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당선작
2018
2017
2016
2015
2014
2013
2012
2011
2010
2009
2008
2007
2006
2005
2004
2003
2002
2001
2000
1999
1998






대중문화의 소설적 교란 - 현진현


1

소설의 제명으로 쓰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진술은 마치 상업광고의 문안처럼 인상적이다. 만약 이 진술을 광고 문안으로 쓴다면 어떤 광고에 어울릴까. 소설 속의 주인공인 `자살 안내업자'의 슬로건에나 쓰일 법한 이 도발적 진술의 성격은 이 진술이 담보하고 있는 소설의 형식을 고찰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재미있게도 현대 소비사회에서 `광고'가 파생시키는 갖가지 언설들은 김영하의 장편을 하나의 대중적 매체로 이해하기에 충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실제로, 장 보드리야르가 행한 대중매체문화 분석, 특히 `팝 아트'와 `광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형식적 특성에 가해질 수 있는 `소설의 형식에 대한 분석'과 닮아있다. 나아가,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마샬 맥루한의 명제를 염두에 둔다면 `이미지'와 `가상 현실', 그리고 `혼성모방'이라는 분석적 주제는 고스란히 김영하의 소설쓰기가 기획한 미적 측면과 일치한다. 팝 아트의 성격, 가령 `사실주의가 아닌 기호 시스템'은 그대로 `소비의 논리'로 옮겨와 `광고'에 이른다. 광고의 문안은 모든 사람의 동의를 강요하고, 사람들은 이 `기호 조작의 몽타주'에 의해 메시지의 전달을 깨닫지 못한다. 미디어 자체가 바로 메시지임을 무의식중에 해독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형식적 기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사실주의가 아닌 이미지에 의한 가상 시스템'은 그대로 소설의 메시지일 수 있고, 죽음을 종용하는 듯한 소설의 제명은 `소비의 형식'이 아닌 `사유의 형식'을 제공하는 하나의 매체에 대한 역설적 언급일 수 있다.

그렇지만 현대의 문화적 특성이 광고와 문학을 하나의 매체로 묶어준다 할지라도 그 변별성에 대한 기대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더군다나 `문학의 종언'을 운운하는 이즈음에 소비의 논리가 문학의 논리에 다름없다면 그 낭패감은 문학의 폐기에 대한 올곧은 실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고급 문학 혹은 고급 예술의 기반이 축소해가는 문화는 결국 하나의 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거기에다 소비의 논리가 지배하는 문화적 환경에서 빚어지는 예술의 대중성은 저급한 통속성을 부채질하기 마련일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대중성에서 통속성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아슬아슬한 위치에 자리하고서 현대의 문화적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먼저 `대중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대중문화적이다. 그리고 `이미지', `가상 현실' 등 새로운 형식에의 시도를 통해 대중매체적이다. 그러나 `문학은 작가와 독자의 소통 수단'이라는 귄터 발트만의 말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이 `대중성'의 근간에 `소통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문화적 관습의 하나로서 문학은 새로운 문화에 응당 새로운 관습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특히 형식의 새로움을 통한문학적 소통에의 노력은 마치 전통처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변전하는, 인간처럼 유한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서사적 질문에 다름아니기에,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일단 긍정적이다. 이 시도들은 또 `죽음(자살)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소설 형식적 대답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인상적인 소설의 제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소설의 제재가 `죽음(자살)'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곧 `삶'에 대한 기본적인 알레고리이기에 소재의 파격성에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제명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우회적으로 환원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 철학적 물음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물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의 물음이 `인간은 소통이 가능한가'라는 변용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뒤의 것은 `문학은 소통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간다.

이 모든 물음들, 엄밀히 말해서 `현대'에 이르러 부각되는 이 물음들은 바로 소설의 형식에 회귀하고, 그 형식들과 소설의 치밀한 구성은 소설이라는 매체의 특성으로서 독자의 무의식에 `의미'를 전달한다. 이 `의미'는 `소비의 논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문학의 논리'이자 `소통의 논리'로 부상한다.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직업은 `자살 안내업'이다. 자살의 욕구를 가진 자를 찾아내어 스스로를 죽이도록 도와주는 일, 그것이 바로 그의 직업이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창작을 하거나 살인을 하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라고 간명하게 확신하는 그는 고객의 자살을 도와주고 그것을 소재로 글을 쓴다. 그가 컴퓨터에서 불러낸 두 편의 소설은 두 명의 여자고객에 관한 것이다.

`유디트'라는 여자가 있다. 끊임없이 어디론가 떠나고자 하는 그녀는 애인(K)의 형인 C와 관계를 가진다. C와 함께 동해안으로 떠나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멀리 다녀왔는데도 바뀐 게 없" 다. 또한 `미미'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의 직업은 행위 예술가이다. 죽은 유디트의 재생처럼 보이는 그녀는 행위 예술을 통해 타인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소통의 형식에 집착함으로써 삶의 공허함에 역행할 수는 없다. 비디오 예술가인 C는 미미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고자 하지만 결국 `소통의 욕망'만을 복제할 따름이다. C와는 표면적으로 대립적 성격으로 구분된 K 또한 죽음을 향한 질주를 통해 삶의 불가역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두 여자의 이야기를 둘러 싼 두 액자의 사이에 등장하는 `에비앙'을 마시지 않는 홍콩 여자, 그녀 또한 일방적 소통에의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할 뿐, 소통의 욕구를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

자살 안내업자, 그는 `작가'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 그는 사명감과 고통 속에서 타자를 사랑하며 연민한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그는 타인의 죽음을 지켜본 뒤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다.

두 편의 독립적인 이야기에 겹쳐서 등장하는 C와 K, 그리고 `미미의 이야기' 속에 스치듯 등장하는 자살 안내업자를 보건대 이 소설은 언뜻 『펄프 픽션』이나 『중경삼림』의 짜임새를 흉내낸 듯한 영화적 감각이 내비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짜임새는 보다 복합적이고 독특하다.

`Ⅰ. 마라의 죽음, Ⅱ. 유디트, Ⅲ. 에비앙, Ⅳ. 미미, Ⅴ. 사르다나팔의 죽음'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자살 안내업자의 시점으로 된 Ⅰ·Ⅲ·Ⅴ장, 그리고 자살 안내업자가 쓴 두 편의 소설로서 전지적 시점으로 쓰인 Ⅱ·Ⅳ의 두 장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독자는 소설을 다 읽기까지 두 개의 액자 속에 마련된 가상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그러나 액자의 바깥은 액자 내의 설정보다 가상의 밀도가 더 높다. 독자는 맨 처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온전히 가상인 공간에 발을 디디지만 그 공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두 개의 액자로 들어가는 순간, 반사적으로 `리얼함'을 느끼고 다시 액자의 밖으로 나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기획한 서사적 전략의 독특함은 `열린(offen) 액자 두 개가 나열된 연작적 액자소설(zyklische Rahmenerz hlung)' 을 기획함으로써 일단 어느 정도 성공적인 셈이다.

이러한 소설적 짜임새에서 등장 인물들의 소통 가능성은 거의 절망적이지만 그 절망이 소설쓰기라는 소통 지향의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은 우의적이다. 이 우의성은 문학의 운명에 대해 흥미로운 논변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살 안내업자의 소설쓰기는 김영하의 소설쓰기로 은밀하게 확장될 수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명은 이러한 태도에 대한 의미심장한 진술임에 틀림없으며, 이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이 시대 문학의 운명에 대한 한 편의 착잡한 우화처럼 보인다.

 

 

Copyright 2002 donga.com. E-mail.sinchoon@donga.com
Privacy poli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