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제8장 조선 전쟁과 베트남 전쟁(下)

  • 입력 2008년 3월 3일 19시 44분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해당한 현장에 서 있는 롱 씨의 모습. 그 뒤에 위령비가 서 있다 = 베트남 빈딘성 타이빈 마을에서 사쿠라이가 촬영.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해당한 현장에 서 있는 롱 씨의 모습. 그 뒤에 위령비가 서 있다 = 베트남 빈딘성 타이빈 마을에서 사쿠라이가 촬영.
한국 군도 기업도 베트남에 참전

최근, 한국에 베트남 요리점이 갑자기 많아졌다. 쌀로 만든 면에 콩나물을 듬뿍 넣은 포가 인기가 있다. 한국 정부에 의하면, 2006년 현재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은 중국인 다음으로 많은 1만 100쌍 정도라고 한다. 전년에 비해 70% 이상이나 늘어났다. 심각한 농어촌의 신부 부족 때문으로 보인다.

베트남의 호치민시 공항은 한국인 관광객으로 넘치고 있었다. 2007년 베트남을 방문한 한국인은 43만 명 이상으로, 중국 다음 가는 수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유교의 영향을 받아, 연장자를 존경하며 가족 간의 유대가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과 베트남을 묶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이다.

한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을 했다. 1964년부터 73년까지 베트남 중부를 중심으로 약 32만 명을 파병하였다. 의료 부대를 시작으로 맹호, 백마, 청룡이라는 용맹한 정예 부대를 계속해서 투입하였다. 그 규모는 주역인 미국 다음이다. 병사 외에도, 군 관계 일로 베트남으로 일하러 가 고향에 훌륭한 집을 마련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전쟁 기념관은 제복 차림의 군인들로 떠들썩했다. 그 곳에서는 베트남 파병에 대해 “공산 침략자와 싸우는 자유 베트남을 지원한 것은, 집단 안보를 위한 국토방위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동굴에 잠복하고 있는 ‘베트콩’(남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을 어떻게 소탕했는지, 알기 쉽게 그림을 넣어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있었다.

“베트콩은 미국 병사와는 싸웠지만, 한국 병사를 보면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고교생을 인솔하는 한 교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분은 미국에 은혜를 갚는 것이고 / 실리는 경제적 목적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자국의 안전 보장과는 무관한 전쟁에 어째서 32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파병했을까.

베트남전 참전이 한국 경제에 가져온 영향을 연구하고 있는 시즈오카 대학의 박근호(朴根好) 교수(45)는 미국의 외교 문서를 자세히 조사한 결과, “한국의 파병은 대의명분과 실리가 결합된 것이다”고 결론지었다. ‘대의명분’이란,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한국 측과 함께 싸워 준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이다.

그럼, ‘실리’란 무엇인가.

당시,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험프리 부통령에게, 한국의 파병은‘일석삼조 그리고 플러스알파’의 효과를 가져 온다고 보고했다. 삼조란, 한국의 경제발전과 한미 관계의 강화, 그리고 한국군의 전투 능력 향상이다.

1961년 5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후의 대통령)은 11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에게 베트남전의 파병 의향을 비쳤다. 미국의 환심을 사서 군사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병은 존슨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였다. 1964년 9월에 먼저, 의료 부대와 태권도 교관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은 일본이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경제 특수로 전후 부흥에 성공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도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미국으로부터의 특수에 의해 경제발전을 이루려고 했었다”라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었고, 외화 부족도 심각했다. 심해져가는 곤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베트남전 참전에 의한 미국으로부터의 특수 및 원조와, 1965년에 실현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따른 경제협력 자금을 도입하고자 했다.

박 교수에 의하면, 한국은 1965년부터 72년까지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특수에 의해서 풍부한 자금을 확보하였다. 총액은 10억 2200만 달러에 달한다. 그 중 72%가 노동자와 군인들의 송금, 그리고 도로 건설, 준설 공사, 수송 등으로, 무역 외의 일이었다. “한국은 팔 수 있는 물건이 없었으므로 노동력을 제공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박 교수는 말한다. 현대, 한진, 대우, 삼성……. 훗날 대재벌이 된 기업들은 베트남 특수로 발전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베트남행 버스를 놓치지 말라”는 유행어가 생겨서, 병사도 노동자도 기업도 전쟁터로 향했다.

베트남 전쟁은,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막을 내렸다. 박 대통령은 그 후 4년 뒤에 암살되었지만, 이후에도 전두환, 노태우와 같은 군인 출신들의 대통령이 등장했다. 게다가 이 두 대통령 모두가 베트남전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했었다. 전쟁의 불이익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 시절에는 감옥행을 각오해야만 했다.

한국에 의한 학살 / 민주화 진전 속에서 밝혀졌다

1999년, 한국의 ‘베트남 전쟁’관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주요 주간지인 ‘한겨레 21’에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노인과 아이, 여성들을 숱하게 죽였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를 쓴 사람은 베트남에 유학중이었던 역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 구수정(具秀姃)(41)이었다. 한국은 1992년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하였고, 구 씨는 그 다음 에 유학을 갔다. 1997년 말에는 오랜 세월 군사 정권에 의해서 탄압을 받았던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었다.

호치민시에서 지금도 사건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 구 씨를 만났다. 계기는 한국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한 베트남 당국의 내부 문서를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임산부와 아이를 죽였다는 내용에 놀랐다. 살아남은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문서의 내용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구 씨는 자신이 듣고 조사한 내용을 근거로, 학살 피해가 적어도 9천명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일찍이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빈딘성의 타이빈 마을에는 집오리나 닭들이 샛길을 걸어 다니고, 논에서는 물소가 놀고 있었다.

“이 상처를 보세요”라며, 구엔 톤 롱 씨(56)는 갑자기 바지를 벗어 다리의 상처를 보여 주었다. 수류탄 파편이 몸속에 남아있다고 했다. 아픔을 견딜 수 없을 때는 술을 마신다며, 이 날도 얼굴에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사건은 1966년 2월에 일어났다. 아침 9 시가 지났을 무렵, 마을에 들어 온 한국 병사들이 마을 사람 68명을 한 군데에 모아 놓고 엎드리라고 했다. 일제히 총격을 가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열두 살이었던 여동생 폰 씨는 머리를 맞았고 어머니는 한순간에 양 다리를 잃었다. 거기까지 말을 하고 롱 씨는 눈이 새빨개져서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에 살려 달라고 외쳤다. 나도 다리에 파편을 맞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죄송했다.” 마을에서 살아남은 이는 롱 씨를 포함해서 3명뿐이었다.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위령비 옆에 벽화가 걸려 있었다. 호랑이 마크를 붙인 맹호 부대 병사가, 수류탄을 손에 들고 마을 사람을 몰아 부치고 있었다. 집이 불타고 울부짖는 주민들의 벽화를 가리키며, 롱 씨는 “박정희 군은 정말로 무서웠다”고 했다.

베트남에서는 학살 사건이 있었던 성(省)박물관에서 실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생후 몇 개월 밖에 안 된 아이와 노인이 살해당했어요. 갓난아기와 노인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항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심했어요.” 후이엔성 조사 책임자, 구엔 티 킴호아 부관장(47)이 학살 장소와 희생자 수를 정리한 보고서를 읽어 주었다. 성 내 33곳에서 679명의 희생자를 확인했다고 한다.

왜, 무장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죽였을까. 성공회대 한홍구(韓洪九) 교수는 조선 전쟁(한국 전쟁)과의 관련을 지적한다. “병사들은 한국 전쟁을 체험해서 공산주의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여겼지요. 죽여야만 한다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빨갱이 사냥’이라는 심리적 준비가 된 상태였습니다.”

한국에서는 구 씨의 기사를 본 많은 시민들이 움직였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도 많았다. ‘한겨레 21’에서 고발 캠페인을 진행한 고경태(高暻兌) 기자(40)는 “우리는 일본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였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병사들이 고엽제로 피해를 받는 등, 어디까지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살 사실이 밝혀졌고,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했다.

독자들의 모금으로 베트남에 평화위령 공원을 지었다. 한국의 시민 단체가 위령비를 세우고, 피해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도 하고 집을 수리해 주었다. 한국인 의사가 자원봉사로 마을 사람들을 진찰하고, 젊은이가 현지에서 캠프를 하며 역사를 배우고 있다. 시민들에 의한 사죄와 화해 행동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한국 정부도 학교와 병원 건설에 원조를 하고 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하노이를 방문하여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한 때, 불행한 시기가 있었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 말에 대해, 베트남의 판 반 카이 수상은 “과거의 일은 매듭을 짓고, 미래를 응시하자”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공산당 독재 하에서, 도이모이(Doi Moi 쇄신)라고 불리는 개혁 개방 정책으로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베트남으로서는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다. 수상의 발언은 그러한 배려가 보이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한국군은 학살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진상 조사를 하지 않았다. ‘포괄적인 과거 청산’을 내세운 노무현 정부는 군사 정권에 의한 인권 침해 조사 등을 진행시켜 왔지만, 아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손대지 못 하고 있다.

한편, 파병 부대 병사들은 미군이 고엽제를 뿌린 지역에서 싸워, 10만 명 이상이 후유증으로 보이는 병을 앓고 있다. 가혹한 경험 때문에 정신이 병들어 버린 사람도 있다.

서울 시내에 사는 김태근(金泰根) 씨(62)는 1965년부터 2년 간, 맹호 부대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머리가 아파서 의식을 잃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고엽제의 영향으로 왼발이 가늘어지고, 마비가 되어 걸을 수도 없다. “나라를 위한 전쟁 수행이었는데, 이런 몸이 되어 버렸다. 치료법이 없는 것이 괴롭다”고 말한다. 곁에서 한결같이 보살펴 준 아내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라로부터 얼마 안 되는 상해 수당을 받으며 혼자 생활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지금까지도, 한국 사람들에게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桜井泉)

◇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냉전시대에 일본은 소련, 한국,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완수한다. 다음에는 이 테마를.

▼ 여러 나라가 파병 ▼

베트남 전쟁은 냉전 하에서 많은 나라들이 얽힌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사회주의를 내건 북베트남에는 중국이 방공(防空) 작전 부대와 도로 건설 부대 등을 보냈고, 구 소련도 군사 고문 등을 파견했다, 북한도 공군 조종사를 파견하였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대를 막기 위해, 1954년 군사 동맹인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를 결성했다. 남베트남에는 미국과 한국을 위시해, 대만, 스페인, SEATO 가맹국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 등도 파병을 했다.

일본은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요청도 있어 남베트남에 경제 원조를 실시했다. 1972년까지 미국의 점령 하에 놓였던 오키나와 기지에서는 미군이 베트남으로 출격했다. 미일 안보 체제 아래에서 일본의 요코스카(横須賀)와 사세보(佐世保), 그리고 본토의 미군 기지도 보급과 수리 등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베트남에서 부상을 당한 미국 병사는 일본에서 치료를 받았다.

1960년대 후반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반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본에서도 작가인 오다 미노 마코토(小田実) 씨 등이 1965년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 연합(ベトナムに平和を!市民連合(べ平連)베헤렌)’이란 단체를 결성해 반전 운동을 이끌어 갔다.

베트남 전쟁

제 2차 대전 후, 예전의 종주국 프랑스는 다시 한 번 베트남의 식민지화를 기도하며 군을 파견했지만, 1954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하여 철수했다. 제네바 협정에 의해서 북위 17도가 잠정 군사 경계선으로 정해졌다. 북부는 호치민 주석이 지도하는 사회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되었고, 남쪽에서는 자본주의를 따르는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지배하게 되어 대립하였다. 남부에서는 1960년 남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이 결성되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여 미군과 남베트남군과 싸웠다. 미국은 미소 냉전 하에서 북베트남의 세력이 커지면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확대된다는 ‘도미노 이론’을 근거로, 1962년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 원조 사령부를 현지에 설치하고 공공연하게 개입을 시작하였다. 1964년 미군 함정이 공해 상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였다. 존슨 대통령은 1965년, 북베트남을 직접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해병대도 상륙시켰다. 그러나 부패와 독재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은 남베트남 정권은 해방 전선의 공격을 억제하지도 못했다. 전비가 확대되고 인명 피해를 내면서, 세계적인 반전 운동에 부딪힌 미국은 철수를 결의했다. 1973년 1월, 남북베트남과 미국, 남베트남 임시 혁명 정부가 모여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북베트남과 해방 전선은 공세를 강화하였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현 호치민시)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 정권은 붕괴되고 전쟁이 끝났다. 다음 해에는 남북통일 선거를 실시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미국은 전사자 5만8천 명, 전상자가 30만 명에 달했다. 베트남 측의 전사자는 백 수십만이라고도 200만 명 이상이라고도 한다.

박정희(1917-79)

한국군인 출신 대통령.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우고 관동군에 배속되었다. 한국 정부 수립 후에는 한국 육군 소장이 되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주도하여 국가 권력을 잡았다.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1963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했다. 재임 중에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만, 재벌과 유착하였고 부패를 낳았다. 3선을 금지한다는 헌법을 개정하는 등,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정치적 적들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다. 1979년 10월 26일, 연회 자리에서 측근인 김재규 중앙 정보부(KCIA) 부장에 의해서 시해되었다.

▷▷조선 전쟁(한국 전쟁)과 영화

▷▷신중국의 의의, 아직까지도 확정되지 않은 채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