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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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옷을 벗고 침대 위에 누웠다. 탑골 공원에서 비를 맞은 탓인지 몸이 몹시 떨렸다. 그리고 머리도 아팠다. 그는 머리를 만져보았다. 열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목도 아프고 편도선도 부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감기에 걸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상관없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감기에 걸렸다.

그것은 통유리로 막혀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어떤 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과 하루 종일 같이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입 속에는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환기가 잘되지 않는 사무실의 공간 속으로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흉측한 균이 마구 떠다니는 상상을 했다. 누군가 입 속에 숨겨온 그 균은 미스 김의 재채기를 통해 사무실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과장의 폐를 한 바퀴 돌았다가, 결재 서류를 놓고 부장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침과 함께 날아다닌다. 아무리 비누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 균은 악수를 할 때마다 손에서 손으로 전염되고 술잔을 돌릴 때마다 입에서 입으로 전염된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감기보다 더 심각한 병에 걸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때때로 이유도 없이 머리에 열이 나고 구토와 설사가 나곤 했었다. 출근길에 지하철 안에서나 회사 계단을 오를 때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자리에 풀썩 주저앉기도 했었다.

그는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점령군처럼 돌아다니며 건강한 세포들을 감금하고 마구 고문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몸 속의 기관들이 점점 부패되고 돌연변이를 일으켜 자신이 결국에는 끔찍한 괴물로 변하게 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상상을 하자 그는 갑자기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끔찍한 일이군. 그러자 그가 지금 머리에 열이 있는 것은 미스 김의 재채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다. 보신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김과장이 구더기나 뱀 같은 것을 먹을 때 기생충의 털에서 발생한 바이러스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걸려왔던 그냥 일상적인 감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감기에 걸렸으면 양치질을 하고 자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양치를 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잤다. 다시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 동안 잠들어 있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방은 반지하였지만 실제로는 반지하보다 더 내려간 3/4 지하였고 그나마 있는 작은 창문은 옆집의 LPG 가스통 덮개에 가려 있어 낮에도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 몇 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명종 시계를 바라봤다. 그의 자명종 시계는 며칠 전부터 건전지가 다 되어 정지해 있었다. 굳이 시간을 알고자 한다면 116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되겠지만 그는 이제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꼭 시간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므로 그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무엇이든 배달을 시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손잡이 옆에 어지럽게 붙어 있는 광고 스티커들을 읽어 내려갔다. <황제 보쌈. 334-9420>, <한 판 시키면 한 판 더! 와우 피자 335-6789>, <스피드 중화반점 334-8282> 그는 전화번호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삼삼사에 팔이팔이, 삼삼사에 팔이팔이" 하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전화를 걸었다. 40대 중반의 사내가 "예, 친절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입니다" 하고 말했다. 중국집 주인의 목소리는, 가판대에서 만난 뚱뚱한 여자의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와는 다르게, 정말 너무나 친절하고 맑게 들려와서 그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자장면 한 그릇도 배달이 되느냐고 물었다. 전화기 속의 사내가 "그럼요. 걱정 붙들어 두세요. 저의 스피드 중화반점은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언제나 친절과 고객 감동으로 배달해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스피드 중화반점 주인의 말에 감동을 받아 자장면 대신에 좀 더 비싼 짬뽕을 시켰다. 짬뽕은 정말 금방 배달되었다. 하지만 별로 고객을 감동하게 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그는 짬뽕을 허겁지겁 먹고 짬뽕 그릇을 문 밖에 내놓았다. 짬뽕 그릇은 먹다 남은 국물 때문에 아주 지저분해 보였다. 그는 저렇게 지저분하게 그릇을 돌려주는 것은 짬봉 한 그릇이라도 정성 들여 배달해주는 스피드 중화반점의 친절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짬뽕 그릇을 들고 들어와 찌꺼기를 싱크대에 버리고 물로 대충 씻어서 다시 문 밖에 내놓았다. 훨씬 보기가 좋았다. 배달원이 깨끗한 그릇을 가지고 돌아갈 걸 생각하니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담배를 한 대 물고 그의 집에 백 개도 넘게 있는 라이터 중에서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자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머리에는 열이 있는 것 같았다. 편도선도 부어 있고 구토가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현기증이 나고 머리에 열이 있는 것은 나쁜 병균에 감염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미스 김에게 옮아온 바이러스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뱀이나 너구리같은 것을 좋아하는 김과장의 몸 속에서 생긴 기생충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하청을 따기 위해 그에게 접대를 했던 중소 기업의 사장들이 괘씸한 마음에 음식이나 술에 나쁜 병균을 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것은 그냥 그가 한 달에 한 번씩 걸렸던 일상적인 감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감기에 걸렸으면 양치질을 하고 자야 하는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양치질을 하지 않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그는 몇 시인지 모두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이제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방문을 열고 문에 붙어 있는 스피드 중화반점 스티커를 보고 "삼삼사 팔이팔이 삼삼사 팔이팔이" 하고 중얼거리며 스피드 중화반점에 전화를 걸었다. 주인은 친절과 고객 감동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짬뽕을 시켰다. 짬뽕은 정말 빨리 배달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객을 감동시킬 만한 맛은 아니었다. 그는 짬뽕을 국물까지 다 비우고 싱크대에서 그릇을 씻은 뒤 문밖에 내 놓았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머리에 다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편도선은 더 부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또 한 대를 더 피웠다.

그는 머리에 열이 나는 것은 감기 때문이고 감기에 걸리면 양치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감기에 걸리면 입 속에 병균이 우글거리고 그 병균은 양치질을 해야만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입 속의 병균은 몸 속으로 들어가 그의 몸을 마구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입 속의 병균들을 깨끗이 씻어내지 않으면 조그만 사무실에서 숨을 쉴 때마다 자신의 병균들이 공기 중에 날아올라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상하는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까지 감염시키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가 지금 머리가 아픈 것은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감기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양치를 하지 않아서,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매일 단정하게 면도를 하고, 깨끗하게 다려진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사무실의 남자 직원들과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보기에도 멋있고 청결한 옷을 입고 다니는 여직원들 중에 누가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입 속에 숨겨두고 있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에게 너무나 친절하게 대했으므로 누가 입 속에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을 숨기고 있었는지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입 속에 숨어사는 창을 든 나쁜 병균과 감기와 현기증과 구토와 잔뜩 부어오른 편도선과 친절에 대해 계속 중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므로 처음에 눈을 떴을 때는 한동안 목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회사를 며칠이나 무단 결근하게 되었는지, 또 오늘은 몇 일이고 몇 시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런 것은 이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문을 열고 중국집 전화번호를 읽은 다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늘 들려오는 친절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이라는 멘트는 그 날 따라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거기가 중국집이냐고 물었다. 주인은 여기는 중국집이 맞다고 말했다. 그는 거기가 중국집이 맞다면 짬뽕을 하나 배달해달라고 말했다. 주인은 화가 나지만 최대한 억제하는 목소리로 지금은 새벽 세시고 우리 집은 스물네 시간 하는 집이 아니라서 지금은 배달을 할 수 없노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지금 배가 몹시 고픈데 언제나 친절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이라면 짬뽕 한 그릇쯤은 배달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다. 중국집 주인은 "이 새끼야 감동이고 지랄이고 지금이 몇 시인 줄이나 알아? 새벽 세시야. 새벽 세시. 새벽 세시에 자장면 배달시키는 미친놈이 어디 있나. 할 일없으면 잠이나 쳐자." 하고 말하고 전화를 딸깍 끊었다. 그는 중국집 주인의 성난 목소리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는 중국집 주인의 말대로 그냥 잠이나 쳐잘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고 또 며칠인지 모르는 아주 긴 시간 동안 내내 잠만 잤기 때문에 다시 잠을 자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는 오늘이 몇 일인지 모르지만 중국집 주인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새벽 세시고, 새벽 세 시에는 지극한 친절과 고객 감동도 쉬어야 하는 때이기 때문에 배달이라는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선 약간 실망감이 들었다. 그는 지금이 새벽 세시라면 회사에 무단 결근을 한지 이틀째 되는 새벽 세시일까 아니면 사흘째 되는 새벽 세시일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의 무단 결근에 대해, 특히 상무님이 참석하는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 회의>에 빠진 것에 대해 회사 사람들은 상당히 당황해하고 있을 것이다. 부장은 이 사실에 대해 대단히 분노할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부장과 같은 합리주의자가 어느 날 아침 난데없이 프라이데이와 헤어지고 싶었다는 그의 상황을 이해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부장은 프라이데이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가 이런 해괴한 일을 벌이는지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부장은 곧 그의 이런 행동들이 업무상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또한 이해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단정지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무님께 보고해야 할 통계 서류들을 회사를 빠져나오면서 쓰레기통에 꾹꾹 발로 밟아 버렸기 때문에 부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합리적인 형식으로 상무님께 아무것도 변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회사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별로 두려울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부장이 아무리 화가 났다 하더라도 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핸드폰을 회사에 두고 나왔다. 또 육 개월 전에 이사를 오면서 인사과에 주소 변경 사항을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반지하 방의 위치를 회사 사람들은 모른다. 또 회사 사람들은 그의 핸드폰 번호만 알 뿐 집 전화번호는 알지 못한다. 부장이 이런 사실을 두고 상사로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그를 약간 기분 좋게 했다. 상무님께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부장의 모습을 상상하자 약간 고소한 기분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프라이데이와 부장은 어쩐지 닮은 곳이 한두 군데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지금 그는 새벽 세시에 일어났고 배가 몹시 고팠다. 그러나 새벽 세시는 친절과 고객 감동도 잠을 자야만 하는 시간이다. 그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너무도 배가 고팠으므로 24시간 편의점에서 라면이라도 사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거리로 나왔다.

새벽 세시의 거리는 한산했지만 반대편 인도에서는 양복을 입은 취객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어 다소 시끄러웠다. 그들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료들처럼 보였는데 두 명은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벼룩 시장'이나 '가로수' 같은 정보지를 놓아두는 보급대를 발로 차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두 명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급대를 발로 차는 사내와 다른 사내를 한 사내가 중간에서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주먹질이라도 벌어지면 재미있는 구경이 될 것 같아 한참동안 그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주먹질을 할 것처럼 서로에게 심한 욕설을 해댔지만 정작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욕설만 할뿐이었다. 그는 에이 시시하군, 하고 중얼거리며 계속 길을 걸어갔다. 이따금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지나갔다. 상점은 대부분 푸른 셔터를 내린 채 문을 닫고 있었다. 그는 백 미터 정도를 걸어갔지만 24시간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퇴근하는 길에 어디선가 24시간 편의점을 본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네거리의 중앙에 섰다. 그리고 동쪽으로 이백 미터를 걸어갔다. 24시간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서쪽으로 사백 미터를 걸어갔다. 24시간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북쪽과 남쪽으로 각각 이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24시간 편의점이 보이지 않아서 다시 네거리로 돌아왔다. 그는 약간 허탈해진 마음에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선 동서남북으로 갈라진 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유통과 물품의 천국에서 24시간 편의점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길 건너편에서는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여전히 주먹질은 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심한 욕설을 해대고 있었고 이따금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비틀비틀거리며 아스팔트를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는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물어볼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서 싸움을, 아니 욕설을 하고 있는 사내들에게 24시간 편의점의 위치를 묻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오토바이 폭주족들이라면 여기저기를 뽈뽈거리며 잘도 돌아다니니까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잘 알겠지만 그들을 세워서 길을 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담배 한 대를 더 물었다. 그때 투피스를 입은 여자 한 명이 길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고 사무원처럼 단정해 보였다. 여자는 거리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양복 입은 사내들 때문에 겁을 먹은 듯 몹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는 사무원 복장을 한 여자라면 편의점의 위치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건너편의 사내가 "그래 때릴 테면 어디 한번 때려봐! 이 개새끼야." 하고 악을 썼다. 여자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사내들과 여자 사이의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호가 채 바뀌기도 전에 건널목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여자의 걸음은 대단히 빨랐으므로 그는 여자에게 편의점의 위치를 묻기 위해 재빠르게 다가가야 했다. 그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다가가자 여자는 깜짝 놀라서 "어머!"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여자를 놀라게 할 맘은 없었다는 뜻으로 손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저 뭘 좀 물어 보려고 하는데요." 하고 말을 건넸다. 여자는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여자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판단했으므로 여자에게 다시 "저 말씀 좀 여쭙겠는데요." 하고 말했다. 여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자와 나란히 걸으면서 혹시 이 근처에 사시냐고 물었다. 여자는 아까보다 더욱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거의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여자를 따라 걸으면서 자신은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찾고 있는데 혹시 이 근처에 살고 있다면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알지 않겠나 싶어서 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으므로 그는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아주 살짝 여자의 옷을 잡으며 "저 아가씨" 하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가 괴성을 지르면서 핸드백으로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여자의 핸드백 속엔 무슨 묵직한 것이 들어 있었는지 그는 아주 큰 충격을 받고 건물 옆에 있는 화단으로 쓰러졌다. 여자는 그를 때린 후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가 어느 정도 충격에서 깨어나 다시 일어서 보니 여자는 20미터 정도 앞에 있는 가로수 옆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앞도 안 보고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가로수 받침대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곧 여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여자는 가로수 받침대에 심하게 부딪힌 모양으로 이를 꼭 다물고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여자는 몸을 바짝 움츠렸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당황스러웠으므로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우선 여자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의 안면을 강타했던 핸드백을 가슴에 꼭 안았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여자에게 자신을 왜 때렸냐고 물었다. 여전히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곧 여자를 향해서 팔을 내밀며 다친 것 같은데 일어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팔을 내밀어 여자의 팔목을 잡고 천천히 일어서 보라고 말했다. 그때 그의 코에서 코피가 쏟아져서 여자의 스커트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여자가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손등으로 코피를 훔치고 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코피가 멈추지 않고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코를 강하게 눌렀다. 입 속으로 피가 한 움큼 고여서 그는 꿀꺽 하고 피를 마셨다. 그때 여자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그를 세차게 밀쳤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여자의 옷을 재빨리 잡았다. 여자의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가 말했다. 여자가 눈물을 터트렸다. "잘못 했어요. 집에 가게 해주세요." 여자가 말했다. 그가 "헛!"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는 몹시 난처해져서 자신은 아가씨를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근처에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몸을 해바라기 씨처럼 더욱 오므리고 이제는 덜덜 떨기까지 하면서 "원하시면 돈을 드릴께요." 하고 말했다. 그는 여자의 이런 모습에 당황스러움과 함께 화가 나기까지 하였다. 그는 여자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그런 심정이 들었다는 것일 뿐 정말로 그가 여자를 때릴 생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코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으므로 그는 소매로 피를 닦고 고개를 젖혔다. 그는 고개를 젖힌 채로 여자에게 자신은 어디까지나 편의점의 위치를 물으려 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연이어 그는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다시 물었다. 여자가 서쪽으로 난 길을 가리키며 백 미터쯤 가다가 좌측으로 꺾으면 된다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자가 가리킨 방향은 그의 뒤쪽에 있었으므로 그는 몸을 돌려 그 방향을 바라봤다. 그가 신라 제과점에서 꺾으면 되느냐고 물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다시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도망을 갔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맹렬히 도망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쓰러져 있던 가로수 옆에는 구두 한 짝이 벗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그 구두 한 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뭐야. 자기가 신데렐라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피식 웃었다.

여자의 말대로 24시간 편의점은 서쪽으로 백 미터쯤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서 이백 미터쯤 가니 나왔다. 그는 24시간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어서 오세요." 하는 인사를 했다. 그는 여기는 새벽 세시에도 친절과 고객 감동이 잠을 자지 않는군 하고 생각했다. 그는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아봤다. 편의점의 즉석 식품 코너에는 라면뿐만 아니라 잣죽이며 단팥죽, 자장면, 쇠고기국밥, 스파게티같이 뜨거운 물만 넣거나 전자 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삼 분 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이 그것도 편리하게 삼 분 만에 요리가 된다면 얼마 가지 않아서 식당들은 모두 문을 닫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음식들은 스피드 중화 반점처럼 지극한 정성과 고객 감동으로 배달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식당들은 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쇠고기국밥, 우거지국밥, 신라면, 왕뚜껑같이 즐비하게 있는 즉석 음식들 속에서 어떤 것을 먹으면 좋을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음식이 있었으므로 선뜻 어떤 것을 먹어야할 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는 계산대 앞으로 걸어갔다. 계산대에는 파란색 조끼를 입고 왼쪽 가슴에 <아르바이트. 최무이>라는 명찰을 단 20대 초반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최무이씨?" 하고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바이트생은 그가 한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생은 "죄송합니다. 손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고 친절하게 다시 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아르바이트생의 명찰을 가리키며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의 조끼 왼쪽에 붙어 있는 명찰을 보고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들 끄덕거린 후 그러나 최무이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면 왜 명찰을 달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최무이는 그만둔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인데 자신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명찰이 없고 그러나 명찰을 꼭 달고 있어야 하는 것이 본사의 규정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달고 있는 것이라고 다소 멋쩍어하면서 말했다. 그는 아르바이트생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므로 자신은 지금 라면을 살 생각인데 어떤 라면이 가장 맛있냐고 물었다. 최무이라는 가짜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은 그것은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쉽게 권해줄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 최무이씨는 어떤 라면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은 안성탕면을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무이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웃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우선 최무이씨라고 불러서 죄송하다고 말한 다음 안성탕면은 어디 있으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편의점의 한쪽 끝을 가리키며 왼쪽 두 번째 칸에 있다고 말했다. 왼쪽 두 번째 칸에는 과연 안성탕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컵라면처럼 용기에 들어 있어 즉석으로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아니라 냄비 같은 것에서 끓여 먹어야 하는 봉지에 든 라면이었다. 그는 다시 계산대로 돌아와서 컵라면으로 되어 있는 안성탕면은 없느냐고 물었다. 안성탕면은 원래 컵라면 용기로는 나오지 않는다고 가짜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이 말했다. 그는 그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아서 소고기국밥도, 우거지국밥도, 심지어 단팥죽이며 잣죽 하다 못해 떡볶기 같은 것도 즉석 용기로 나오는데 안성탕면이 컵라면 용기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직 자신의 명찰이 나오지 않았지만 본사의 지시 때문에 부득이하게 최무이라는 가짜 이름의 명찰을 달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대신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피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오다가 코피가 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가짜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이 솜을 좀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제 코피는 멎은 것 같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은 물에 젖은 티슈를 그에게 건네면서 그래도 피는 닦으셔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냉장고에 비친 얼굴을 보면서 피를 닦았다. 안성탕면은 용기에 든 것이 없었므로 할 수 없이 그는 그냥 봉지로 되어 있는 안성탕면을 열 개 사서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편의점 앞에는 경찰 두 명과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덩치가 좋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덩치 좋은 사내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았다.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멱살을 잡고 그의 목을 흔들면서 "너를 찝쩍댔다는 놈이 바로 이 놈이야?" 하고 물었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아까 네거리에서 만난 여자가 경찰 뒤에 숨어 있었다. 여자는 경찰 뒤에 숨어서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잔뜩 흥분한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가 그를 향해 "이 새끼 눈깔을 파버린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다가와서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를 다독거리며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선생님은 진정하시라고 말했다. 그러나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더욱 힘을 줘서 그의 멱살을 잡고는 길거리에서 연약한 여자를 괴롭히는 이런 놈은 감옥에 집어넣어서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에게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우선 놓아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여전히 멱살을 놓지 않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도 폭행죄로 잡혀 갈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서야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그의 멱살을 놓았다. 그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에게 다가와서 잠시 파출소에 같이 가주셔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선생님은 폭행과 강제 추행범으로 지금 체포됐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가 "헛"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는 무슨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저 여자에게 물어보면 오해가 금방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사소한 오해는 일단 파출소에 가서 풀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가 "뭐 사소한 오해? 저 개새끼 뻔뻔하게 말하는 거 좀 봐! 확 죽여버릴까보다" 하고 그에게 다시 달려들려고 했다. 의경처럼 보이는 젊은 경찰이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사내를 말렸다. 안경을 낀 경찰이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파출소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그를 떠밀었다. 그는 떠밀리다시피 경찰차의 뒷자석에 올라탔다.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가 다가와서 저런 놈과는 같은 차에 타고 싶지 않으니 자기는 여동생이랑 택시를 타고 파출소에 가겠다고 말했다. 여동생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여자의 오빠쯤 되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의 오빠가 도대체 자신에게 왜 그러는 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새벽 네 시의 파출소 안은 난장판이었다. 몇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고 50대 중반의 아저씨는 파출소 소장을 잡고 계속 큰 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두 명의 경찰이 음주 운전 측정기를 40대 아줌마에게 들이대면서 계속 측정을 거부하시면 아줌마만 더욱 불리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40대 아줌마는 더욱 불리해질 텐데도 불구하고 계속 음주 측정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파출소 소장은 아주 유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으로 그가 경찰의 손에 끌려 들어왔을 때 "그 분은 왜?" 하고 '그 분' 이라는 경어를 사용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거리에서 젊은 여자를 강제 추행하다가 잡혀 왔다고 말했다. 파출소 소장은 그 정도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파출소 소장이 "피해자는?" 하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약간 놀란 것 외에 별다른 상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파출소 소장은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니 피해자는 어디 있냐고?"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지금 택시 타고 오고 있다고 말했다. 파출소 소장이 "빨리 조서 꾸며."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자기 자리로 그를 안내하더니 앉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노트북에 파워를 넣었다. 그때 50대 중반의 아저씨가 파출소의 중앙으로 걸어나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있었을 때는 우리도 꿈과 희망이 있었어. 국민의 정부? 지랄 났네. 지랄 났어. 너희들이 뭐야? 경찰이야? 경찰이 경찰다워야지 말이야. 도대체 민주 경찰도 경찰이야? 한국 놈들한테 민주라는 게 말이 돼?" 하고 떠들었다. 파출소 안에 50대 아저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김 의경 담배 하나만" 하고 말했다. 김 의경이 다가와서 담배 한 대를 건네며 박 경장님은 담배 끊는다는 핑계로 계속 그렇게 얻어 피우실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웃으면서 "너는 새끼야 나라에서 담배가 나오잖아. 그리고 정말 이것만 피우고 끊는다니까. 맛도 없는 군용 담배 가지고 생색내기는" 하고 말했다. 연이어 안경을 낀 경찰이 50대 중반의 아저씨를 가리키며 "저 아저씨는 한동안 뜸하더니 또 나타나셨네."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그에게 혹시 신분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와야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은 신분증이 없으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대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짜증난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이보세요 선생님. 그러니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대면 우리가 선생님이 왜 여기에 오시게 되었는지 납득시켜드릴 테니 어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나 대세요." 하고 말했다. 그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댔다. 안경을 낀 경찰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노트북에 치고 다시 작은 메모지에 주민등록번호를 적더니 김 의경에게 "이거 조회해봐!" 하고 말했다. 곧이어 안경을 낀 경찰은 "아까 그 여자분 오빠 되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선생님이 그 여자분에게 접근해서 강간을, 아니 강간은 아니구나, 강제로 추행을 하려 했다는데 맞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 여자와 여자의 오빠가 파출소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의 오빠는 아까 그의 멱살을 잡던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겸손하게 파출소 안에 들어오더니 점잖게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앞에 있던 파출소 소장이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는 파출소 안을 한번 돌아보더니 그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파출소 소장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빠는 여자를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파출소 안을 반쯤 지났을 때 술이 취한 50대 아저씨가 큰 소리로 울면서 "아이고. 박정희 대통령님. 박정희 대통령님. 우리들의 박정희 대통령님. 정말 그리웁습니다. 그때가 그리웁습니다." 하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50대 아저씨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에게 "여자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강제 추행으로 연행되는 거 알아요?" 하고 물었다. 그는 여자 몸에 손을 대면 강제 추행이 되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함부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여자에게 물어보면 알 거라고 또 말했다. 그는 여자 쪽을 바라봤다. 여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그때 여자의 오빠가 안경을 낀 경찰에게 다가와서 다시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여자의 오빠에게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는데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가 저 개새끼 죽여 버린다고 말하면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오빠는 그를 향해 말하지 않고 경찰을 향해 고함을 치면서 "애가 옷이 찢어지고, 신발도 없고, 피를 질질 흘리면서 집으로 왔는데 뭣이 어쩌고 어째?" 하고 말했다. 이제 스물을 갓 넘은 듯한 젊은 의경 두 명이 와서 여자의 오빠를 말렸다. 그는 자신은 여자에게 24시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물었던 것뿐이고 여자가 핸드백으로 얼굴을 때려서 피를 흘린 것은 오히려 자기라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다시 경찰들을 향해 "저게 말이 돼요? 저 말이 도대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냐구요?" 하고 고함을 질렀다. 옆에서 여전히 음주운전 측정을 거부하고 있던 여자가 놀란 눈으로 여자의 오빠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일어나서 선생님은 잠시 저쪽으로 가서 앉아 계시라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가 여자 쪽으로 가고 나자 안경을 낀 경찰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선생님은 단지 편의점 위치를 물으려 했을 뿐인데 여자분이 난데없이 핸드백으로 선생님 얼굴을 때렸다 이거지요? 하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 여자분 옷은 왜 찢었냐고 안경을 낀 경찰이 다시 물었다. 그는 그것은 자신이 찢은 것이 아니라 찢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피식 웃으면서 찢었건 찢어졌건 그것이 왜 찢어지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여자가 자신을 때리고 도망가다가 가로수 받침대에 걸려 넘어졌는데 그가 다가가서 여자를 일으켜 세우려하자 또다시 자신을 힘껏 밀치고 도망가려해서 자신이 여자의 옷을 잡았는데 아마 그때 찢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면서 자신이 왜 여기까지 끌려와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때 김 의경이 다가와서 "이분 깨끗한데요. 전과는 없어요"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에게 담배가 있냐고 물었다. 그는 경찰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으므로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하면서 담배가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하지만 아까 담배를 피우면서 이제 담배를 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웃으면서 한 대만 더 피우고 끊겠다고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안경을 낀 경찰에게 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이 담배를 받아 불을 붙이고는 군용 담배는 영 맛이 없어서 하고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도 한 대 피우시라고 말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안경을 낀 경찰과 같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반쯤 피우자 안경을 낀 경찰이 선생님은 자신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같은 경찰은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과 밤마다 씨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소리지르고 있는 저 아저씨는 멀쩡한 회사에 중역인데 술만 취하면 우리 파출소로 쳐들어와서 저렇게 박정희 찬양을 한다고 말했다. 저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고 물었다. 연이어 안경을 낀 경찰은 세상은 원래 이해가 안 되는 것이어서 우리는 애당초 이해 같은 것은 포기하고 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건 안 되건 이런 사건은 밤마다 쉴새없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과중한 업무에 지쳐 있는 우리 경찰들을 위해서 선생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서로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파출소 안이 밤마다 이런 분위기라면 경찰들은 정말 업무에 지칠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딱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그럼 자신이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자신이 묻는 말에 성의껏 대답만 잘 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담배를 끄고 직장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현재로선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언제까지 직장을 다녔냐고 물었다. 그는 며칠 동안 몸이 아파서 계속 잠을 잤기 때문에 언제부터 직장에 나가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일주일전까지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의 말하는 방식이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는지 인상을 찌푸리고는 직장을 다녔다면 어떤 직장에 다녔냐고 물었다. 그는 S 전자 본사 영업부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안경을 낀 경찰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S 전자라고 하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 대기업 S 전자냐고 물었다.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럼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S 전자지 우리가 보통 잘 모르고 있는 S 전자는 어떤 회사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S 전자라면 우리 나라에서 최고의 기업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꼭 반드시 최고의 기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은 S 전자에 다니시는 분이 왜 이런 일을 했냐고 물었다. 그는 "헛"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자신은 24시간 편의점을 여자에게 물었을 뿐인데 여자가 난데없이 핸드백으로 얼굴을 쳤으며 이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지겹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하지만 선생님 말씀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여자를 불러다가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여자와 여자의 오빠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저 남자 말로는 자신을 때린 것은 오히려 여자분 쪽이고 자신은 단지 편의점의 위치를 물으려고 했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은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경찰은 다시 남자가 여자분의 몸을 가격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할 만한 어떤 행위를 하였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정확히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자신은 너무나 무서웠고 그래서 그랬노라고 모기 소리처럼 작게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뭘 그래서 그랬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여자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면서 자신은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의 오빠가 안경을 낀 경찰에게 피해자는 우린데 지금 누굴 다그치는 것이냐고 강력하게 따졌다. 안경을 낀 경찰은 오빠의 말에 조금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누굴 다그치는 게 아니라 저분은 S 전자 본사에 근무하시는 분인데 저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분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사건의 정황을 정확히 알고 싶어 그런다고 했다. 안경을 낀 경찰의 입에서 S 전자라는 말이 나오자 여자의 오빠가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는 네가 먼저 핸드백으로 저 남자를 때렸느냐고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옷은 왜 찢어졌냐고 다시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중간에 나서서 저 분은 단지 길을 물었을 뿐인데 여성분은 저 신사분을 치한으로 오해해서 생겨난 일 같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를 지칭할 때 저 분, 저 남자, 선생님, 신사분 같은 말을 마구 혼용해서 썼으므로 그는 안경을 낀 경찰이 사건 정황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호칭이 정말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지 가끔씩 헷갈렸다. 안경을 낀 경찰은 연이어 우리가 조회를 해보니 저 분은 전과도 전혀 없이 깨끗하고, 또 직장이나 신분을 보니 이런 일을 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그를 다시 한번 힐끔 보더니 경찰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안경을 낀 경찰이 여자에게 다가가더니 저 분이 아가씨를 위해하려 하거나 성적 추행을 한 일은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렇긴 하지만 자신은 정말로 무서웠다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가 민망하다는 듯이 파출소의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계속 불리해 질 것이 분명한데도 음주 측정을 거부하고 있던 40대 여자가 내가 들어보니 여자가 나빴네, 하고 말했다. 그러자 파출소 소장이 웃으면서 다가와서는 40대 여자에게 아주머니는 음주 측정이나 빨리 하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와 여자의 오빠에게 이 사건은 사소한 오해에서 발생한 일인 것 같으니 이쯤에서 서로 좋게 마무리하자고 말했다. 그는 여자의 오빠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그의 눈을 피해 딴청 피우듯 창 밖을 바라봤다. 파출소 소장이 그의 어깨를 다정스럽게 툭툭 치면서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이니 선생님이 너그럽게 이해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파출소 소장은 이제 울음을 그친 여자에게 "그러기에 젊은 여자 분이 밤늦은 시간에 다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무서운 일 당하시기 전에 미리미리 조심하셔야지요. 다음부터는 일찍일찍 다니세요" 하고 말했다.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예" 하고 공손히 대답을 했다. 파출소 소장은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그만 가보셔도 좋다고 말했다. 여자와 여자의 오빠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도망치듯 황급히 파출소를 빠져나갔다. 여자와 여자의 오빠가 그렇게 황급히 사라지자 그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파출소 소장이 그에게 다가와서 다 오해에서 생긴 일이니 선생님이 이해하세요, 하고 한번 더 말했다. 그때 한 쪽 구석에서 잠들어 있던 50대의 술 취한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박정희 대통령님. 우리들의 박정희 대통령님. 참으로 그리웁습니다. 나라꼴이 엉망입니다. 어서어서 돌아오세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파출소 소장은 "이보세요. 안 상무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안 상무님처럼 이렇게 파출소에 와서 술 먹고 행패 부렸으면 벌써 삼청 교육대 같은 곳에 끌려갔어요."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의 어깨를 툭툭치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가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가 안경을 낀 경찰을 노려보면서 "이제 가도 좋다니요?"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의 도발적인 눈빛을 의아하게 쳐다보더니 "이제 가셔도 된다구요." 하고 다시 말했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파출소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파출소 밖으로 막 나왔을 때 그의 주민등록번호로 전과를 조회했던 김 의경이 달려나와 "선생님 이거 두고 가셨는데요." 하면서 안성탕면이 든 비닐 봉지를 건넸다. 그는 비닐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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