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민족은 主義를 초월하는가

  • 입력 2007년 10월 3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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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19일 백범 김구 선생은 38선을 넘어 결연히 평양으로 향한다. 이른바 ‘남북조선 제(諸)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일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백범이 눈앞에 닥친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온몸을 던진 것이다. 통일을 향한 백범의 충정은 그만큼 뜨거웠다.

그러나 1948년의 남북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 미리 북한에 가 있던 좌익세력을 빼고는 남한의 주요 인물들이 불참한 연석회의는 철저히 소련 군정(軍政)의 레베데프 민정청장이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낌새를 챈 백범은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간단한 인사말을 했을 뿐이다. 22일에야 평양에 도착한 우사 김규식은 병을 이유로 한 번도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표자 연석회의와 그 후 있었던 ‘4김 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모두 북한에 수립될 사회주의 정권의 정통성을 제고하기 위해 소련 당국이 백범의 이름과 진정성을 악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때 김일성 암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열혈 반공주의자이던 백범이 왜 소련의 속임수에 말려들었을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지금 민족 앞에 놓인 문제가 너무나 크다’는 상황 인식과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그의 비장함은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백범의 이상, 현실과 괴리돼 실패

그러나 백범은 현실 정치에서 패배했다. 그의 실패는 장렬한 것이기는 했지만 국가공동체를 이끄는 뛰어난 정치가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인 ‘현실에 근거한 이상’의 중요성을 성찰하게 한다. 현실로부터 괴리된 이상과 명분은 공허하며 최악의 경우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는 세계적 냉전 구도의 최전선이었다.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북한 단독 정권 수립을 지시하고 미국 또한 남한에 대한 후견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남북 상호의 수정과 양보로써 건설되는 통일체’의 꿈은 거의 무망한 것이었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은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반세기가 넘는 시대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백범이 걸어간 길과 2007 남북 정상회담에 오르는 노 대통령의 걸음이 겹쳐져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소련은 소멸했으며 유일 초강대국 미국은 대북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공언하고 있다. 북한은 비록 실패한 국가로 낙인찍혔지만 핵보유국으로 등장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역량이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능동적 주체임을 자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2000년의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을 가능케 한 햇볕정책 자체가 그런 자신감의 표현이다. 남북관계를 화해에서 공존공영으로 격상하고자 하는 이번 정상회담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정상회담이 정례화하고 경협이 확대되며 평화에 다가가는 구체적 조치가 도출된다면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기본 전제가 있다. 장밋빛 미래에 성급히 도취되기 전에 남북의 과거와 지금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 필수라는 것이다.

냉엄한 남북관계의 현실은 ‘우리 민족끼리’의 구호에 어떤 실체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불가피하게 한다. 60년 가까이 완전히 이질적인 체제에서 살아온 남의 시민들과 북의 인민들은 더는 비슷한 가치와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과거 역사의 기억을 나눠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현실에 존재하는 이런 심연을 메우기 어렵다.

“교류 늘면 통일?” 냉정히 따져봐야

남북 간의 교역과 교류가 많아질수록 상호 이해도가 높아져 자연스럽게 통일에 이르게 된다는 주장은 현실 역사에서 검증된 바 없는 전형적인 이상론이다.

화해와 교류는 좋은 것이며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잦은 만남도 자유민주주의와 주체사회주의를 통합시킬 수는 없다. 햇볕정책의 통일론은 이런 치명적 난점을 숨기고 있다. 남과 북이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냉정한 인식만이 진정한 공존을 가능케 한다. 민족이 주의를 초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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