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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소설적 교란 - 현진현


2

소설이라는 언어적 공간은 언제나 시공간 감각이 조밀하게 뒤섞여 성립한다. 즉 소설은 시간적 사유와 공간적 사유의 결집체이다. 소설의 공간에서 이미지는 공간적 사유의 기제로서 작용하고, 다시금 시간적 사유의 매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역할은 문학적 형상화에 보다 진일보한 가능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이미지가 소설이라는 소통 양식에 혁명적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며, 서사성을 지닌 예술로서 기능하는 소설의 형식에 대해 그 개념적 재고를 요구하는 단계에 이른 것도 아니다. 단지 이것은 포스트-모던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유 양식에 보다 들어맞는다는 의미에서 서사체계를 좀더 탐미적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는 새로운 언어이다. 이 진술은 이미지가 언어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른다는 표현이다. 아니, 언어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 `이미지는 선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체계인 텍스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장-루이 셰페르의 통찰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어와 결탁하면서, 즉 서술되면서 단숨에 서사 구조를 대체해버리는 이미지를 쉽게 고찰할 수 있다. 김영하의 판타지 서사는 나름의 이미지 구축에 기초한다. 작품의 정조를 아우르는 다비드의 그림 「마라의 죽음」에서부터 등장 인물 `세연'에 투영된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의 이미지는 곧바로 판타지 서사의 형태로 탈바꿈해 드러나며,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사르다나팔의 죽음」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이를 완결짓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설은 거대한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러한 소설 공간의 확장은 회화적 공간 구성과 묘사를 문제삼는 데에서 더 나아가 회화의 `이미지'를 소설적 공간에 투영하여 얻은 소기의 결실이다. `소설은 회화를 포함할 수 있고 어떤 순간에는 그래야만 한다.' 는 언급을 이제는 새로운 관점에서 확대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는 회화 그 자체가 등장하고, 그 그림들은 소설의 진정한 제재이고 주제의식의 출발점이며 도달점이기 때문이다. 이 명화들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단순한 실마리 구실로 그치지 않는다. 소설은 다비드가 그린 한 편의 그림에 대한 읊조림으로부터 시작한다.

1793년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본다. 욕조 속에서 피살된 자코뱅 혁명가 장 폴 마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는 터번처럼 생긴 수건을 두르고 있고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진 손은 펜을 쥐고 있다. 흰색과 청색 사이에 마라가 피를 흘리며 절명해 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정적이다. 어디선가 레퀴엠이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를 찌른 칼은 화면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7쪽) 마치 영화 도입부의 한 장면(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라는 영화의 도입부를 떠올리면 되겠다. 재미있는 것은 그 도입부에서도 레퀴엠이 흐른다는 사실이다.)을 연상케 하는 이 대목은 어떤 그림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화자의 의식을 거친 채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있는 그림의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화자의 내면에 대한 이미지화로서 화자의 문체를 결정짓는 데 치중하고, 나아가 소설의 서사구조에 개입한다. 이렇게 기능하는 그림의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소설의 주제의식에 다름아닌 괴괴하게 가라앉은 소설적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그림의 이미지는 곧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소설적 공간의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는 서사적 공간을 거쳐 다시 이미지로 회귀한다. 결국 이미지의 중층화이다. 소설은 다시 한 편의 낭만주의 회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끝나간다. 「사르다나팔의 죽음」. 성도의 함락을 눈앞에 둔 바빌로니아의 왕이 무사들을 시켜 그의 왕비와 애첩들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한 건장한 무사가 냉정한 표정으로 몸을 한껏 젖힌 전라의 여인을 등뒤에서 껴안고 위로부터 수직으로 칼을 내리꽂고 있다. 가로 5미터, 세로 4미터의 화면은 살육의 잔치로 가득하다. 화면 왼쪽에는 왕의 애마를 끌어내는 흑인 무사의 모습이 보인다. 말도 곧 살해될 운명에 처해 있다. / … 마지막에 사르다나팔 왕을 발견하게 되는 관람자들은 숨을 죽이게 마련이다. 냉정하게 자신의 패배를 지켜보는 왕과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대조가 이 그림의 백미이다. …(137쪽)

이 그림은 자살 안내업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매개이다. 화자는 서사의 욕구를 머금은 채 그림의 이미지를 강조해낸다. 흥분과 격정을 가라앉힌 채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며 자신의 죽음까지를 기다리는 화자의 태도는 이 그림을 통해 드러난다. 화자는 결국 유디트가 했던 말을 독백조로 바꾸어 반복하며 자신의 죽음 혹은 삶을 권태롭게 바라본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141쪽) 여기에다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는 등장 인물 `세연'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첫 등장에서부터 `유디트'로 호명되는 그녀는 마치 「사르다나팔의 죽음」에서 묘사된 `몸을 한껏 젖힌 전라의 여인'처럼 죽음에 근접해 있으면서도 충분히 관능적이다.

… 여자는 그제서야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정염이 채 가시지 않은 눈동자에선 푸른빛이 났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잠든 틈에 목을 잘라 죽였다는 고대 이스라엘의 여걸 유디트. 클림트는 유디트에게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를 거세하고 세기말적 관능만을 남겨두었다.(20∼21쪽) 유디트는 「유디트」처럼 관능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이 소설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관능적 장면들은 소통에 절망한 자들의 공허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특히 스스로가 선택한 죽음 앞에서의 관능성이라는 설정은 소통이 지닌 비극적 운명의 아이러니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이 하나 하나 흩뿌려지는 것은 아니다. 김영하의 전략에 있어서 이미지는 서사와 균형을 이루는 이미지들로서 하나의 서사 체계에 기여한다. 이 이미지는 새로운 종류의 서사적 사유를 가능케 한다는 의미에서 `3차원에서 4차원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전략적 이미지로서의 서사적 이미지'이다. 근본적으로 시간의 제약 속에서 표출되는 이 이미지는 곧 서사적 상상력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이 이미지는 곧장 새로운 서사의 체계로 우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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