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가 초등생 논술교재?…황당한 논술 학원들

  • 입력 2006년 9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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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만 돼도 머리가 굳어 버려요. 그나마 2학년 때 왔으니 천만다행이네요.”

25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S논술학원.

논술 과외는 처음이라며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상담을 부탁하자 학원 원장은 대뜸 “지금까지 엄마 아빠가 뭘 했느냐”고 질책했다.

그는 “머리가 굳으면 창의력 계발이 안 된다”며 “일찍부터 글 쓰는 훈련을 해야 서술형 논술 대비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일기까지 첨삭 지도한다”고 말했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연세대 고려대 등 주요 대학이 2008년 입시에서 통합형 논술을 출제하고 반영 비중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뒤 ‘학원특구’로 알려진 서울 대치동, 중계동, 목동의 학원가는 새벽 어시장처럼 활기가 넘친다.

취재기자가 학부모로서 상담을 받아 보니 상당수 학원은 학부모의 불안심리를 부추겨 학생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대치동의 K논술학원은 수업 난도가 대학 강의 수준이다.

이 학원에 다니는 초등학교 4학년은 ‘인간 무의식의 세계’ ‘빈부 문제를 통한 공동체의 이해’ 등을 주제로 논술을 쓴다. 5학년 주제는 ‘인간 고통의 이해’, 6학년 주제는 ‘유전자 조작과 과학의 미래’다.

“아이 수준에 너무 버거운 주제가 아니냐”고 묻자 학원 측은 “대입 기출문제를 분석해 만든 커리큘럼”이라며 오히려 학부모의 무지를 타박했다. “인성과 정서만 배양하는 독서는 비판적 인식능력을 키우는 데 해가 되기 때문에 대입 논술용 독서교육이 따로 필요하다”는 것.

대치동의 또 다른 K논술학원. 이 학원 원장은 상담을 시작하자마자 “대치동은 미쳤다”며 “우리는 아이들이 숨쉴 수 있는 논술지도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생에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히는 게 제 정신 박힌 지도냐”며 주위 학원을 맹비난했다.

‘숨쉴 수 있는 논술지도’가 뭐냐고 묻자 “학생들은 여기 비치된 다양한 책을 읽고 선생님들은 멀리서 아이들을 지켜보는 방식”이라고 자신 있게 설명했다.

5개의 책장에 진열된 500여 권의 책을 둘러보니 적어도 10년은 돼 보이는 오래된 전집류가 대부분이었다. 세계문학전집의 책 한 권을 펼쳐 보니 문장이 ‘∼읍니다’로 끝났다. 1988년 한글맞춤법이 개정되기 이전에 나온 책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요즘 논술강사들은 ‘자기소개서’까지 첨삭 지도한다. 서울 노원구의 A논술학원 강사인 이모(27) 씨는 얼마 전 수시모집에 지원하는 김모(18) 군의 자기소개서를 써 주느라 오전 3시가 돼서야 퇴근했다. 김 군은 서울대 입시를 준비할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하지만 김 군의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직접 학원을 찾아와 대필을 부탁했다.

김 군의 부모는 “애가 초등학교 때부터 과외를 받아 버릇해 선생님이 따로 봐주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강사에게 하소연했다.

학부모들은 ‘자기소개서’ 작성조차 논술강사에게 의존하지만 일부 학원은 전문적인 논술교육이 가능하지 않은 대학 휴학생이나 취업을 못 한 졸업생들을 저임금의 논술강사로 고용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수업 난도가 낮은 유치원생 초등학생 대상 논술교사 중에 미자격 강사가 많다는 것은 논술학원가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올해 초부터 대치동의 논술학원에서 유치원생 초등학생을 지도해 온 A대 국문학과 4학년 휴학생 한모(26) 씨는 “강의 매뉴얼 같은 걸 따로 받은 적도 없고 사실 뭘 가르쳐야 할지도 잘 모른다”며 “그날그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아이와 함께 읽는 것이 전부라 아이들 부모한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인 손성은 ‘생각과 느낌’ 소아정신클리닉 원장은 “아동 특유의 유연한 상상력을 인위적인 틀 속에 가두는 일부 논술교육은 어린이에게 정서적인 ‘학대’가 될 수 있다”며 “무리한 선행학습은 지능 발달을 오히려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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