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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선 회사 근처에서 한시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으므로 종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업무 시간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빌딩의 옥상 위에는 왕관을 쓴 것처럼 저마다 거대한 광고판이 올려져 있었고 그 광고 속에 들어 있는 예쁜 여자들은 맥주나 샴푸 같은 것을 손에 하나씩 들고 이런 상품을 가지게 되어서 너무나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그가 걷는 보도 위에 엽서 같은 낙엽들을 노랗게 떨구었다. 그것을 보니 그는 가을이 왔다는 것을, 그가 좋아하는 시월이 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는 조금씩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종로 쪽으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건널목을 건너야 했으므로 그는 회사에서 출발한 이후 처음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빨간 신호가 파란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문득 '그래, 이제 뭘 하지?' 하고 자신에게 조용히 물었다.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그럼 너는 무엇을 하고 싶지?' 하고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여전히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토록 회사를 떠나고 싶었는데 막상 회사를 박차고 나오자 이제와서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이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회사를 박차고 나온 지는 아직 10분도 채 되지 않았으므로 이제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조금 걷다보면 '무엇을 할 것인지', '혹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가 곧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보도 블록 위를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조금씩 더 가벼워졌다. 사실은 그의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워져 그는 뜀박질이라도 해서 한참 동안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걷고 있는 거리의 보도 블록들과 가로수들이 "좋아! 잘했다구!" 하면서 그에게 박수를 쳐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땅히 달려가야 할 곳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전히 천천히 걸었다.

무교동의 L 화재 건물 앞에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껌이나 신문 같은 것을 판매하는 가판대에서 바나나 우유를 하나 샀다. 그 우유는 그가 어릴 때 목욕탕에 가면 아버지가 사주던, 레미콘 탱크를 바로 세워 놓은 듯한 모양 그대로였다. 아직도 레미콘 탱크 모양의 바나나 우유가 나오는군. 그는 신기해하며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가판대 앞에 있는 신문 판매대에서 연예인 B양이 국회 의원 J와 섹스는 두 번밖에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항문 섹스를 해줬다는 기사는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부인하는 스포츠 신문의 일면 기사를 읽었다. 스포츠 신문 일면에는 큰 글씨체로 <연예인 B양 항문 섹스 적극 부인!> 이라는 머릿글을 달고, 그 아래 수많은 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예인 B양 사진을 싣고 있었다. 그는 저렇게 예쁜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항문 섹스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예인 B양이 국회의원 J와 항문 섹스를 했건 안 했건 그런 것이 어떻게 신문 일면 기사로 나올 수 있는지 조금 의아했다. 신문은 반으로 접혀져 판매대에 꽂혀 있었으므로 <국회의원 J의 요청에 못 이겨 호텔에서 두 번 만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항문>까지만 읽을 수 있고 나머지 기사는 다른 편에 접혀져 있었다. 그는 나머지 기사가 궁금했으므로 스포츠 신문을 판매대에서 살짝 꺼냈다. 그러자 가판대 안에 있던 뚱뚱한 여자가 "신문 사실 거예요?" 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 기사만 조금 더 보면 되므로 살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뚱뚱한 여자는 "사지도 않을 거면서 신문은 왜 뽑아요?" 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뚱뚱한 여자가 너무나 우악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그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는 재빠르게 신문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연예인 B양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기왕에 보던 것이었으므로 반으로 접혀져 있어 보이지 않는 기사가 궁금했다. 그는 뚱뚱한 여자에게 일면 기사를 조금만 더 보면 되는데 잠시만 신문을 꺼내서 보면 안되겠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뚱뚱한 여자는 그를 잠시 쳐다보더니 "우리는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요? 보고 싶으면 돈주고 봐요."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문 판매대 위에는 <일반 신문 400원. 스포츠 신문 500원> 이라고 가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 속에는 바나나 우유를 사고 받은 잔돈 500원이 있었다. 하지만 곧 연예인 B양이 국회의원 J와 항문 섹스를 정말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알기 위해 돈을 500원이나 주고 신문을 산다는 것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사가 바나나 우유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바나나 우유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포츠 신문 일면 기사에 나온, 수많은 마이크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예인 B양 사진도 슬쩍 바라봤다. 연예인 B양은 큰 심리적 고충을 겪고 있는지 화장기 없이 초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만큼 예뻤다. 연예인 B양의 사진을 보자 그는 국회의원 J가 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섹스를 해야했는지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는 가판대 안에 있는 신경질적이고 뚱뚱한 여자에게 500원을 줬다. 뚱뚱한 여자가 "신문 사시게요?" 하고 훨씬 상냥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손을 저으며 "신문말고 바나나 우유 하나 더 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빨대도 같이 달라고 덧붙여 말했다.

20분쯤 후에 그는 종로 3가에 도착했다. 막상 종로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이 왜 종로에 왔는지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가 종로에 와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종로에 와야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이 종로에 오지 말아야 할 이유도 또한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로 3가의 금강 제화 앞에서 종로 1가 방향과 종로 5가 방향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는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종로 1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5분쯤 걷다가 국세청 신축 건물 앞에 도착했다. 국세청 건물은 아주 웅장하면서도 특이했다. 국세청 건물은 신축 건물이라 그런지 깨끗하기도 했거니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저런 곳에서 세금을 거둔다면 정말 공정하고 투명하게 세금을 걷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국세청 건물 앞의 광장에 서서 그 웅장한 건물을 천천히 바라봤다. '내가 낸 세금이 모두 저곳으로 흘러 들어갔구나'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국세청 건물로 걸어가서 유리로 된 벽면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국세청 신축 건물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그의 얼굴은 까칠까칠했다. 그는 입을 벌려 이빨 사이에 고춧가루 낀 것이 없는 지 찾아보았다. 고춧가루는 없었다.

그는 국세청 앞의 광장에서 이제 뭘 해야할지 혹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니 참 이상하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종로 5가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라고 쓰여진 옷을 입은 한 사내가 그에게 다가와서 "심판이 가까워왔습니다. 제발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라고 말하며 그에게 천국 가는 전단지를 건네 주었다. 그는 얼떨결에 그 전단지를 받았다. 전단지에는 하늘로 재림하는 예수의 그림이 담겨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사탕 두 개가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그는 천국 가는 전단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사탕 두 개를 입 속에 넣고 천천히 빨아먹었다.

그는 10분 뒤에 종로 5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제 뭘 할 것인가. 혹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종로 1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종로 1가에서 종로 5가를 다섯 차례나 왕복했다. 어쩌면 더 많이 걸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국세청 앞에 도착할 때마다 거대한 통유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혹은 뭘 할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싶은가를 자신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종로 1가에서 종로 5가까지 다섯 차례나 걸어다니면서 생각을 해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갈 곳이 없었다. 또한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너무나 바빠서 갈 곳이 없었고, 너무나 바빠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했으며, 또 너무나 바빠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시간을 내지 못 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그동안 너무나 바빴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 비로소 시간이라는 게 주어졌는데 왜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할 일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그는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다시 종로 5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을 지나고 금강제화를 지나고 탑골 공원을 앞을 지나가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탑골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탑골 공원에는 땅바닥을 쪼고 있는 비둘기와 몇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노인들이었다. 노인들 중 몇은 등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냥 있었다. 노인들은 늙은 코끼리처럼 천천히 눈을 껌벅거리면서 정말로 그냥 서 있거나 그냥 앉아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특별히 무엇을 하지도 않은 채 단지 지팡이를 짚고 그냥 앉아 있거나 지팡이를 짚고 그냥 서 있었다. 그는 모두가 "죄송해요. 요즘은 너무도 바빠서 말이죠." 라고 말하는 이 속도감 넘치는 시대에 이렇게 느릿느릿 움직이는 곳이 있다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노인들은 담배도 아주 천천히 피웠는데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 내뿜는데 거의 10초도 넘게 걸리는 것 같았다.

담배를 피우는 노인들을 보자 그도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니 평소에 그는 하루에 한 갑 정도의 담배를 피우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회사 휴게실에서 담배를 태우고 난 다음 여지껏 단 한 대의 담배도 피우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기 위해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양복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여전히 라이터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회사 휴게실에 라이터를 두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를 하나 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를 새로 사는 것은 어쩐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집에는 족히 백 개도 넘는 라이터가 있었다. 부장은 업무가 일찍 끝나는 날마다 회사 직원들을 데리고 레벤 호프와 비비안 룸 단란주점에 갔다. 그때마다 레벤 호프 사장은 그가 분명히 라이터가 많이 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리. 우리 가겐 이 대리 없으면 쓰러져. 그런데 이깟 라이터가 문제야. 그리고 단체 손님이나 접대 예약할 때 필요하잖아. 전화해주면 서로 좋지." 하고 말하면서 그의 양복 주머니에다가 라이터를 넣어 주었다. 비비안 룸 단란주점의 마담은 "이 대리님은 재미없게 부장님하고만 같이 오더라. 그러지 말고 젊은 분들끼리도 모여서 오고 그러세요. 서로 나이가 맞아야 애들이 스페셜로 서비스를 들어가지." 하고 말했다. 그리고 뇌쇄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안주머니 깊숙이 개인전화번호가 들어있는 은밀한 라이터를 넣어주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접대 예약용 라이터와 은밀한 라이터가 무려 백 개나 있었다. 잘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어쩌면 백 개가 넘을 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갈비집, 대리운전, 일식집 등등에서 받은 수많은 라이터가 있었으므로 사실 그는 평생 쓰고도 남을, 어쩌면 웬만한 사무실 하나정도는 폭파시킬 수도 있을 만큼 많은 라이터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라이터가 그렇게 많은데 고작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다시 라이터를 사는 것은 건전한 소비 행위가 아니며 또한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물품이 공급되어야 하는 효율적인 유통 경제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이제 실업자 신세가 되었으므로 작은 것이라도 절약해야 했다. 그는 라이터를 하나 사는 것보다 담뱃불을 잠시 빌리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탑골 공원에는 그가 담뱃불을 빌릴만한 사람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공원에는 노인들과 비둘기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이 젊은 사람이 노인들에게 담뱃불을 빌린다는 것은 어쩐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노인들 외에는 비둘기밖에 없었는데 불행히도 비둘기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라이터를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할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결국 그는 젊은 사람이 나이 드신 분에게 담뱃불을 빌리는 행위가 분명 예의 바른 행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노인들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고 사정을 이야기한다면 그렇게까지 무례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수대 옆 벤치에 한 노인이 흡사 독립 운동 시절의 김구 선생이 입었을 법한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인의 모습은 너무나 근엄해 보여 정말 아직도 어디선가 독립 운동을 하고 있는 노인처럼 보였다. 그가 노인 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그는 약간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비둘기들이 점령하고 있는 식수대로 가서 손을 살짝 저어 새들을 쫓아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비둘기들은 잠시 날아올랐다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노인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노인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는 이석만이라고 합니다." 하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연이어 그는 "죄송하지만 제가 어르신께 무례한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난데없이 "일 없어. 나는 물건 안 사." 하고 말했다. 그는 노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 했으므로 "예? 무슨 말씀이신지?" 하고 물었다. 노인은 "지금 나에게 물건 팔려고 그러는 게지?" 하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다시 "자네 건강 식품이니, 물리 치료 기구니 그런 거 팔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다시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그럼 뭐야?" 하고 물었다. 그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제가 할아버님께 담뱃불을 좀 빌리자고 하면 크게 실례가 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저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그의 말을 잘라서 "나는 라이터 있어! 좋은 라이터야. 우리 아들놈이 선물해준 거" 하고 말했다. 그는 다시 "예?" 하고 물었다. 노인은 "나는 라이터 있다고. 지금 나한테 라이터 팔려고 하는 게지?" 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럼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면 어르신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은 "정말 물건 팔려는 게 아니야?" 하고 재차 물었다. 그는 자신은 정말 물건을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물건을 팔려는 게 아니면 끝까지 들어 줄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어르신에게 담뱃불을 빌리려고 했는데 그것은 큰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먼저 말했다. 왜냐하면 어르신처럼 연세가 지긋하신 분에게 제가 담뱃불을 빌린다는 것은 젊은 사람이 해야 할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립군 스타일의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프라이데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연세가 많으신 분에게, 특히 어르신처럼 인품이 고매해 보이는 분께는 절대 담뱃불을 빌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어서 자신이 할아버지의 인품을 고매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노인은 여전히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얼마나 라이터가 많은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 많은 라이터들은 자기가 원한 바가 아니며 그가 분명히 싫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레벤 호프 사장과 비비안 룸 단란주점의 마담이 막무가내로 자신의 양복 상의에 넣어주었기 때문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라이터가 무려 백 개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렇게 라이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에게는 담배는 있지만 라이터가 없으며, 그래서 고작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하나 더 산다는 것은 건전한 소비 생활과 효율적인 유통 경제의 측면에서 옳은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다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론 자신처럼 젊은 사람이 어르신에게 담뱃불을 빌린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그것은 순전히 지금 탑골 공원에 노인들과 비둘기밖에 없는데다, 비둘기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 자신이 어르신에 대한 공경심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자네가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투철하다 뭐 이거야?" 하고 물었다. 그는 좀 답답하고 한편으로 짜증스러웠다. 그는 간단하게 말하면 어르신에게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 담뱃불을 좀 빌리고자 함이었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한 3초 정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그냥 라이터만 빌려주면 되는 거야?" 하고 말했다. 그는 좀 어리둥절했지만 자신이 했던 긴 이야기는 라이터를 빌리기 위함이었으므로 "예"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인이 그에게 라이터를 빌려주면서 "이 사람아 그러면 와서 불 좀 빌려주십시오 하고 간단히 말하면 되지 뭐가 그렇게 복잡하나?" 하고 말했다.

그는 얼떨결에 라이터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곧장 담배에 불을 붙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노인에 대한 공경심을 이야기한 그가 노인 옆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이율배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노인에게 저 쪽에 가서 불을 붙이고 오겠노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냥 여기서 피면 되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그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는 식수대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서도 노인이 보였으므로 그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다시 한 개를 더 꺼내 불을 붙여 피웠다. 연속해서 두 대의 담배를 피우자 그는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속에서 구토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갑자기 어지러워졌으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담뱃불을 발로 비벼 꼈다. 그는 한참동안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탑골 공원 위를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문화적인 비둘기들을 구경했다. 그는 비둘기는 저리도 자유로운데 왜 이 도시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둘기들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는 이제 구토도 현기증도 사라진 것 같았다.

그가 라이터를 돌려주기 위해 노인을 만났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어쩐 일인지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인이 잠시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어 한참동안 기다렸지만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할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노인이 준 라이터는 흔히 쓰는 일회용 라이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노인은 아들에게 선물 받은 좋은 라이터라고 했지만 그가 보기에 노인이 준 라이터는 선물용 고급 라이터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일회용 라이터를 아버지에게 선물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좋은 라이터라고 여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노인의 자유이므로 그것까지 그가 간섭할 일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이것은 그의 라이터가 아니라 노인의 라이터이므로 그는 노인을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는 담배를 세 대나 피우면서 한 시간이나 노인을 기다렸지만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아주 가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자 탑골 공원에 있던 많은 노인들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곧장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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