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 윤치호가 영문일기를 쓴 까닭은?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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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가 영문일기를 쓴 까닭은?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에 끌려와) 영어를 배운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예생활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다.'(1893년 2월17일)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1890년 5월18일)

개화파 지식인으로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윤치호(尹致昊·1865~1945). 그가 영어로 쓴 일기에 남긴 미국에 대한 선망이다.

수유연구실 연구공간 너머의 윤영실 연구원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은 논문 '미국과 식민지 근대주체 형성의 한 경로: 윤치호 일기를 중심으로'에서 한 지식인의 사적(私的) 기록을 통해 미국에 대한 종속적인 시각이 내면화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논문은 학술단체협의회 주최로 21일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 피츠버그홀에서 열리는 '우리 학문 속의 미국: 미국적 학문 패러다임 이식에 관한 비판적 성찰' 심포지엄에서 발표된다.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 윤치호가 과거도 치르지 않고 1883년 초대 주한 미국 공사의 통역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네덜란드 영사관 서기관으로부터 4개월간 영어를 배운 것.

188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윤치호는 1889년부터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윤치호는 50년이 넘는 기간동안 연간 100쪽이 넘는 영어 일기를 썼다.

논문에 따르면 윤치호가 영어로 일기를 쓴 이유는 △'자유' '권리' '의회' 등 서구 시민사회의 산물을 번역할만한 마땅한 국문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문에는 언문일치나 고백체가 없어 '고백적 글쓰기'가 어려웠기 때문.

미국 유학 시절 영어 일기에는 '내 나라의 치욕과 수치스러움에 대한 의식'(1891년 2월1일) '(조선과 관계된 것은) 위로 정치, 역사부터 아래로 인민 풍속 거처 의복 도로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다'(1890년 11월27일 외) 등 서구인들 앞에 주눅 든 윤치호의 모습이 자주 드러난다.

필자는 "윤치호의 부끄러움은 제국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를 봄으로써 생겨나는 피식민주체의 일반적 정서이며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제국의 기준에 종속됨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미국에 대한 선망과 조선에 대한 열등감은 일본에서 타협을 본다. 필자에 따르면 '문명의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서구 문명국에서와 같은 인종 차별이 없다는 점에서 일본은 윤치호에게 세계에서 가장 유쾌한 나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는 것.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1893년 11월1일)

일제 말 변절해 귀족원 의원을 지낸 윤치호는 해방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자결한다.

필자는 "제국의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제국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제국과의 동일시를 통해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는 식민화된 무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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