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인도 사랑하고 싶소…‘사극을 바꾼 2007 꽃미남 왕들’

  • 입력 2007년 10월 1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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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정말로 사랑한 정인(情人)이 누구입니까?”

한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격한 감정을 쏟아낸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에게서나 나올 법한 대사지만 엄연히 사극의 한 장면이다. 그것도 왕이 곧 하늘이었던 조선시대 임금의 하소연이다. 15일 방영된 SBS 월화드라마 ‘왕과 나’에서 성종(고주원)은 합궁을 거부한 소화(구혜선)에게 질투심을 드러내며 ‘임금보다 더 연모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이 장면은 최근 사극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다.

○ 청순 담덕, 바람 성종, 박력 이산

방송계는 ‘왕과 나’를 포함해 월화드라마 ‘이산’, 수목드라마 ‘태왕사신기’(이상 MBC), 주말드라마 KBS ‘대조영’ 등 금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사극이 방영되는 요즘 상황을 ‘사풍(史風) 2007’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2006년 사극의 테마가 ‘고구려’였다면 2007년 사극의 코드는 ‘꽃미남 왕’.

광개토대왕 담덕(배용준), 정조 이산(이서진), 성종(고주원) 등 사극 속 왕들은 긴 수염에 배가 나온 전형적인 ‘아저씨’형 임금들과 달리 상큼한 미소, 근육질 몸매, 화려한 무술 실력을 가진 ‘훈남’들이다. 시청자들도 극중 왕들을 ‘청순 담덕’ ‘바람 성종’ ‘박력 이산’ 등의 애칭으로 표현할 정도.

이들은 ‘얼짱’ 임금답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과거 사극 속 왕들과 다르다. 과거 왕들이 자객의 습격을 받으면 화들짝 놀라 “게 밖에 누구 없느냐”를 남발했다면 이산은 화려한 무술 솜씨로 자객을 한칼에 제압한 후 “너를 죽이진 않겠다. 다만 너를 보낸 게 누구냐”고 멋지게 읖조린다.(5회 방영분) 담덕도 마찬가지. 여성 호의무사(각단)가 길을 막자 “미안한데 나의 인질이 돼 주면 안 되겠니”라며 부드러운 미소를 날린다. 각단은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5회)

이렇듯 거세됐던 사극 속 왕들의 섹슈얼리티가 살아나다 보니 사극 이야기도 궁궐의 암투 못지않게 삼각관계를 주요 줄기로 삼는다. ‘왕과 나’의 성종-김처선(오만석)-소화, ‘태왕사신기’의 담덕-기하(문소리)-수지니(이지아), ‘이산’의 이산-송연(한지민)-박대수(이종수)의 관계가 그렇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비교적 전형적인 기존 사극 형태인 ‘대조영’조차 대조영과 초린의 사랑이 빠지면 서사 구성이 안 된다”고 말했다.

○ 실제 왕들은 큰 턱의 북방계 스타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각 방송사 사극 PD들은 얼굴이 크고 전체적으로 인상이 근엄하면서 선이 굵고 강렬한 눈빛의 배우를 선호했다. 대중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왕의 이미지와 배우를 맞추기 위한 것. 실제 1980∼2006년 방영된 주요 사극에서 왕을 맡은 배우들은 이런 이미지와 일치한다.(그래픽 참조)

얼굴 전문가 조용진 한남대 교수는 “실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왕들은 주로 북방계 스타일로 얼굴과 코가 길고, 턱이 크면서 눈이 작고 날카로웠다”며 “김무생, 임동진, 박근형, 유동근 등 과거 주로 왕을 맡았던 배우들의 얼굴은 고증을 통한 실제 왕의 얼굴에 가까운 반면 배용준, 고주원 등은 눈매가 크고 서글서글하며 턱이 작은 21세기형 미남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왕에 안 어울리는 이미지”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극 속 왕의 얼굴이 달라진 이유로 △40대 남성에서 여성 쪽까지 사극 주 시청층의 확대 △1980, 90년대 권력형 군주→2000년대 초 영웅형 군주→2000년대 중반 화려한 스타형 군주 등 시대가 요구하는 왕의 이미지가 달라진 점을 꼽는다. 문화평론가 이영미 씨는 “1990∼2000년대 초까지는 사극을 현실 정치에 비교하다 보니 이에 맞는 배역을 찾았으며 요즘은 역사적 흐름보다는 개인의 삶, 감정이 중시되다 보니 이야기를 화려하게 풀어 갈 수 있는 멋진 왕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왕들의 꽃미남화’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KBS 고영탁 드라마1팀장은 “과거 PD들은 사극을 제작할 때 역사를 드라마로 재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사실성, 진정성을 강조했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시청률 위주로 가다 보니 캐스팅도 시청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기 스타 위주로 가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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