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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양은 가득히’ 주인공처럼 ...서명, 영사기로 비춰 베껴쓰기 연습

영화 ‘태양은 가득히’ 주인공처럼 ...서명, 영사기로 비춰 베껴쓰기 연습

Posted July. 04, 2016 07:35,   

Updated July. 04, 2016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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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 1979년에 한창 많이 그릴 때는 한 달에 30∼40점씩 그렸다. 전시를 했어도 도록에 실리지 않은 작품이 허다하다. 화랑에 팔았는데 돈 못 받고 어디론가 없어진 경우도 적잖다. 서명이나 일련번호는 내가 직접 안 넣고 화랑에 맡긴 일이 잦았다.”

 위작 논란에 휩싸인 화가 이우환 씨(80)가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왜 유독 이 씨의 그림이 첨예한 ‘위작 진실공방’에 휘말린 걸까.

○ 이우환 작품에 위작 시비가 많은 이유

 1970년대 후반 이 씨가 유명화가가 되면서 수요가 폭증했고 화랑 등의 요구에 맞추려다보니 이 씨는 2년 간 수백여 점을 ‘대량’으로 그렸다. 이 씨 말처럼 관리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고 위조범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적이었다.

 이 씨 그림을 위조한 혐의로 체포된 화상(畵商) 현모 씨(66)는 경찰 조사에서 “부산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골동품상 이모 씨(68)가 2011년 ‘이우환 그림을 애호하는 일본의 모 그룹 회장에게 위작을 만들어 팔자’며 접근해왔다”고 진술했다. 현 씨는 그림 담당인 또 다른 이 모씨(39)와 함께 경기 남양주시 작업실에서 위작 50여 점을 제작했다고 자백했다. 이들은 위작에 1978, 1979년 작품으로 가짜 서명과 일련번호를 넣고 위조감정서도 만들었다.

 이들은 종로구 K화랑을 비롯해 일본 컬렉터나 중간 상인들에게 이 작품을 넘겼다. K화랑은 2012년 개인 컬렉터에게 이 씨 친필 확인서가 붙은 그림 한 점을 4억 원에 팔았다. 경찰이 ‘확실한 위작’으로 제시한 4점 중 하나가 이 그림이다. 하지만 이 씨는 지난달 말 경찰 조사 후 “작가확인서도 이 그림도 분명한 진품”이라고 했다.

 현 씨 일당의 활동 이후인 2012년부터 위작 시비가 자주 벌어지자 이 씨와 미술계 감정단은 이 씨의 작품을 주로 취급해온 한 화랑에 모여 함께 감정을 한 뒤 작가의 친필 확인서를 발급했다. 그러나 감정단이 볼 때 위작처럼 보이는 작품도 이 씨가 진품으로 감정하자 2013년 초 이 모임은 와해됐다.

 어쨌든 작가의 확인서 발급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뻔한 위작 시비는 현 씨 3인조의 내분으로 다시 불거졌다. 현 씨가 2013년 골동품상 이 씨와 그 아들에게 “위작 판매 대금 수십억 원을 독식하고 약속한 대가(절반)를 주지 않는다”는 항의 문서를 보냈다가 수사망에 걸린 것. 이후 경찰은 K화랑과 현 씨 작업실 압수수색 등을 통해 위작 논란 작품을 확보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통해 물리적 감정을 벌인 결과 13점을 위작으로 지목했다.

 미술계에선 경찰의 증거제시에 아랑곳없이 이 씨가 ‘무조건 진품’을 주장하는 건 친필 확인서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보통 위작 논란은 그림을 화랑이 다시 사들이는 방식으로 조용히 처리해 잘 알려지지 않는데 이 씨와 이 씨 작품을 주로 취급한 화랑은 친필 확인서 발급으로 공식 대응한 것이다. 이 씨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이 화랑이 자신의 작품을 열심히 취급했다며 감정까지 맡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우선 친필 작가확인서를 발급한 그림의 진위판정 오류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힘겹게 쌓아온 명망과 신뢰도에는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는다. 그는 “해외 거래에서 이미 꽤 큰 타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독점하다시피 이우환 씨 작품을 거래해 온 화랑에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 미술계 위작은 ‘유통이 만든다’

 현재 미술계 위작은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그 시장 규모나 인력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유명 작가의 그림이 보통 수억 원대에 팔리는 것으로 볼 때 수백억 원대라고 추정될 뿐이다.

 특히 이우환 씨의 경우 2005년부터 10년간 국내 14개 경매사 총 낙찰액 1위(약 712억 원)를 차지한 최고 인기 작가이기 때문에 위작의 집중 표적이 됐다.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컬렉터들이 극소수의 인기작가 작품만을 원하고 미술품 구입 목적이 투자와 자기과시에 치우쳐 있다”고 말했다. 이에 화랑들이 발맞추다보니 유통 과정에서 위작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을 뿐 아니라 유통이 위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 미술평론가는 “이른바 ‘큰 손’이라 불리는 개인 컬렉터들은 위작 거래를 경험하고도 못 본 척 묵인하는 경우가 적잖다”고 했다. 수억 원 대 그림을 취미로 수집하면서 ‘일부의 오류’는 무시한다는 얘기다. 이미 거래한 그림의 진위를 따져봤자 번거롭게 구설에 오르내릴 뿐 딱히 득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개인 컬렉터가 내놓은 위작이 신용도 높은 국공립 미술관에까지 걸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한 공립 미술관 전임 큐레이터는 “얼마 전 국내 유수 미술관이 한 개인 컬렉터가 수십 년 동안 창고에서 꺼내지 않은 유명 작품을 걸었다. 전화로 확인하니 역시 ‘반출한 적 없다’는 답이 왔다. 미술관에 통보해 바로 내렸지만 그 위작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