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 입력 2008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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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32人 선정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에서 정치 외교 군사 법률 경제 학술 등 각 분야에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했다. 선정된 인물은 이승만 김성수 이범석 김용완 김창숙 정인보 한경직 김법린 등이며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를 비롯한 관련 분야의 학자들이 이들의 활동과 경력을 평했다. 이 책의 편집위원인 민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는 “편집위원들이 지난해부터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선정작업을 벌였다”며 “해방 공간의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건국사업에 참여한 인물을 분야별로 엄선했다”고 설명했다.》



[정치]

○이승만(1875∼1965)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란 글에서 “이승만은 역사에 보기 드문 위재(偉才)였다”며 “국민을 설득하고, 미국 조야의 지지를 얻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의 설득으로 미국은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유엔을 통해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쪽으로 정책을 변경했다. 유 교수는 “이승만은 일편단심 ‘한국의 독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전력투구했다”면서 “그의 대한민국 건국은 필생의 대업(大業)이었다”고 말했다.

○김성수(1891∼1955)

백완기 고려대 명예교수는 ‘김성수,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로 건국을 추구하다’에서 “본래 인촌은 정치에 뜻이 없었으며 싸우고 대결하는 것보다 생산하고 창조하고 건설하는 것이 체질에 맞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민당 수석총무이던 고하 송진우가 암살되자 김성수는 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의해 수석총무에 선출되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됐다. 백 교수는 “김성수의 꿈은 남북을 아울러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면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뒤 남한에서만이라도 이런 정치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믿고 대한민국 탄생에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조병옥(1894∼1960)

진덕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해방 정국에서 조병옥은 미군정청 경무국장을 맡아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서 치안을 확보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소개했다. 진 교수는 ‘조병옥, 민족우파의 실천적 자유민주주의자’라는 글에서 “조병옥이 경찰력을 강화해 치안을 유지한 것이 선거를 무사히 치를 수 있는 바탕이 됐고 좌파에 대한 그의 대결은 우파 정권이 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며 “그에게는 대한민국이 가장 중요했으며 대한민국도 오직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할 때라야 의미를 갖게 된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시영 신익희 등

이시영(1869∼1953) 초대 부통령, 임정 조직을 토대로 건국을 준비한 신익희(1894∼1956), 동아일보 초대 주간과 한민당 외무부장을 지낸 장덕수(1895∼1947), 이승만의 측근으로 이승만의 건국활동을 보좌한 윤치영(1898∼1996), 초대 주미대사를 지낸 장면(1899∼1966) 등도 정치 분야에서 건국에 공헌한 인물로 선정됐다.

[교육 학술]

○김창숙(1879∼1962)

송재소 성균관대 교수는 김창숙에 대해 평생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 유학의 개혁과 교육활동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했다. 심산 김창숙은 조선 중기 명현인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학과 한학을 익힌 유학자였지만 애초 공허한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나라를 지키기 위한 행동가로 나섰다. 송 교수는 “해방 공간에서 심산이 수행한 가장 빛나는 업적이 유교 부흥운동과 교육활동”이라고 말했다. 광복 이후 김창숙은 일제의 어용기관으로 전락한 성균관을 되살렸고 1946년 성균관대를 설립했다.

○정인보(1893∼1950)

“황하의 물이 1000km를 땅속으로 복류한 뒤 그제야 대륙을 가로질러 콸콸 흘러내린다고 하듯, 정인보가 있고서 비로소 땅속에 갇혀 있던 국학의 기운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위당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에서 민영규 전 연세대 명예교수가 한 말이다. 심경호 고려대 교수는 ‘고뇌 속에 행동한 민족주의 지성’이라는 글에서 이 말을 인용해 한국 지성사에서 위당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위당은 1946년 한국 고대사를 통사 형식으로 쓴 ‘조선사연구’를 펴냈으며 1948년 건국 당시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냈다. 심 교수는 “독립국가로 새 출발하는 데 기강 확립과 관기숙정(官紀肅正)이라는 중요한 책무를 맡으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도(1896∼1989)

민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병도를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고 좌우 대립이 심한 해방 공간에서 순수 학구적 자세를 지키며 오로지 교육과 학문에 전념해 새로운 한국사의 기틀을 세우고 새 나라의 학술연구 풍토를 조성하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광복 이후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사람이 드문 시절, 그는 한국사 연구 학술단체인 진단학회의 국사 강의를 맡았다. 1945년 경성대학 재건과 1946년 서울대로 확대 개편되는 과정에서 사학과 설치의 주역으로 나섰다.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체계화한 개설서 ‘조선사대관’ 저술을 통해 한국사를 한국 민족 중심으로 바로잡았다.

○백낙준 최현배 등

연희대 총장, 문교부 장관 등을 지낸 교육가 백낙준(1895∼1985), 조선어학회 창립과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참여한 최현배(1894∼1970), 서울대 총장과 대한의학협회 회장 등을 지낸 한국인 최초의 병리학자 윤일선(1896∼1987), 이화여대 대학원장, 문교부 장관을 지낸 교육학자 오천석(1901∼1987) 등도 함께 선정됐다.

[문화 종교 언론 여성]

○김광섭(1905∼1977)

해방 공간의 대한민국 건국운동 과정에서 새로운 문단 건설 작업에 매진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민족주의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립, 냉전체제로 인한 좌우 대립이 심화되는 해방 공간의 ‘문단 헤게모니’ 투쟁은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라는 새로운 문단 조직의 발족으로 마무리되는데, 김광섭이 새로운 문단의 핵심 인물이라는 것이다. 광복 뒤 좌익세력은 ‘조선문학가동맹’ 등을 출범시켰으며 김광섭은 이를 견제하는 ‘전조선문필가협회’를 주도했다. 홍정선 인하대 교수는 김광섭에 대해 “1945∼1960년 한국 문단을 만들고 이끌어간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경직(1902∼2000)

홍경만 전 신구대 교수는 한경직을 한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홍 교수는 “한경직은 건국 과정에서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분단으로 혼란한 정국에서 새로 건국될 나라는 반드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 국가가 돼야 한다고 설교로 역설했다”고 말했다. 한경직은 목회를 시작하면서 전도, 교육, 사회봉사 등 3대 목표를 세웠다. 1946년 베다니전도교회의 이름을 영락교회로 바꾼 뒤 각급 학교 설립, 보육원과 모자원 운영 등 사회활동에 나섰다.

○김법린(1899∼1964)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김법린을 “광복 뒤 한국 불교의 새로운 발전에 앞장섰던 대표적 고승”이라고 평가했다. 1915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은 뒤 불교중앙학림 재학 시절인 20대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김법린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선한 장학단체의 도움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전통 불교에 기반을 둔 승려이자 해외 유학에서 서구 철학을 공부했으며 광복 이후 불교 조계종의 종권을 인수했다. 1962년 동국대 총장에 취임한 뒤 “학문 없는 학원은 시체와 같다”며 학교 발전에 애썼다.

○고희동 현제명 등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1886∼1965), 경성음악학교의 설립자인 현제명(1902∼1960), 조선일보사 사장을 지낸 안재홍(1891∼1965), 신문편집인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관구(1898∼1991), 한국신학대학장, 제3대 부통령을 지낸 종교인 함태영(1873∼1964)이 선정됐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1899∼1970), 중앙대 총장을 지낸 임영신(1899∼1977)이 꼽혔다.

[군사 법률 경제]

○이범석(1900∼1972)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이범석, 대한민국 국군의 초석을 마련하다’에서 이범석을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서 국군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했다. 이범석은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 광복군으로 항일무장투쟁의 최선봉에 섰다. 1920년에는 청산리대첩에서 활약했으며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을 창단했다. 1948년 건국 과정에서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정이 행사하던 군사권이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됐고 이범석은 광복군의 독립투쟁을 계승한다는 정신 아래 국군의 기초를 마련했다. 국군조직법, 국방부 직제령을 제정해 국방부 장관, 참모총장, 육군본부, 해군본부로 이어지는 체계를 갖췄다.

○김병로(1887∼1964)

최종고 서울대 교수는 ‘김병로, 대한민국 사법부의 아버지’에서 김병로를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의 기초를 놓고 법조정신을 강하게 뿌리박은 주역, ‘한국 사법부의 아버지’”라고 평했다. 일제강점기 경성법학전수학교 교수,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 변호사를 지냈다. 광복 뒤인 1947년 미군정청 사법부장에 임명된 뒤 법원조직법을 제정했으며 대한민국 헌법 초안 기초에도 참여했다. 1948년 대법원장 취임 직후부터 법전 편찬에 매진했다. 1957년 퇴임사에서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죽는 것은 영광이다.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명예롭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김용완(1904∼1996)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김용완을 “경성방직의 경영자로서 혼란한 공장의 재건이라는 과업을 수행했으며 재계의 지도자로서 부실기업 개선 등 국가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김용완은 1946년 경성방직 사장을 맡아 최고경영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좌익계의 노동쟁의를 평정하면서 공장을 정상 가동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회사를 발전시켰다. 1947년 대한방직협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재계의 지도자 역할을 해냈다.

○이응준 유진오 등

군사와 경제 부문에서는 육군대학장과 육군참모차장을 지낸 이응준(1890∼1985), 건국을 위한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1906∼1987), 제헌의원,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정치가 조봉암(1898∼1959), 재무장관, 국무총리 등을 지낸 정치가 백두진(1908∼1993)이 선정됐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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