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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없어야 뜬다?

Posted April. 15, 200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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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와 영화에 이른바 싸가지(싹수) 없는 주인공들이 잇달아 등장해 인기를 모으고 있다. 버르장머리 없는 이를 가리키는 이 말이 최근에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일컫는 말이 되고 있는 것.

이는 신세대가 부정적 단어나 어구()의 의미를 전도시킨 뒤 좋은 이미지를 덧칠해 적극적으로 유통시키는 펀(Fun)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비정상적이고 기괴한이란 뜻의 엽기적이란 말이 개성 있고 재미있는이란 뜻으로 변형된 데 이어 이번에는 싸가지 없다의 의미가 변형됐다.

영화나 TV 속 주인공들은 싸가지 없는 대상을 싸가지라고 줄여 부르며 돈 많고 정에 약하며 매력적인 이상형이라는 이미지를 덧칠해 사용하고 있다. 이는 젊은 세대의 새 문화 코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터넷 소설서 의미 변형 시작

싸가지의 변형은 2000년대 초부터 신세대 취향을 반영한 인터넷 소설에서 비롯됐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최수완 작), 옥탑방 고양이(김유리), 1%의 어떤 것(현고운), 내 사랑 싸가지(이햇님) 등 TV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 이 인터넷 소설들에는 예외 없이 싸가지 없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들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이지 않다. 젊은층 사이에서 부자=악인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이 줄어들고 오히려 부()가 선망의 대상이 되면서, 싸가지를 버릇은 없지만 멋있고 속마음이 따뜻한 캐릭터로 소비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1986년 영화로도 제작된 이현세 작가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마동탁 캐릭터와 정반대여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만화에는 부자집 아들=싸가지 없음=정 없는 냉혈한=질투의 화신=악인이란 등식으로 줄거리가 이어진다.

싸가지는 부자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년)에는 부잣집 장남이자 낙제생인 고교생 지훈(권상우)이 등장한다. 그는 과외교사인 여대생 수완(김하늘)에게 반말은 기본이고 수업도중 담배를 피운다. 수완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냥 두 시간 때우고 가. 돈 주면 되잖아.

1월 개봉한 영화 내 사랑 싸가지에서 형준(김재원)은 명문대 법대를 다니는 명품족. 자신의 렉서스 자동차에 실수로 흠을 낸 여고생 하영(하지원)에게 300만원을 물어내라며 다그친다. 그는 돈이 없다는 하영에게 노비문서를 쓰게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 청소 빨래 등 잡일을 시킨다. 형준은 돈도 많으신 거 같은데 한번만 봐 달라는 하영의 하소연에 한 마디 내뱉는다. 나 열라리(대단히) 가난해.

5일 첫 방영된 MBC 월화드라마 불새의 주인공 지은(이은주)도 교통사고로 세훈(이서진)을 크게 다치게 할 뻔하지만 괜찮으냐고 묻는 대신 자신의 빨간색 스포츠카를 걱정한다. 세훈이 뺨을 때리자 지은은 욕을 퍼붓는다. 친구는 지은에게 너 또 싸가지 없이 굴었지라고 핀잔을 준다.

싸가지는 따뜻하다?

이들 싸가지가 미움 대신 사랑을 받는 것은 겉으론 무례하나, 속마음은 순수하거나 허약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3월 종영)에서 재벌 2세 재민(조인성)은 수정(하지원)에게 강한 척하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뒤돌아서서 눈물을 쏟는다.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 그룹 후계자 자리까지 포기했다가 결국 자살한다.

MBC 옥탑방 고양이(2003년 7월 종영)에서 부잣집 손자 경민(김래원)은 동거하게 된 정은(정다빈)의 속을 긁어놓고도 천연덕스럽게 밥을 달라고 한다. 그러다가 정은이 속상한 것 같으면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철없는 모습으로 여성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드라마 불새의 이은규 책임 프로듀서는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몫을 챙기기 때문에 타인의 자기중심적 모습에도 관대해졌다며 오히려 너무 모범적인 사람을 껄끄럽게 느끼는 심리가 싸가지 없는 주인공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승재 조경복 sjda@donga.com kath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