 우월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윤평중 교수 “지식인 사회 이념 당파성 과잉 학문의 가치까지 위협받아”

전상진 교수 “인터넷 지식 검증없이 유통 윤리-과학-법적 여과장치 필요”

▽전문가 집단의 권위 상실=현재 한국 사회에서 정치 법 과학 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지적 권위를 상실하고 있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이는 사회 경제 체제가 전문가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해지면서 불확실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레바논 출신 미국 월스트리트 투자전문가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2008년 책 ‘블랙 스완’에서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 등 기존 이론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사태에 봉착해 한계를 보인 지식 사회를 꼬집었다. 블랙 스완은 18세기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면서 백조를 흰색으로 알고 있는 정설이 무너진 것을 은유하는 말로 과거 이론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뜻한다.

특히 세계적 경제위기에서 금융 전문가들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권위가 손상됐으며 이에 따라 대중의 불신이 커졌다. 한국의 경우는 전문가 집단 층이 두껍지 못하고 깊이가 부족해 미네르바의 유명세를 부채질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 집단의 도덕성 상실=전문가 집단의 권위는 전문가의 직업윤리 의식에 대한 대중의 신뢰에서 나온다. 환자는 의사가 객관적 사실과 양심에 따라 진단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처방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2005∼2006년 황우석 박사 사태, 되풀이되는 학계의 논문 조작 및 표절 논란, 대통령 선거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폴리페서(polifessor·정치 참여 교수)로 인해 전문가 집단의 도덕성과 직업윤리 의식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국회에서 벌어진 ‘난장판’도 전문가를 자임하는 의원들이 당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됐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같은 전문가들에 대한 불신은 미네르바의 인터넷 발언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한국 지식 사회는 정치적 이념이 과잉된 탓에 당파성이 사실 탐구를 압도해 학문의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며 “신뢰를 회복하려면 전문가 집단이 객관적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 집단지식도 오류 반복=인터넷 집단지식이 전문가 집단을 비판하면서 객관적 사실보다 왜곡된 정보에 의해 좌우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불러일으켰던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에 대한 공포가 MBC ‘PD수첩’의 의도된 오역이나 일부 운동단체의 과장된 사실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표적이다.

미네르바도 신분을 위장해 ‘경제 전문가의 권위’를 얻으려 했고, 그의 예측은 근거가 희박한 대목도 많았으며 지나치게 단정적이었다. 이처럼 ‘취약하지만 단호한’ 예측이 인터넷에서 확산되면서 하나의 신드롬을 낳았다는 사실 자체가 인터넷 집단지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문가 집단의 한계를 보완하는 집단지성(식)의 가능성이 분명히 있지만 전문가 집단이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거치는 정밀한 검증 과정이 없고 법적 윤리적 과학적 절차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집단지성(식)의 맹점”이라고 말했다.

윤평중 교수는 “‘미네르바’의 글은 사실적 요소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논리보다 많았지만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채 대중이 그에 감성적으로 휩쓸렸다”며 “이런 현상 자체가 건강한 사회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우중(愚衆) 정치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동아닷컴 박태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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