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신우철]‘연석회의’ 주장이 못미더운 이유

  • 입력 2005년 10월 2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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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개정 헌법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라는 내용이 새로 삽입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공화정부가 ‘대통령제에서의 연립정부’로 설계되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1919년의 임시헌법은 친미 노선의 이승만에게 대통령 직을, 노령의 사회주의자 이동휘에게 국무총리 직을, 각지의 명망가들과 젊은 실무가들에게 국무원 총장과 차장 직을 각각 정교하게 배분했다. “연립내각을 조직하면 반다시 지방열의 분쟁도 업서지고 사설당파의 알력도 업서지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헌법의 아버지’ 신익희의 헌법공학적 설계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승만(기호파) 이동휘(노령파) 안창호(서북파)의 3두 세력이 서로 대립하여 연립정부가 교착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독자적 조각권을 상실한 대통령은 정국 운영을 사적(私的)인 비선 조직에 의존했다. 설상가상으로 연정에 불참한 신채호 박용만 등은 정부 외곽에서 비판 공세를 퍼부었다. 몽테스키외의 ‘분권’ 학설을 논하며 안창호의 외교 월권을 제지했던 신익희였지만 망국의 현실에서는 나눌 권력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이 임시정부의 비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진 파탄의 끝자리에 임시정부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각계각층의 독립운동 인사들을 한데 불러 모아 ‘국민대표회의’를 따로 개최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는 당시 소련의 ‘인민회의 체제(노농 소비에트)’와 유사한 형태인데, 레닌이 지원한 적색자금의 바탕 위에서 실현될 수 있었던 조직이었다. 무산계급 혁명 이후 필요가 없어진 황금으로 공중 화장실 변기나 만들어 볼까 고민하던 이상주의자 레닌은 그 일부를 극동 지역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국민대표회의는 새 정부 조직을 주장하는 측(창조파)과 기존 정부 개혁을 주장하는 측(개조파)의 대립으로 내내 삐걱거렸다. 급기야 안창호 등 개조파가 철수한 상황에서 창조파들로만 새 국호, 새 헌법, 새 정부를 만들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져갔다. 그러나 후원자 레닌이 죽고 없는 상황에서 소련의 반응은 냉랭했다. 이에 임정 내무총장 김구가 내무부령 제1호로 해산을 명함으로써, ‘잡종회’ 국민대표회의 소동은 비로소 일단락을 짓게 된다. 레닌의 자금을 횡령하여 광둥(廣東) 출신 여자와 향락을 일삼던 김립이 처단된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선거제도 개편을 구실로 내건 ‘대연정’ 주장이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무산되자, 각계각층 인사를 망라하여 ‘국민대통합 연석회의’를 열자는 주장이 뒤를 잇는다. 왜 임시정부의 법통 가운데 꼭 실패한 것만 골라 계승하려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헌법상 국정 일반 사안은 국무회의가 심의하고(제89조), 경제 문제는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자문하도록 되어 있다(제93조). 선거제도는 입법 사항이므로 입법부인 국회가 정할 문제다(제41조). 연석회의 같은 변칙적 국정 참여 기구는 헌법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조화되기 어렵다.

우리가 진정 계승해야 할 임시정부의 법통은 무엇인가. 그 첫째는 사반세기를 망국노 신세로 타국을 떠돌면서도 헌법을 세우고 지켜 ‘입헌정치’의 초석을 다졌다는 것이다. 임시정부 ‘헌법의 어버이들’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면서까지 헌법의 위엄을 수호하려 했다. 그 둘째는 풍찬노숙하던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의회정치’의 전통을 확립하려 애썼다는 것이다. 당시의 의정원 속기록이야말로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피와 땀과 눈물의 자취다. 이 같은 입법-행정의 분리 체제는 충칭(重慶)의 중화민국 정부조차도 지켜 내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몇몇 교수의 발언이 국가 정체성 논란으로 비화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창문을 열면 파리 모기들도 날아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무슨 천연기념물이라고 온갖 수단으로 감싸는 쪽이나, 그것을 박멸하겠다고 장외투쟁 나간다는 쪽이나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86년을 이어온 입헌정치와 의회정치의 법통이야말로 우리가 소중히 이어 가야 할 자산이자 진정한 국가 정체성이라 믿는다. 판세가 불리해지니 응원단을 끌어들이겠다는 선수나 걸핏하면 경기장을 떠나겠다고 공언하는 선수나 두말할 것 없이 모두 실격패감 아니겠는가.

신우철 영남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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