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7년 가짜 이강석 구속

  • 입력 2007년 9월 1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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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강석인데…”

이 한마디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사나이가 있었다. 이강석.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이었던 그는 자유당이 한창 세력을 날리던 1950년대에 대통령 아들 이상의 권력을 누렸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이승만, 프란체스카 부부는 부통령 이기붕 부부가 ‘선물’로 안긴 이강석을 끔찍이 아꼈다.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받아 주던 시절, 이강석에 대한 권력층의 아부는 또 오죽했으랴. 서울대가 이강석을 “애국지사(이승만)의 양자”라는 이유로 법대에 편입시키자 학생들이 동맹 휴업으로 맞선 일은 당시 비뚤어진 충성 경쟁이 낳은 진풍경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사건도 ‘가짜 이강석’ 사건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1957년 8월 30일 경주경찰서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나 이강석인데…” 전화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밀명을 받고 수해 시찰을 나왔다”는 이강석. 첫 대면의 ‘영광’을 얻었던 경주경찰서장은 “귀하신 몸이 어찌 홀로 오셨나이까”라고 황송해하며 경주 최고급 호텔로 모셨고, 다음 날에는 공무를 제쳐 두고 경주 일대 유적지를 일일이 안내했다. 이어 기념 촬영까지 챙긴 그는 가짜 이강석이 다음 목적지까지 편히 갈 수 있도록 자신의 차까지 내주었다.

다음 목적지인 경북 영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영천경찰서장의 접대를 받은 가짜 이강석은 경무과장의 경호 속에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에서는 한술 더 떠 수재의연금 명목으로 지방 유지들에게서 향응은 물론 거금 46만 환까지 챙겼다.

그의 사기 행각은 대구에서 덜미가 잡혔다. 경북 도지사 관사에서 묵게 된 가짜 이강석의 언행에 의심을 품은 도지사가 이강석과 동기동창인 아들을 불러 얼굴을 확인하도록 한 것이다. 가짜 이강석은 즉시 체포되었고 9월 18일 구속됐다.

드러난 가짜의 정체는 초라했다. 대구 출신의 강성병으로 밝혀진 범인은 대학 입시에 떨어져 서울 등지를 떠돌던 중이었다. 강 씨는 “용돈이 궁해 꾸민 연극인데 그렇게 굽실거리고 쩔쩔맬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이강석’이라는 한마디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커녕 앞 다투어 달려가 머리를 조아렸던 당시 공무원들과 유지들의 행태는 전 국민의 경멸과 조소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신정아 씨 등을 비롯한 수많은 가짜 학위 사건으로 떠들썩한 오늘날, 이 블랙코미디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강석이 자살한 3년 뒤인 1963년, 가짜 ‘이강석’도 진짜처럼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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