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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노동자 집결지 오사카…1920년대 노동-항일운동 거점으로

한인 노동자 집결지 오사카…1920년대 노동-항일운동 거점으로

Posted February. 09, 2019 08:44,   

Updated February. 09, 201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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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상 염상섭 단독 거사로 추진된 1919년 오사카 3·19선언은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아가던 오사카 한인 노동자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차별에 시달리며 생계를 위해 묵묵히 일만 하던 노동자들은 염상섭 체포를 계기로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연이은 본국의 3·1 만세운동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식도 점차 생겨났다. 이러한 각성은 1920년대 오사카에서 벌어진 노동운동과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도쿄가 한인 유학생들의 중심지였다면 오사카는 한인 노동자들의 집결지였다. 1925년 당시 오사카의 한인 노동자는 3만4311명으로 일본 전체 한인 노동자(13만6709명)의 25.1%를 차지했다.(‘조선인 현황’)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한인 노동자는 식민지 민족에 대한 차별 등이 작용해 일본인보다 적게 받았다. 1930년대 한인 노동자의 임금은 하루 평균 1엔 22전으로 일본인 노동자(2엔 5전)의 절반 수준이었다. 1915년 조선소 견습공으로 일하며 일급 85전을 받았던 김태엽은 당시 처우를 이렇게 기록했다.

 “합숙소 생활은 비참했다. 먹기 고약한 안남미 밥에다가 썩은 단무지 몇 쪽, 그리고 소금국이 변함없는 우리의 식사였다. 그러고도 하루 식대는 50전이었다. 알선업자에게 진 빚을 매달 공제해야 하고 의복비 이발료 목욕비 약값 등을 계산하다 보면 빚이 줄기는커녕 점점 늘어나기 마련이다.”(김태엽 ‘항일조선인 증언’)

 1919년 들어 일본 내 한인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도 급격히 증가했다. 염상섭 거사 석 달 뒤 후쿠시마 탄광들에서 일어난 한인 광부들의 쟁의는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염상섭의 거사지인 덴노지 공원은 이후 4대 기념일 투쟁(3·1운동 기념일, 국치일, 관동지진조선인학살일, 노동절)은 물론이고 조선총독 폭압정치 반대 투쟁 등이 주로 열리면서 오사카 지역 한인들의 항일집회 거점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27년 6월 1일 덴노지 공원에서 열린 총독 폭압정치 규탄대회(4000여 명 참가)는 도쿄 등 다른 지역으로 항일투쟁이 확산되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성동기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