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5년 긴급조치 9호 선포

  • 입력 2008년 5월 13일 02시 59분


코멘트
1975년 5월 13일부터 1979년 12월 7일까지. 그 5년 7개월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는 길고 어두운 터널에 갇혀 있었다.

긴급조치 9호. 긴급조치는 제4공화국의 유신헌법에 규정되어 있던 헌법적 효력을 지닌 특별조치였다.

1975년 5월 13일 오후 3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반정부 활동을 언론이 보도하거나 전파하는 일도 금지됐다. 긴급조치 9호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게 했다. 이 조치를 비방하는 사람 역시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게 했다.

긴급조치 9호는 이전의 긴급조치와 좀 달랐다. 이전의 긴급조치는 반유신 활동을 한 사람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나 긴급조치 9호는 일반 재판에 회부하도록 했다. 사형과 무기징역 등의 형량을 1년 이상의 형량으로 현실화했다.

하지만 이것은 처벌의 완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감시하고 억압하기 위한 조치였으니, 정치적 억압이 일상화된 것이다.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그 위세에 눌려 학생운동 등 민주화를 향한 움직임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대학의 학생회는 해체되었고 학도호국단이 조직됐다. 대학 캠퍼스엔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해 경찰이 들어왔다.

그 시절 젊은이들은 시인 김지하 씨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숨죽여 노래했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1978년에 들어서면서 억압과 침묵을 딛고 민주화 시위가 되살아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시해됐고 그해 12월 6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다음 날인 12월 7일 오후 12시, 긴급조치 9호는 해제됐다.

민주주의가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1979년 12월 12일 터져 나온 신군부의 군사 쿠데타…. 불과 약 30년 전의 일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현대사는 참으로 지난(至難)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