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탄의 만화가, 고행석 “졸린 눈으로 보면 세상이 유쾌해져요”

  • 입력 2008년 10월 4일 08시 24분


《80년대 흔히 만화방이라고 불리던 대본소에는 3대 간판스타가 존재했다. 이현세와 박봉성, 그리고 고행석이었다. 이들 3인이 창조해낸 까치와 엄지, 강타와 보배, 구영탄과 박은하는 시대를 상징하는 캐릭터이자 열혈청춘들의 연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구영탄은 유별나게 튀었다. 마초적 완전무결함으로 중무장한 까치, 강타와 달리 구영탄은 빈 곳이 많았다. 자는 듯 마는 듯 게슴츠레한 눈, 부스스한 머리, 잔돈푼에 목숨을 거는 주제에 모든 일에 무사태평하기만 한 구영탄은 슈퍼스타의 본질적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영탄은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구영탄을 보고 있자면 묘하게도 뱃속이 훈훈해지며 ‘살아야겠다’는 힘이 솟았다.

고행석 작가(60)는 이른바 대본소 작가이다. 서점이나 대여점에서는 그의 책을 찾아볼 수 없다. 대본소 만화는 대량생산에 특징이 있다. 그의 화실에서도 한 달에 40여 권의 만화책을 쏟아낸다. 대여점에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물량이다.

국내 대본소는 사양산업이다. 한때 1만 5000여 곳에 달했던 대본소는 현재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000여 곳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만화를 그려 먹고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고행석 작가가 만화가가 되기로 작심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그는 전남 광양군 다압이라고 하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이후 국민학교 3학년 때 여수로 이사를 했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만화라는 것을 보았다.

“너무 좋았죠. 너무 좋아가지고, ‘아! 나 이거 해야겠다’하고 결정을 해버린 거죠.”

구수한 남도의 억양으로 고작가는 느릿느릿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일도 참으로 오랜 만이라 했다.

“아주 옛날 분이신데, 김종래 선생을 제일 좋아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분 만화를 많이 흉내냈죠. 노트며 교과서며, 빈 공간만 보이면 그림을 그려댔어요. 친구들이 여수 돌산 딸기밭 같은 데 놀러가자고 해도 그림 그리느라 거절할 정도였죠. 그런 데 가서 아가씨들 만나기도 하고 그랬죠. 그때는 그랬어요. 허허”

‘고향친구’ 허영만 도움으로 만화가 길

여수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군 복무를 마친 뒤 상경했다. 서울에는 중학교 시절부터 고향친구인 허영만이 있었다. 편지를 보내 “나 좀 어떻게 해주라” 부탁했더니 일단 올라와 보라는 전갈이 왔다.

“허영만이가 … 본명은 허형만이죠. 형만이가 늑막염에 걸려 군대를 안 갔거든요. 그래서 저보다 만화계에 3년 정도 일찍 입문을 했어요. 형만이도 당시 작가는 아니고 문하생이었는데 꽤 인정을 받고 있었어요. ‘이 바닥 문하생 중에서는 최고 소리 듣는다’ 자랑도 하고 그랬죠.”

허영만은 고행석을 데리고 다니며 자신이 아는 작가들을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작가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고행석을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는 중학교를 졸업할 만한 나이에 만화계에 입문하는 것이 보통인지라 20대 중반의 ‘노땅’을 받아줄 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최경이란 작가를 만났다. “그림을 한 번 보여주게”해서 내놨더니 “같이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 분 작업실이 김포공항 근처에 있었어요. 한때 유행했던 동물 의인화 만화를 그리시던 분이었죠. 거기 갔더니 바로 뎃상부터 하라고 하더라구요.”

만화계는 엄격한 도제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문하생으로 입문하면 제일 먼저 선배들의 뒤처리부터 해야 한다. 그러다 조금 배우면 배경을 그리게 되고, 다음은 인물터치로 넘어간다. 그 윗단계가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는 뎃상이다. 처음 만화계에 들어선 고행석에게 뎃상을 맡겼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다.

최경 작가 밑에서 2년 정도 있다가 당시 유명 만화가였던 박기준 작가 밑으로 옮겨 7년을 배우고 일했다. 스토리와 뎃상을 병행하며 만화작가의 꿈을 한창 키워가던 무렵, 그는 지독한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된다. 군 제대할 무렵 80키로였던 몸무게가 56키로까지 떨어졌다.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늘 가슴이 답답했죠. 잠을 전혀 못 자고요. 사람 눈을 제대로 못 쳐다봅니다. 극복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죠.”

상대의 눈이 마치 칼로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화를 하다 보면 내 속이 훤히 상대에게 읽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할 때면 늘 책상을 내려다보며 이야기 했다.

버스를 타고 성산대교 위를 지날 때면 ‘버스가 빨리 다리를 지나가야 할 텐데’하고 조바심이 났다. 다리가 무너지는 상상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무렵 산동네에 게딱지만한 대본소를 차렸다. 아내가 대본소 일을 보고 자신은 방에서 만화를 그렸다. 작가에게 일감을 받아와 뎃상을 하는 일이었다. 한 권을 그리면 5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루종일 다른작가 밑거림…몸 망가져

“한 달에 4권 정도 했는데 자꾸만 돈 욕심이 나는 거예요. 하루라도 빨리 하면 돈이 일찍 나오잖아요. 그리고 좀 무리해서 5권을 하면 돈이 더 나오니까, 고걸 좀 더 할라고 무리를 하는 거죠.”

선풍기도 없던 시절. 한 여름에 아내는 등 뒤에서 부채질을 하고 자신은 만화를 그렸다. 밥상을 가져다 놓으면 밥을 먹고, 앉은 자리에서 몸만 90도로 돌려 또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위장을 심하게 다쳤다.

“성급했죠. 나도 빨리, 저 만치 앞서가고 있는 허영만이처럼 되고 싶다. 뭐 이런 거죠.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천천히 가자. 한 달에 한 권만 하자. 더도 말고 마흔까지만 살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30대 중반. 아이들도 불쑥 자라 있었다. 언제까지 남의 일감이나 받아다 하고 있을 것인가. 자작을 통해 작가라는 이름을 얻고 싶어졌다.

작품을 만들어서 출판할 곳을 찾아다녔지만 선뜻 써주는 데가 없었다. 모 어린이신문이 주최하는 공모전에도 응시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몇 년 전 허영만이 최우수상을 받았던 그 공모전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만사태평’구영탄 그리며 신경쇠약 호전

고행석 작가의 데뷔작은 ‘아빠 아빠 우리 아빠’라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정식 출판사가 아닌 무허가, 속칭 ‘동대문 보따리 장수’라고 불리는 유령 출판사에 팔았다. 그나마 출판사 사장이 식자 붙이는 일을 자신의 중학생 딸에게 시키는 바람에 100여 군데가 잘못된 ‘비운의 데뷔작’이었다.

그렇다면 구영탄은 어떻게 나왔을까? 처음에는 노영탄이란 이름이었고, 꺼벙한 눈이 아닌 또렷한 눈을 가진 영탄이었다. 그러다 일본만화 작품 중 가끔 눈을 지그시 뜨는 캐릭터를 보고 ‘반짝’ 영감이 왔다.

“마음이 느긋해지거나, 졸린다거나, 사람을 깔 볼 때 반쯤 눈을 뜨는 표정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어요. ‘야! 이런 눈을 하루 종일 하고 있는 인물을 만들면 어떨까. 졸고 있으면서, 부처님 같은 인상으로 한번 가 보자.’ 한 거죠.”

신경과민으로 고통 받던 그에게 돈과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구영탄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꿈꿔왔던 희망이자 이상형이었다.

구영탄이 첫 등장한 ‘요절복통 불청객’이 세상에 나온 것은 그가 37세 때의 일이었다. 반응이 없길래 “이거 재미없나보다”하고 권투만화를 그리고 있는데 출판사 차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요절복통이 대박 났는데 무슨 권투만화냐고 타박이었다. 전국 대본소에서 요절복통을 보내달라고 난리가 났다는 얘기였다.

‘불청객’ 대히트 한달에 5천만원 벌기도

돈도 많이 버셨겠다고 물으니 그가 흐흐흐 웃었다.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써버렸습니다.”

한 달에 많이 벌 때는 5000만원도 벌었다. 그 당시 5000만원은 상당한 거금이었다. 그러나 처음 몇 달뿐이었다. 스토리작가를 비롯해 좋은 스텝을 쓰려면 돈이 많이 들었다. 뛰어난 스텝들에 대한 만화가들의 스카우트 전쟁이 치열했다.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결국 출판사 좋은 일만 잔뜩 시켰다.

화곡동 술집은 고행석 화실 사람들이 다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로 술도 많이 마셨다.

구영탄은 떴지만 몸에 또 한 번 위기가 왔다. 일명 버거씨병이라고도 하는 말초혈관폐색증. 오른쪽 다리가 발가락에서부터 썩어들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볼펜으로 무릎 위에 선을 그렸다.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합니다. 뼈를 면도칼로 긋는 것처럼 아파요. 일하다가 갑자기 ‘으악’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길을 가다가도 통증이 오면 전봇대를 붙들고 견뎌야 했죠. 다리를 자르느니 술이나 먹고 죽어버리자 하는 마음이었어요.”

다행히 병은 극적으로 치유되었다. 썩어 들어가던 혈관이 되살아났다며 바지를 걷어 보였다.

쫓기듯 쏟아낸 작품들…이젠 대작 욕심

고행석 작가는 스포츠광이다. 본인 말에 따르면 고향 여수가 워낙 험한 동네라 운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었다고 했다. 태권도 빼놓고는 거의 모든 운동을 직접 해봤다. 권투 스파링을 위해 링에 올랐다가 눈앞이 깜깜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경험도 겪었다. 지금도 그는 화실에 펀치볼을 가져다 놓고 틈만 나면 두들긴다.

스포츠에 대한 그의 애정은 구영탄의 불청객 시리즈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실제로 구영탄 시리즈는 대부분이 스포츠를 소재로 삼고 있다. 기자 역시 학창시절 여주인공 박은하가 천재 스프린터로, 구영탄이 트레이너로 등장하는 작품을 감동받아가면서 읽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고작가가 “아! ‘왈가닥과 0.1초’요?”하고 오래된 작품을 기억해냈다.

“이제 저도 대작 하나 해야죠. 항상 다음 작품, 다음 작품 하며 쫓기다 보니 마음 편히 ‘멋있는 거 하나 해야겠다’하는 여유를 갖지 못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뭐, 전 100살까지 살 거니까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천천히 연구해 봐야죠. 100살까지 살 방법도 다 연구해놨어요. 기대해 주십쇼. 허허”

고행석...?

●1948년 전남 광양 출생

●1981년 ‘아빠아빠 우리아빠’로 데뷔

●1984년 ‘요절복통 불청객’으로 구영탄 시리즈 탄생

●최근 ‘불청객 시리즈’에 이어 ‘악질시리즈’로 인기

●대표작 : 폭풍열차, 마법사와 코리(TV애니메이션으로도 방영), 천방지축 불청객, 돌아온 불청객, 가위바위보 불청객, 전설의 야구왕, 해와달, 굴뚝새 등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 =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스포츠동아 인기화보>

·‘비키니폰’모델 제시카 고메즈 스타화보 촬영현장

·2008 엘리트모델룩 선발대회 화보 촬영 현장

·‘왕기춘의 그녀’ 문지은, 명품 W라인 공개

·‘롱다리 미녀가수’ 한영, 황홀한 비키니 자태

·연예계 스타들의 깜짝 섹시화보 컬렉션

·미스코리아 출신 ‘늘씬 미녀들’ 잇단 화보집 공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