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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Posted April. 27, 2006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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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 콩나물 등을 연출한 PD 출신 안판석 감독은 첫 작품인 이 영화에서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자유와 욕망의 팽배 속에 부유하는 현대인들에게 살기 위해 조국과 가족을 버리는 특별한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누리고 있는 것들을 성찰하도록 하는 인문학적 역설의 미학을 택했다.

줄거리는 얼핏 밋밋하다. 평양 만수예술단 호른 주자 선호(차승원)와 전쟁기념관 안내원 연화(조이진)는 사랑하는 사이. 그러나 결혼을 앞둔 이 달뜬 청춘들의 운명은 남한 가족과 편지 교환을 한 사실이 발각된 선호 가족이 탈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면서 전혀 다른 상황으로 돌변한다.

우여곡절 끝에 탈북에 성공해 서울에 자리를 잡은 선호는 정착금까지 사기당하며 연화를 데려 오려고 애쓰지만 연화가 시집가 버렸다는 소식에 절망한다. 사랑에 상심하고 삶에 상심한 선호는 정 많은 남한 여자 서경주(심혜진)에게 마음을 열고 결국 결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연화가 선호 앞에 나타나는데.

물 흐르듯 진행되는 매끈한 전개가 줄 수 있는 단점인 극적인 사건의 부재는 영화 중반부로 향하면서 다소 지루한 감을 주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애잔한 순애보를 잘 그려냈다.

우선 생생한 현실감이 돋보인다. 스크린에 재현된 평양 시가지, 만수대 예술단이 공연하는 평양대극장, 선호와 연화가 처음 만나는 415 태양절 축제, 두 사람이 데이트를 즐기는 대성산 놀이공원, 냉면을 먹는 옥류관 등은 우리에게 낯익은 건조하고 박제된 흑백화면의 평양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희노애락을 겪고있는 사람들이 사는 생생한 삶의 공간이 되었다.

게다가 태풍태양으로 차세대 유망주로 떠 오른 연화 역을 맡은 조이진의 자연스러운 표정 연기와 몸에 녹아든 북한 말투는 중간 중간 남한 말투가 섞인 대사가 튀어나와 불안해보이던 차승원의 연기를 충분히 상쇄했다. 첫 멜로에 도전한 차승원의 연기도 성공한 듯 보인다.

사랑하는 연화와 다시 만나 첫 밤을 보내지만, 새벽같이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헤메는 선호의 모습 위로 겹치는 독백은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향한 지점을 상징한다.

처음 소년단에 입단했을 때는. 그 땐 인생이란 게 그저 세상의 모든 적들을 용맹하게 물리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망설임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음표로 가득 찬 악보와도 같아서 제가 할 일은 그저 더듬더듬 연주하는 것 뿐 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제시한 국경은 겉으로는 분단의 장벽이지만, 장벽이 어디 땅에만 존재하는가. 우리네 삶이란 게 따지고 보면, 보이지 않는 장벽 투성이 아닌가. 하지만, 생에는 넘을 수 있는 장벽도 많지만,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장벽도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5월4일 개봉. 12세 이상.



허문명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