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업뎃 않고는 못살아”

  • 입력 2008년 8월 29일 02시 55분


디지털 기기 - 컨텐츠 ‘업데이트’에 목숨 건 사람들

내 이름은 ‘업데이트(Update)’. 현재 설정에 맞지 않거나 오래된 것을 지금의 환경에 맞도록 변경한다는 뜻이야. 이런 내가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너무 바빠서 쉴 틈이 없어.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내 이름을 부르지. 윈도 업데이트, 음악 파일 업데이트, 휴대전화 배경화면 업데이트, 심지어 패션계에서도 스타일을 업데이트한다는 말을 쓰더라고.

얼마 전에는 ‘기도 업데이트’ ‘수능 업데이트’라는 책이 서점 한곳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걸 봤지. 옆집 삼촌부터 미국의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까지 날 찾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지.

하지만 나만 보면 머릴 쥐어뜯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많아. 얼마 전 MP3플레이어에 새로운 음악 파일을 넣던 대학생 친구는 그 많은 노래의 앨범 재킷사진을 구하려다 밤을 꼴딱 새웠다고 하더군. 그런가 하면 최근 유럽 여행을 다녀온 한 아줌마는 현지에서 찍은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느라 밥도 못 먹었다고 하소연이야.

나 때문에 열 받는대.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지. 업데이트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그야말로 목숨 걸고 업데이트 하는 거야. 나는 이런 현상을 내 이름을 본떠 ‘업트레스(업데이트 스트레스의 준말)’라고 말하고 싶어. 자, 여기 업트레스와 싸우는 ‘업뎃(업데이트를 줄여 부르는 애칭)’족들의 얘기를 한번 들어보자고.

○ 21세기 신인류 업뎃족. 그리고 새로운 내 친구 업트레스

“따르릉∼.”

자명종 소리에 일어난 김동철(26·연세대 미디어시스템연구실 박사과정) 씨는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컴퓨터 스위치를 누른다. 하루에도 수십 번 e메일을 체크할 정도로 e메일 업데이트에 민감한 김 씨. 그러나 로그인은 단 한 번뿐이다. e메일 확인시간을 줄이기 위해 얼마 전 자신이 직접 만든 ‘자동 로기너’로 e메일을 확인한다.

연구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김 씨는 블로그 업데이트에 여념이 없다. 블로그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전에는 자신의 블로그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 붙들려 있어야 했지만 얼마 전부터 ‘윈도 라이브 라이터’라는 프로그램을 쓰고부터는 짬짬이 글과 사진을 작성해 편집할 수 있다.

집에 돌아와서도 역시 업데이트다. 일기 쓰는 것이 취미인 김 씨는 최근 일기 업데이트 시간을 줄이기 위해 ‘라이프 로그’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는 자신의 모습을 1분 단위로 찍어주는 소형 웹캠(화상카메라)으로, 김 씨는 이 웹캠이 찍은 사진들을 매일 자신의 디지털 일기장에 업로드해 놓는다.

시간과 비용을 줄이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업데이트할 수는 없을까. 5년 전 이런 고민을 했던 김 씨는 “어느덧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업데이트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의 시장조사기관인 IDC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 유통된 디지털 정보량은 총 281EB(엑사바이트·1EB는 약 3017억 GB). 전 세계 인구 65억 명을 기준으로 하면 1인당 평균 46GB의 디지털 정보를 소비한 셈이다. 4분짜리 MP3 음악파일 1곡(약 4MB)으로 치면 약 1만1500곡의 분량이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진=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지면 디자인=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왕짜증, 업데이트

아! 어제도 날밤 새웠네

한정된 시간 안에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 갈아야 할 디지털 콘텐츠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업데이트의 ‘업’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업트레스 시대. 하지만 이미 업데이트는 이들에게 일상처럼 여겨지고 있다.

본보가 인터넷 쇼핑몰 ‘G마켓’과 함께 누리꾼 6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의 39.8%가 하루에 한 번, 또는 수시로 업데이트를 한다고 답했다. 한 번 업데이트할 때 투자하는 시간도 ‘2시간 이상’이 26.2%에 달했다.

○ 얼마나 많은 콘텐츠? No∼ 얼마나 빠른 콘텐츠의 시대!

애니메이션 기획업체 ‘와일드옥스엔터프라이즈’의 김혁(44) 대표는 매일 아침 남들보다 1시간 반 일찍 출근한다. 2년 전부터 운영하는 테마파크를 주제로 한 블로그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출근시간까지 앞당긴 것이다. 김 대표는 “게으른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취미 활동 삼아 매일 업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업뎃족’은 업데이트 여부에 따라 경쟁력이 결정되는 시대라고 한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주제로 한 전문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대학생 오성진(24) 씨는 “업데이트에 시간을 뺏긴다고 가끔 부모님께 핀잔을 받지만 누구나 블로그를 하는 지금엔 누가 빨리 새 글을 올리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했다.

밥 대신 음악 한 곡, 사진 한 장 업데이트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시대.

지난주 SK커뮤니케이션즈에서는 미니홈피 사진 업데이트 추이에 관한 통계를 발표했다. 한 주간 자신의 미니홈피에 1000장 이상 새 사진을 올리는 회원이 435명이나 됐다. 블로그 전문 사이트 ‘이글루스’에 따르면 지난달 블로그 업데이트 건수가 33만1997건으로, 하루 평균 1만1066건의 글이나 사진이 새로 게시되고 있었다.

디지털기기 업체에서도 업데이트에 필요한 전송 속도, 파일 변환(인코딩) 속도가 최고의 화제다. ‘아이팟’을 내놓은 ‘애플’사(社)는 자체 전송 프로그램인 ‘아이튠즈’의 파일 변환속도를 과거 2∼3배속에서 현재 최대 30∼40배속(80분짜리 동영상을 2분 안에 변환)으로 계속 높이고 있다. ‘코원’은 아예 파일 변환이 필요없는 칩을 내장한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를 내놓았다.

삼성전자 모바일솔루션센터 김영아 선임연구원은 “업데이트가 생활의 일부인 만큼 이제는 얼마나 전송속도를 빨리 낼 수 있느냐는 게 지상 과제”라고 말했다.

○ 업트레스가 낳은 ‘업데이트 알바’ 시대

하지만 업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또 다른 업트레스를 낳는다. 종이 공예를 주제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김수진(36·미술 강사) 씨는 “하루라도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F학점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나쁘다”며 “업데이트는 이제 취미가 아닌 일”이라고 말했다.

6개의 MP3플레이어를 갖고 있는 직장인 이일희(26) 씨는 업데이트 때문에 회사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적이 종종 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새로운 음악 파일로 MP3플레이어를 업데이트하는데, 때때로 2시간 들여 변환한 동영상 파일이 깨져 화면에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다 1시간도 못 자고 출근한 적도 많다. 너무 피곤한 날은 ‘반차’를 써 오전 내내 잔 적도 있다.

이 씨는 “제대로 업데이트 되지 않은 채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면 찝찝한 기분을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4GB 용량의 MP3플레이어를 사용하고 있는 직장인 원일현(31) 씨는 업데이트를 하며 종종 자괴감에 빠진다. 용량이 꽉 찬 기기에 새로운 음악 파일을 넣으려면 다른 파일을 지워야 하는데 망설이다 2, 3시간씩 파일 목록만 바라볼 때가 많기 때문. 원 씨는 “소심한 성격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짜증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업데이트 아르바이트, 일명 ‘업뎃 알바’도 생겨났다. MP3플레이어나 PMP에 자신이 원하는 노래, 드라마 등의 파일을 적어주고 기기를 맡기면 대신 업데이트해주는 신종 아르바이트다.

‘아이팟터치’ 인터넷 동호회 회원인 성길수(33) 씨는 새로 옮긴 직장 일 때문에 음악 파일을 업데이트할 시간이 없어 ‘알바 구함’이라는 글을 남긴 끝에 같은 동네 대학생에게 3만 원을 주고 대리 업데이트를 맡겼다. 그는 “최신곡을 잘 몰라 동료들에게 핀잔을 받고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3만 원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 “아∼ 업트레스 받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는 MP3플레이어… 즐기기 위해 시작한 디지털 콘텐츠마저 서로 경쟁하듯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 교수는 업트레스를 넓은 의미의 ‘사회적 중독’이라고 지적했다.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뒤처진다는 강박관념과 남에게 돋보이기 위한 자기 과시욕에서 생겨난 결과”라는 분석이다.

다른 정신과 전문의들도 “지나치게 업데이트에 매달리면 생활 리듬이 깨질 뿐 아니라 만성 피로나 목 디스크 등 신체적 부작용도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세대 황상민 심리학과 교수는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업데이트를 하는 것은 젊은 세대에겐 일종의 본능이자 스스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MP3 파일을 넣고 새 글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끊임없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이 반복되면 처음엔 무의미하던 것도 일상화가 되며 나름의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곧 ‘디지털 콘텐츠=자기 자신’이라는 업뎃족들의 논리와도 맞아떨어진다. 숭실대 배영 정보문화학과 교수는 “디지털 시대 사람들은 MP3플레이어에 담긴 파일, 동영상 기기에 담긴 영화, 블로그 등의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본능과도 같은 업데이트. 이러한 업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건국대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른바 ‘데이터 스모그’ 시대에 아직도 ‘얼마나 많이 정보를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이보다는 그 많은 정보 중 내게 맞는 것만 골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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