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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에 베틀 하나 덩그러니...

Posted January. 03, 2019 07:36,   

Updated January. 03, 2019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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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 작품도, 조각 작품도 없다. 커다란 베틀이 덩그러니 놓여 관객을 맞이할 뿐이다. 그 왼쪽에는 이 베틀로 천을 만든 공방 직원이 활짝 웃는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열리고 있는 ‘애니 앨버스’ 회고전 전시장 입구의 독특한 풍경이다.

 모더니즘 예술가 애니 앨버스(1899∼1994)의 전시장에 베틀이 등장한 이유는 그녀의 예술 재료가 바로 실과 천이기 때문이다. 남성 예술가가 물감으로 추상화를 그렸다면, 앨버스는 도안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베틀로 실을 엮으며 천으로 추상 예술을 했다.

 전시장 입구를 지나자 액자 속 그림 대신 다양한 색깔과 패턴의 직물이 나타났다. 가방과 스카프, 카펫에서 볼 수 있는 패턴 있는 천을 액자에 넣어 벽에 세로로 걸자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보였다. 관객들은 리드미컬하게 배치된 색면과 실의 매듭으로 꼬불꼬불 그려진 선을 따라가며 새로운 추상화를 마주했다.

 실로 엮은 이 천들이 어떻게 예술 작품이 된 걸까? 답은 20세기 유럽의 특수한 상황에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고대 문명의 발견, 다윈의 ‘종의 기원’ 발간 등으로 종교와 철학 전통이 흔들렸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은 환멸을 가져왔다.

 이 시기 예술가들은 과거와 결별하고 예술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따졌다. 예술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앨버스는 “실 자체의 형태를 찾겠다”며 ‘직조 회화(pictorial weaving)’를 만든다.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걸어놓고 보기 위해 만든 직물들은, 실과 천 그 자체의 의미를 탐구한 결과물이었다.

 앨버스의 첫 영국 대규모 회고전인 이 전시는 여성 예술가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에서 비롯됐다. 앨버스는 최근까지 디자이너로 분류되거나 남편인 화가 조지프 앨버스와 함께 거론되곤 했다. 남성의 그늘에 가려진 그녀의 예술 세계는 300여 점의 작품을 통해 깊이를 드러냈다.

 낯선 소재인 만큼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큐레이팅도 돋보인다. 전시장의 시작은 베틀로, 마지막에는 다양한 실을 만져볼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가장 붐볐던 이곳 전시관에서는 손으로 촉감을 경험하는 관객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일생에 걸친 앨버스의 탐구는 고대 페루의 화려한 카펫으로 이어졌다. 말년의 앨버스는 삶에서 뿜어 나온 고대인들의 강렬한 시각 언어에 탐닉했다. 그녀의 기하학적 천과 원시적 카펫의 대조는 결국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는 현대인의 몸부림을 드러내고 만다.


김민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