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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쪽대본

Posted December. 31, 2007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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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유동근 씨가 SBS 드라마 왕과 나 제작진을 폭행한 것은 방송계의 달라진 역학구조를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연예계에선 취중이라지만 탤런트가 PD를 때린 이 하극상()을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폭행 사건은 유 씨가 제작진과 피해자에게 공개 사과함으로써 수습 국면에 들어섰지만 사건의 발단이 된 한국 드라마의 고질병 쪽대본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처럼 드라마가 많은 나라는 없다. 아침드라마,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 월화드라마(또는 수목드라마), 특별드라마 등등. 감정이 풍부한 민족성 때문인가. 이렇게 드라마 편성이 많으면서도 제작 여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그 상징이 바로 당일 촬영 분량만 나오는 쪽대본이다. 연기자가 분장을 마치고 대기 중인데도 대본이 도착하지 않거나 한 쪽씩 팩스나 e메일로 도착하는 것이다. 심지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대사가 한 줄씩 전달되기도 한다.

연기자는 다음 회에 자신이 죽을지도, 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연기를 해야 하니 감정 처리가 잘될 리 없다. 자기 대사 외우기도 바쁘니 상대 출연자와 연기 호흡을 맞추기도 어렵다. 제작진 또한 당일에야 촬영장소를 알게 되는 셈이므로 사전에 촬영 협조를 요청할 수 없어 문화재 훼손 같은 사고를 내기도 한다. 잦은 밤샘 촬영으로 지친 연기자들이 쓰러지기도 한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극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워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데 있다.

출생의 비밀, 불륜, 기억 상실, 콩쥐팥쥐, 신데렐라, 불치병, 고부 갈등. 한 방송계 인사는 이 7개의 플롯을 빼면 한국 드라마에 남는 게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 드라마가 다음 회엔 어떻게 될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반면 한국 드라마는 한 회만 봐도 내용이 뻔한 이유다. 쪽대본은 작가의 역량 부족 탓이 가장 크다. 쪽대본을 쓰지 않기로 유명한 작가 노희경은 극본을 미리 넘기는 것은 제작진에 대한 예의라고 말했다. 제작진에 앞서 시청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작가라면 그 정도의 창작의 고통은 이겨 내야 한다.

정 성 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