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다크 나이트’ 유식하게 보는 법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8월 26일 03시 04분



예측불허 조커, ‘카오스이론’도 안 통해

열혈 검사 덴트는 ‘자유의지’의 상징적 존재

배트맨, 악당 응징하다 ‘선악의 딜레마’ 빠져


‘앗, 강적이다.’

영화 ‘다크나이트’(The Dark Knight)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쥐 탈을 뒤집어 쓴 주인공이 조커란 악당과 대적해 지구를 지킨다’는 유치찬란한 설정의 이 영화. 그러나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 어떤 염세(厭世) 철학보다도 보는 이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어두운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었다.

영화 ‘다크나이트’가 품고 있는 생각의 깊이란 과연 얼마 만큼일까? 이 영화의 이야기 속에 용해돼 있는 인문학적 배경을 조목조목 살펴본다.

①카오스(chaos·혼돈)이론=불규칙하고 불안정해 보이는 혼돈 속에서도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형성되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이론. 카오스이론의 토대가 된 건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란 가설인데,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말로 대변된다. 쉽게 말해,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선 아주 작은 원인이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영화 속 악당 ‘조커’(히스 레저)가 진짜로 무서운 놈인 이유는, 이 카오스 이론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놈’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을 몰고 가려는 카오스는 아예 어떤 이유(reason)도 원인(cause)도 찾을 수 없는 혼돈 그 자체다.

조커는 말한다. “Why so serious(왜 이렇게 심각해)?” 그는 어떤 논리적 이유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며, 어떤 심각한 계획(scheme)도 세우지 않는다. 그가 나쁜 짓을 통해 번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는 불을 싸질러버리는 장면은 정신세계가 장난이 아닌 놈임을 증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살벌한 말을 한다. “내 취향은 단순해. 그저 세상이 몰락하기만 바랄 뿐.”

그렇다. 이유 없는 놈이, 단순한 놈이 가장 무섭고 끔찍한 법. 그의 행동 속엔 어떤 원인도 질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의 행동도 예측할 수 없다. 심지어 조커는 자기 입이 쫙 찢어지게 된 과거사를 늘어놓는데, 말할 때마다 그 과거사도 천차만별 달라진다. 악당이 된 그럴듯한 동기조차 가늠하기 어렵단 얘기.

②자유의지(Free Will)=철학용어. 모든 자연현상과 역사적 현상은 오로지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어떤 우연에도, 논리에도, 역사적 법칙에도 기대지 않고 주체적 인간의 의지에 따라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

악당에 맞서는 정의로운 열혈 검사 하비 덴트는 자유의지의 상징적 존재다. 양면이 똑같이 앞면인 희귀동전을 늘 지니고 다니는 이유도 이것. 아무리 동전던지기를 해도 늘 앞면만 나오는 이 동전처럼, 매사를 운(運)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겠단 얘기다. “You make your own luck(운은 스스로 만드는 거야).”(덴트)

③선과 악의 딜레마=하지만 덴트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는 사고를 겪은 뒤, 세상을 증오하면서 ‘투 페이스’란 악당으로 돌변한다. 자기 주도적 삶이 스스로를 저주했다고 믿게 된 그는 오히려 동전을 던져 모든 걸 결정하는 ‘운명의 노예’로 전락한다. ‘절대 정의’란 언제라도 뒤집어지면 ‘절대 악’으로 표변할 수 있는 ‘동전의 양면’이란 사실을 절묘하게 증언하는 대목.

“선을 추구하다 보니 스스로 악이 되어버린다”는 선악의 딜레마는 주인공인 배트맨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악의 근원인 조커를 없애기 위해 ‘힘에는 힘’이란 원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법의 테두리 밖에서 ‘응징’할 수밖에 없어 결국 또 다른 ‘범법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

배트맨은 악당인 조커를 증오하다가 어느새 자기 스스로도 조커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음은 이런 배트맨의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대사. “영웅으로 죽거나, 아니면 악당이 되어 끝까지 살아남거나.”

악당과 맞서는 정의의 사도가 언제라도 또 다른 악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철학자 니체가 ‘선악을 넘어서’에서 주장한 내용. 그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갈파했다.

결국 선과 악은 서로의 존재를 비추고 빛내는 거울 같은 존재란 사실이다. 조커는 배트맨을 향해 이런 멋진 대사를 날린다. “You complete me(넌 날 완성시켜).”

세상은 선과 악이 벌이는 싸움과 균형을 통해 유지된다는 얘기.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배트맨이 있기에 악당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공고해진다는 조커의 이 말은, 사실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톰 크루즈가 러네이 젤위거에게 날렸던 프러포즈에서 사용된 명대사를 고스란히 차용한 것이다. 역시 조커다운 발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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