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수난시대]권력을 거슬러야 사는 ‘외로운 심판’

  • 입력 2007년 6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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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출석한 선관위 직원들 22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출석한 조영식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왼쪽)이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결정에 맞선 노무현 대통령의 헌법소원 제기 부당성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김동주  기자
국회 출석한 선관위 직원들 22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출석한 조영식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왼쪽)이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결정에 맞선 노무현 대통령의 헌법소원 제기 부당성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김동주 기자
18일 고현철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경기 과천시 중앙선관위 회의실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잇단 대선 관련 발언의 선거법 위반 여부를 가리는 전체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18일 고현철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경기 과천시 중앙선관위 회의실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잇단 대선 관련 발언의 선거법 위반 여부를 가리는 전체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수난시대’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 및 한나라당 대선주자를 폄훼하는 발언을 한 데 대해 선관위가 공무원 선거 중립 의무 위반 결정을 내리자 “후진적 제도를 갖고 후진적 해석을 하고 있다”고 선관위를 비판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입을 봉하라는 것”이라고 했고, 노 대통령의 386 측근인 안희정 씨는 “독재권력 시대에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임명제 기관(선관위)이 국민 앞에서 박수받기 위해 너무 오버하면 안 된다”는 말도 했다. 급기야 현직 대통령이 헌법기관인 선관위의 결정에 불복해 헌법소원까지 내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노 대통령에게 4번이나 ‘옐로카드’를 내민 선관위는 과연 ‘후진적인 기관’이고 ‘권력의 하수인’인가.

○ 3·15부정선거의 교훈

선거관리기구를 우리나라처럼 별도의 헌법기관으로 두고 있는 나라는 드물다. 우리나라도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내무부 산하 ‘선거위원회’가 선거관리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다 1960년 3·15부정선거 등을 거치며 5차 개헌 때 선거관리기구를 헌법기관으로 격상시켰다. 당당한 헌법기관으로서 권력의 압력을 받지 않고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성춘 선관위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장은 한 글에서 1963년 1월부터 5년간 초대 위원장을 지낸 고 사광욱 대법원 판사와 관련해 의미 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부는 선거운동 20여 일 전 ‘별정직 공무원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도 특정 후보를 위해 유세를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이에 사 위원장이 대다수 법조 출신 선거위원을 설득해 ‘불가’라는 해석을 내리자 1주일 뒤 정부는 ‘당 총재로서 대통령은 유세를 할 수 있지 않은가’라며 다시 유권해석을 요청하고 선관위원들에게 설득과 회유를 했다. 그 결과 사 위원장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5 대 4로 ‘가하다’는 번복 해석이 나왔다는 것이다.

정부 여당이 관권 개입으로 압승을 거둔 뒤 국정감사 때 여야 의원들의 7대 총선 평가질문에 사 위원장은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관리 책임자로서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답변하며 흐느꼈다고 한다.

○ 1989년 첫 불법 선거 단속반 운영

그러나 선관위는 1970, 80년대 공정선거를 위해 노력했다는 별다른 궤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 전에는 총선에서 투개표 관리 기능 정도만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선관위가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민주화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는 과정을 거치면서다.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을 거치며 사전선거운동, 금품 향응 선심관광 제공, 정당 활동을 빙자한 불법 선거운동, 흑색선전과 폭력의 난무 등 불법 타락선거가 횡행했고 선관위의 적극적인 단속 필요성이 제기된 상황에서 각 정당이 1989년 4월 동해시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격돌한 것.

이회창 당시 선관위원장은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씨 등 야3당 총재에게 경고성 문서를 발송했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가 없자 선관위는 창설 이후 처음으로 단속반을 편성 투입했으며 2차에 걸쳐 후보자와 선거사무장 전원을 검찰에 고발하는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실시된 서울 영등포을 국회의원 재선거도 역시 불법 타락 선거로 막을 내렸다. 두 번의 재선거에서 후보와 선거사무장 등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으나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리자 이 위원장은 그해 10월 “공명선거 풍토 확립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국민으로부터 타락선거라는 비난을 받은 데 대해 선거관리를 총괄하는 책임자로 도덕적 책임을 진다”며 사퇴했다.

○ ‘아부의 역사’인가 ‘독립의 역사’인가

선관위가 이처럼 간간이 권력과의 긴장 관계를 유지하긴 했지만 누가 위원장이냐에 따른 개인적 차원의 문제였고 제도적으로 선거관리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며 나름대로의 위상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다.

물론 선관위는 권력기관이 아니다. 권력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고 선관위 관계자들은 말한다. 그러면서 드는 사례가 있다. 1991년 6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업체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조업 경쟁력 강화 대책’을 주재했는데, 청와대가 이를 TV로 방영하려 했다는 것. 이에 선관위는 “선거 기간에 정부가 정책을 밝히는 게 경우에 따라 선거에 영향을 준다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결국 TV 방영은 막았는데, 당시 결정에 관여했던 한 전직 선관위 관계자는 “당랑거철(螳螂拒轍·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말로, 자기 분수를 모르고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과 대적한다는 뜻)의 심정이었다”고 술회했다.

아무튼 선관위는 1994년 통합선거법 제정 및 1995년 지방선거 전면 실시 등을 계기로 나름대로의 위상을 찾아간다.

선관위 전 관계자는 “부침이 있었지만 큰 트렌드로 보면 선관위는 강자를 억제하고 약자를 보호해 공정한 경쟁을 만드는 역사를 만들어 왔다. 여당의 힘을 억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연혁▼

△1960년 3·15부정선거

△1961년 5·16군사정변

△1962년 5차 개헌 때 헌법기관으로 규정

△196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창설

△1989년 동해시 국회의원 재선거 당시 민정당 총재이던 노태우 대통령과 김 대중 김영삼 김종필 총재에게 첫 경고 서한 발송

△1994년 통합선거법 제정

△1996년 15대 총선 선거비용 실사결과 발표. 여권 중진 의원 등 20명 고발 또는 수사의뢰 (검찰 내사 종결)

△2000년 선관위 재정신청제도 첫 적용

△2003년 노무현 대통령에게 첫 공명 선거 협조 요청

△2004∼2007년 노 대통령 선거중립 의무 위반 결정(3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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