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新천재론]<2>집념의 세계 요정 발레리나 박세은

  • 입력 2007년 4월 14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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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동아무용 콩쿠르 금상 수상

“다른 아이보다 좀 느렸어요. 동작 순서를 잘 외우지 못했고. 그래서 혼도 많이 났죠. 솔직히 그때만 해도 발레를 하기엔 그렇게 예쁜 체형이나 다리라는 생각도 안했어요. 무릎은 튀어나와 있었고, 둥그렇게 솟아야 할 발등은 안 튀어나왔고….”

국립발레단 문화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L 씨는 훗날 미 USA콩쿠르, 스위스 로잔콩쿠르 등 세계 무대를 휩쓸며 ‘발레 신동’으로 불리는 발레리나 박세은(18)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이 교사의 말처럼 박세은은 중학교 1학년 초까지만 해도 사실 전혀 두드러지는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초등학교 4학년 때 문화학교에서 유급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박세은은 어린 시절 ‘영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날 ‘천재’로 빛날 수 있었다.

박세은이 발레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엄마 최혜영 씨는 맞벌이 부부들이 그렇듯 낮 시간 동안 아이를 아무 학원에라도 보내야 했던 것. 어릴 때부터 유난히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한 만큼 국립발레단이 운영하던 문화학교에 보냈다. 애초부터 발레를 전공시킬 생각이 아니었던 만큼 박세은의 부모는 딸의 발레 적성이나 실력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린 딸이 스스로 준비물까지 알아서 챙길 만큼 좋아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정도였다. ‘유급’했을 때도 그래서 느긋할 수 있었다.

예원중학교를 택한 것도 엄마였다. 엄마는 딸이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발레는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예원중을 권한 것. 딸이 얼굴이 갸름하고 몸이 가늘가늘한 점도 엄마는 눈여겨봤다. 최 씨는 “애 혼자 문화학교만 다닌 게 전부였는데 어떻게 붙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입학 점수가 거의 바닥이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당시 박세은을 뽑은 예원중 김나영 무용부장의 말은 달랐다.

“아이들 면접을 해보면 대부분 토슈즈도 신고 어느 정도 동작을 다 할 줄 안다. 세은이는 전혀 못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인 만큼 현재의 실력이 아니라 신체조건을 우선적으로 본다. 세은이는 키는 작았지만(당시 151cm), 몸의 비례가 매우 좋았고 손발이 커서 키가 더 클 가능성도 충분했다. 무릎도 튀어나와 있긴 했지만 아직 토슈즈를 신지 않아 주변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 그런 것으로 보였다. 아킬레스힘줄도 좋았고, 무엇보다 골반이 탁월했다.”

그의 눈은 정확했다. 사실 발레리나에게 타고난 신체조건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재능’이다. 스스로 “나는 천재가 아니다”라는 박세은도 “남들은 잘 안 돼서 고생하는 동작이 쉽게 되긴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타고난 골반 덕분이다. 김 부장도 “세은이의 골반은 양쪽 수평이 잘 맞고 엉덩관절(고관절)이 넓어 발레 하는 데 가장 중요한 턴아웃(Turn-out)이 남들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에도 박세은은 혼이 많이 났다. 다른 아이에 비해 동작 순서를 외우는 것이 느렸다. 김 부장은 “가만히 보니까, 배우는 게 느린 게 아니라 집요한 거였다. 한 동작이 제대로 되기 전엔 좀처럼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것에만 매달렸다”고 했다.

어린 시절 두드러지지 않았던 그의 재능은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중2부터는 키가 10cm 이상 자랐다. 166cm. 키에 비해 발도 커서(255mm) 발끝으로 섰을 때는 다리가 더 길어 보이는 것도 그의 신체적인 장점이다.

중학교 입학 후 처음 토슈즈를 신었을 때는 제대로 다리를 펴고 서지도 못하더니, 근육이 붙기 시작하면서 부쩍부쩍 실력이 늘기 시작했다. 중2 때 나간 첫 콩쿠르인 한양대 콩쿠르에서 금상을 탔고 예원중 무용과를 수석 졸업했다. 서울예고 1년 시절에는 3학년이 주로 나가는 동아무용콩쿠르에 1학년으로는 처음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김나영 교사는 “요즘 일부 학원은 콩쿠르에 내보내기 위해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 토슈즈를 신기고 무리하게 테크닉을 가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골격구조가 안정되기 전에 토슈즈를 신으면 관절에 변형이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세은도 “내가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두각을 나타냈다면 오히려 지금만큼 발레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런 집념이야말로 비범함과 평범함을 가르는 잣대다. 딸이 ‘천재’라는 말에는 고개를 젓는 박세은의 엄마도 딸의 재능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피아노를 전공한 엄마는 예술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재능이 뭔지를 알고 있었다. “아이가 좋아하면, 그게 바로 제일 중요한 재능”이라는 거다.

실제로 어린 시절 유난히 움직임을 좋아했던 박세은의 적성 진단을 서울대 교육학과 문용린 교수팀에 의뢰했다. 대교심리진단센터가 의뢰하고 문 교수가 개발한 MI적성진로진단검사 결과 신체운동, 언어, 음악 등 총 8개 부문에서 박세은은 신체운동에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또래 다른 학생들과의 상대평가를 위한 CP점수에서 박세은은 97.2%를 기록했다. 이는 신체운동에서 박세은이 상위 2.8% 안에 든다는 의미. 반면 다른 분야는 보통 정도의 적성을 보였고, 언어 적성은 오히려 하위 30%로 나타났다.

박세은이 무대에 강한 것도 결국은 자기 적성을 마음껏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주니어 콩쿠르인 로잔콩쿠르의 경우 무대가 7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평평한 국내 무대에서만 연습했던 박세은은 스위스 로잔에 가서야 기울어진 무대를 봤다.

“한번도 우승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우승을 하리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냥 언제 또 내가 이 무대에 서 볼까라는 생각으로 내가 좋아하는 춤이나 원 없이 실컷 추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라고 마음먹고 춤을 췄어요.”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朴 “최고급 토슈즈? 비싸서 못사요”

국내 연습시설 태부족 등 환경 열악

발레리나는 ‘신발 먹는 하마’다. 새 토슈즈를 꺼내 신기가 무섭게 해진다. 토슈즈의 경우 가장 좋은 것은 한 켤레에 10만 원. 촉감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발이 좀 더 편하지만 그만큼 쉽게 닳아 연습벌레 발레리나는 길어야 이틀밖에 못 신는다.

박세은은 4만 원짜리 토슈즈를 신는다. 딱딱하지만 대신 5일쯤 신는다고 했다. 어머니 최 씨는 “10만 원짜리 토슈즈는 너무 비싸 그냥 4만 원짜리를 사 준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해 잭슨콩쿠르에 출전했을 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춤출 때 쿵쿵 소리가 크게 나는데 토슈즈를 바꿔 보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해 줬단다. 올해 로잔콩쿠르를 앞두고 어머니는 큰맘 먹고 처음으로 10만 원짜리 토슈즈를 딸에게 세 켤레나 사 줬다. 하지만 박세은은 그냥 예전 토슈즈를 신고 췄다고 했다. “그걸 계속 신고 출 것도 아닌데 괜히 발을 비싼 토슈즈에 맞추기 싫어서…”라고 했다.

엄마가 딸에게 가장 미안스러워하는 것은 근육 마사지를 원하는 만큼 못해 주는 거다. 공연을 하고 나면 딸은 마사지를 받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한 번에 7만∼8만 원 하다 보니 자주 해 주기가 어렵다.

‘영재’나 ‘천재’ 발레리나가 나오기 위해서는 마음껏 춤추고 연습할 수 있는 공간도 많아야 하는데 국내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다. 비교적 시설이 좋은 편인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경우에도 100평짜리 연습실 3개를 포함해 10개에 불과하다. 정승희 무용원장은 “현재 예술종합학교는 무용원생과 예비학교 학생까지 3000명에 가까운 학생이 10개의 연습실을 나눠 쓰는 셈”이라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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