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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승강기는 칠 층에서 오래 머무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일 층에 부려 놓는다.변기 청소용 솔 때문에 비닐 봉투가 곧 터질 태세다.조심스럽게 승강기에 올라 닫힘 버튼을 여러 번 누른다.이중으로 된 승강기 문은 거드름을 피우며 천천히 닫힌다.두 개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누군가의 손이 안으로 쑥 들어온다.문이 다시 열리고 좁은 문 사이로 팔뚝과 어깨,머리가 차례로 들어온다.왼쪽 다리가 완전히 승강기 안으로 들어왔을 때에 문은 덧없이 활짝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남자는 등을 돌린 채 가쁜 숨을 내뱉고 있다. 남자의 등이 위아래로 심하게 움직였다.

승강기가 움직이지 않는다.승강기는 여전히 일층에 머물러 있다.남자와 나는 아무 층수도 누르지 않고 서 있었던 것이다.짐을 한 손에 모아쥐고 팔 층 버튼을 누른다.'8'자에 녹색 불이 들어오는 동시에 남자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누른다.순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비닐 봉투가 찢어지며 물건들이 쏟아진다.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중심을 잃고 핏물이 흐르는 고기 팩 위에 주저앉고 만다.한 손으로 물건들을 감싸안고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다.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나머지 물건들을 내 가슴에 올려 준다.

금속성 소리와 함께 승강기 문이 열린다.승강기에서 내려 나는 오른편으로 남자는 왼편으로 방향을 돌려 걸어간다.문 앞에 물건들을 쏟아내고 고개를 돌려 남자가 간 곳을 본다.남자는 나와 거의 같은 속도로 걸어 복도 끝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찾고 있다.이쪽 복도 끝이 806호이므로 남자의 집은 801호다.남자와 나는 승강기를 타고 항상 같은 층에서 내리고 거의 비슷한 거리까지 걸어가서 혼자 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갔을 것이다.승강기를 축으로 반을 접는다면 남자와 나는 한 곳에서 만난다.골리앗거미의 보각처럼.

문득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아름다운 얼굴이었던 것 같다.쇼핑한 물건들을 발로 밀어 넣고 문을 닫는다.바닥에 뒹구는 고기 봉지에서는 핏물이 새어나오고 있다.허기가 진다.당장이라도 자리에 주저앉아 비닐 포장을 뜯고 맨손으로 날고기를 집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들짐승처럼 입가에 피를 묻힌 채 허겁지겁 먹을 것을 해치우고 포만감을 느끼고 싶다.

그런데 엄마가 정말 현파스님을 죽였을까?

오후 두 시.집을 나와 한강대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길은 두텁고 긴 힘줄처럼 도시 한 가운데로 뻗어 있다.공중에서 도시를 내려다본다면 껍질을 벗긴 사람의 몸체 같을 것이다.몸의 구석구석 뻗어 있는 힘줄과 핏줄의 왕성한 전력질주.

스님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미륵암에서의 새끼 고양이를 기억해낸다.미륵암을 배회하던 수많은 고양이떼.마당이나 법당까지 함부로 나다니는 고양이들이 무척이나 두려웠었다.그러나 고양이들은 아름다웠다.그 자그마하고 부드러운 몸 속에는 온갖 아름다움이 용수철처럼 휘어져 숨어 있는 것 같았다.여리고 따뜻하고 조금은 메마른.스님은 때로 신도들이 가져온 생선대가리나 고깃덩어리를 요사채 앞에서 고양이들에게 던져주곤 했다.그때마다 눈빛을 번득이며 육질의 맛을 느끼고 있는 고양들을 나는 시기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느날 땔감으로 쓸 나무더미 사이에 이제 막 낳아 놓은 새끼 고양이를 보게 되었다.온기가 느껴지는 새끼 고양이 몸에 손을 대 보았다.순간 어디선가 어미 고양이가 기습을 가하듯 나타나 등을 굽히며 내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나는 새끼 고양이를 들고 뛰었다.산아래 마을에 도착해 공중변소에 몸을 숨겼다.내 손에 들려 있는 고양이는 작고 여리고 아름다웠다.새끼 고양이를 변기 속으로 집어던지기까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었다.구더기가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는 변기통 속으로 새끼 고양이가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나는 전쟁기념관 앞에 서 있다.서둘러 입장권을 끊고 기념관 안으로 들어간다.기념관이나 박물관이 대부분 그렇듯이 시대별로 구성된 각 방에는 발굴되었거나 보존된 유물들이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다.자세히 보면 그것들은 플라스틱이나 밀랍으로 아주 잘 만들어진 모형임을 알 수 있다.유리관 속에 전시된 무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스님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한다.

명적(鳴鏑)이 활시위를 떠나 새소리를 내며 심장을 관통하고 칠지도(七支刀)의 일곱 날이 내장을 갈가리 찢는다.말의 전진을 막기 위해 뿌려 놓았다는 철침 모양의 마름쇠가 스님의 발을 찔러 피가 솟구친다.빨갱이를 잡던 45구경 권총이나 경기관총 심지어 탱크까지 각종 무기들을 써 보지만 어느 것 하나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좀더 강하면서 잔인한,증거가 남지 않는, 엄마가 할 수 있는 그런 방법.

나는 복도 귀퉁이에 있는 귀주대첩 기록화에 발목을 붙잡힌다.나의 시선을 끈 것은 강감찬이라는 이름이 주는 억세고 포악한 어감이었다.그러나 그림이 주는 느낌은 포악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다.바람을 맞아 한 방향으로 몸을 뒤채는 풀들을 그린 풍경화.창을 들고 달려가는 병사들과 콧김을 뿜으며 돌진하는 말들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바람결을 느끼며 휘파람을 부는 풀숲처럼.바람에 날리는 갈기는 더 없이 부드러워 보였고 죽음을 마주한 병사들조차 무용을 하듯 행기가 있다.인정할 수 없다.내가 생각한 전쟁은 이런 수묵화로 그려진 풍경화가 아니라 원색의 고통과 절규로 점철된 사실화다.그러나 전쟁에 반드시 있어야 할 피와 살상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어지럼증이 인다.속이 미식거리고 귀울음이 일어나는 것 같다.나는 허둥거리며 출구를 찾는다.그러나 관람방향을 표시해 놓은 형광 화살표는 관람객의 행보를 규정하고 있다.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기념관 내부의 모든 방을 통해야만 가능하도록.나는 거인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난쟁이처럼 버둥거리며 방들을 통과하다가 마지막 기회를 잡는다.전쟁 체험실.

입장권을 새로 끊고 철로 된 체험실 문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입장시간을 기다리는 아이들 손에는 저마다 수첩이 들려 있다.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문이 열리고 매표원이 나왔다.매표원은 꼼꼼하게 표를 받으며 사람들을 안으로 안내했다.서둘러 들어가는 사람들 뒤에 처져 매표원에게 표를 건넨다.매표원은 받은 표를 한 손에 모아 쥐고 다른 손을 내밀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고개를 들어 매표원을 올려본다.빳빳하게 다려진 유니폼,날이 선 칼라 사이로 선을 드러낸 하얀 목덜미.매표원은 801호 남자다.내 손에서 표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진다.남자가 허리를 굽혀 표를 줍는다.나는 남자의 시선을 외면한 채 재빨리 안으로 들어간다.체험실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둡다.

어둠 속에서 포성이 울린다.화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발 밑에서 불이 번쩍거리고 머리 위로 총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군인들의 고함과 비명,지원을 청하는 무전 소리,작전을 지시하는 상사의 외침….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어둠 속에서 문득 서늘한 바람이 느껴진다.발작의 전조증상과 같은 미세한 전율.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맹수의 움직임과 같았다.은밀하고 긴장된 숨소리.뒷덜미에 소름이 돋는다.두터운 귓불에 뜨뜻한 입김이 느껴진다.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고 빨라진다.포격이 멎는다.동시에 숨소리도 멎는다.바람이 부는지 옷깃이 휙 날린다.빨간 조명이 켜지고 아이들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밀치며 재빠르게 달려나간다.나는 붉은 방을 두리번거리며 밖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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