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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의 역사, 그리고 우울한 죄의식
- 김소진 소설론 -
   - 오윤호(28)


김소진이 소설을 발표하던 90년대는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가 무너지고 사회전반에 걸친 탈정치화가 가속화되었던 시대였다. 그렇다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것일까? '집단적 사유 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가면을 바꿔쓴 이데올로기는 대중 매체를 통해 환기되면서 여전히 우리 삶을 장악한다. 정치적 공약들은 국민국가의 한 모형을 제시하는 듯 했고, 자본주의의 상품화된 기표들은 물질적 풍요을 약속하는 듯 했지만, IMF를 통해 그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는 또다른 허위의식이었음이 밝혀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적 실존과 정치 사회적 진보에 대한 문제가 정당한 공론의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90년대의 작가들은 그 화려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과 현실 정치에 대한 비관주의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일군의 작가들은 삶의 역사를 배제한 채 '내면'으로 향하거나 유교주의, 신비주의 등 낭만주의 계열의 글쓰기를 지향한다. 그러나 이때의 '내면'이란 정치적 좌절의 산물이었고 억압적 정치 이데올로기와 타협한 결과에 불과하다. 결국 사회의 담론과 가치관에 휩싸이지 않으려는 이들의 현란한 욕구는 사회적 존재인 개인을 신비화하거나 자아분열의 정신병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와중에, 김소진은 이념의 시각에 의해 간과되어온 '사소한 개인'을 당대 현실 속에, 역사 속에 복원해 놓으면서 민중의 삶과 목소리를 통해 드러난 사회와 역사를 재현한다. 그의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역사에 대한 상투적 인식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설쓰기를 통해 '근대적 주체'가 가지게 되는 새로운 역사서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김소진의 역사의식은 표현 매체인 언어와 구성방식인 회상 기법에 잘 반영되어 있다. 우선 그의 소설은 언어 사용에 있어 섬세하고 독특하다. {고아떤 뺑덕어멈}, {장석조네 사람들}과 같은 소설집에서 사투리나 기층 민중어를 사용하는 특유의 어휘 감각은 그 말을 사용하는 이들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장석조네 사람들}의 경우, 서울의 미아리 산동네라는 공간이 환기하듯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삶을 재현하며 팔도의 사투리를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다. '육화된' 언어 사용은 그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반역사주의적 태도와 관련이 있는데, 역사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글쓰기 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소설 구성에 있어서도 영향을 주는데, 회상을 통한 글쓰기는 실체로서의 역사를 환기하면서 역사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첫 작품집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부터 마지막 작품집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작품이 현재의 '나'의 회상을 통해 기억 속의 과거를 재현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이러한 '사소한 개인'의 기억 혹은 회상은 '사실에 대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구성으로서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소진의 소설은 회상의 글쓰기와 반성적 역사의식이 절묘하게 결합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역류(逆流) - 역사에 사로잡힌 영혼들

김소진의 소설이 지식인 소설의 한 유형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는 현실을 보는 눈, 역사를 해석하는 시선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반성적 역사의식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의 '사건' 혹은 '역사'를 전도된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 관계 속에서 그 계급적 이해를 역전시켜 보면서 다양한 시각과 입장들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가령 [열린사회와 그 적들] 등에서는 하층민, 도시빈민들이 바라보거나 경험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서술하며 '지식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경험으로서의 역사', '기억 혹은 회상을 통해 드러난 역사'에 대한 능동적 해석을 요구한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 즉 단선적 인과적 역사를 거부하고 역사의 반복과 재생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키작은 쑥부쟁이], [쥐잡이]에서 회상을 통한 서술 속에서 역사적 사건들(6.25 전쟁, 70년대의 궁핍, 80년대의 학생운동)을 공간적으로 중첩시켜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김소진은 '일회적인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중첩되어 기능하는 역사들'를 해석한다.

우선 첫 번째 시각이 잘 나타나는 작품은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제목을 패러디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다. 이 작품은 열사의 시체를 지키면서 백병원에서 밤을 세우는 '밥풀때기'와 지식인, 언론의 대립관계를 재현한다. 대책위 사람들과 밥풀대기들은 검·경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처음엔 동지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행동을 같이 하지만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은 그들 사이에 반목과 대립을 낳는다. 그 반목과 대립은 '열린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당신들 밥풀때기들 때문에 민주화 시위가 일반 시민들한테 얼마나 욕을 먹는 줄이나 아쇼? 당신들 도대체 누구, 아니 어느 기관의 조종을 받고 이런 망나니짓을 하는 거요?"
병원 현관 쪽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외팔이 강종천 씨가 웬 사내와 드잡이를 하고 있었다. 병원 마당의 모든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그래 우리는 밥풀때기다. 근데 당신이 뭐 보태준 거 있냐고 썅."
"당신들이 뭔데 초대되지도 않은 곳에 끼여들어서 감 놔라 배 놔라 판 깨는 짓거리를 하냔 말이오."([열린 사회와 그 적들], 72면)

'입성이 누추하고 행동이 거친' 밥풀때기들은 열사를 위한 투쟁의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밥풀때기들, 사수대 학생들, 일반 시민들, 대책위 관계자들, 백병원 환자들, 그리고 그들 앞에 방패를 두른 전경들이 공존하는 공간을 사회라고 말할 때, 그들을 시민이라 칭하고 사회라 칭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계급이나 종족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신화가 더 이상 개인에게 굴레가 되지 않고 개개인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열린 사회와 그 적들], 86면)이 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대책위 사람들은 이 투쟁의 공간 속에서 관념적 이성의 실천을 꿈꾼다. 이때의 이데올로기는 '특정사회 속에서 정치적 계급적 신념 체계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칼 포퍼가 말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된 사회 속에서 밥풀때기들이 소외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대책위가 주장하는 투쟁과 지향하는 사회는 밥풀때기를 위한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의 조직이 꾸며지고 그에 걸맞는 규칙과 체계'를 세우면서 그들은 억압을 동반한 또다른 배제의 정치권력, '이데올로기의 신화니 이성적 원리니 하며 거창하게 빚어내는 사회'를 생산해낸다. 이러한 자기 모순을 내포한 실천은 공허한 흥분에 지나지 않고 거짓진실을 위한 과장된 위장에 불과하다.

열사가 이데올로기의 표상일지 모르지만, 밥풀때기들은 그들만의 삶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브루스 박은 자칭 '섹스폰의 명수'로 밤무대 악사로 일하는 사내이고, 표천식은 남의 무덤을 파 염낭 주머니를 훔친 범죄자고, 얼룩이 성님이라고 불린 전을룡은 은평구 일대에서 고물 줍기를 하는 사람이다. 강씨는 한 손을 '프레스 밥'으로 내어준 댓가로 받은 보상금을 노점상 일제 단속에 몽땅 쓸어 넣었고 그의 아내는 도망간 상태다. 거창한 민주화니 열린 사회를 외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는 그들이 감당해야 할 사적인 역사가 있고 삶이 있다. 그들이 김열사 추모 투쟁에서 원했던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 물질적 풍요와 평등'이 아니라, 도망 간 아내를 찾는 일, 하룻밤 편히 등을 붙이고 따뜻한 한끼의 밥을 먹는 것, 그럴듯한 직장을 구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렇듯 한스럽기만 한 밥풀때기들의 역사는 구호와 주장이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투쟁의 현장에서 더욱 애절하게 들린다.

……질기디 질긴 잠꼬대를 푸닥지게 쏟아냈다.
"저놈 잡아라……적이다 적……난 시민이야……문 좀 열어 달라고……나 좀 ……헉헉……내게도 열어줘……아으……"
"제발 그만둬, 이 바보 멍충이야. 열리긴 뭐가 열렸다는 거야. 다 닫혔어, 다 닫혔다구."([열린 사회와 그 적들], 82-83면)

아는 자에게만 의미가 있는 '열려있는' 사회를 진정한 자유 민주주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열린 사회라고 말하면서도 내부로부터 견고하게 닫혀있는 사회는 밥풀때기들에게는 또 하나의 억압으로 다가온다. 김소진은 비판적 시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급적 관계를 폭로하려 했지만, 피지배계층 내부에서도 발생하는 보다 견고한 권력적 계급 관계를 확인하고 말았다. 이데올로기가 은폐하려고 했던 것은 지배-피지배의 권력관계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 사람들 마다의 고유한 삶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김소진의 또다른 역사의식을 환기하는데, 그것은 회상을 통해 과거를 현재화함으로써 회상을 수행하는 주체가 하나의 역사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초기의 '단 한마디의 현재형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과거형 일변도의 글쓰기'는 그의 주요한 서술 기법이며 이러한 문체적 특질은 기법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 현대사의 깊은 굴곡을 꼼꼼히 훑고 지나는 도구가 된다. 소설 속에 재현된 '6.25', '80년대의 민주화운동', '70년대의 유년' 또한 생경한 구호나 이념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소한 한 개인'의 기억을 통해서 전해지기 때문이다. 김소진 소설에서 기억하기는 곧 글쓰기이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 기억하고, 기억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추적한다.

[쥐잡이]의 주인공 민홍은 민주화 투쟁를 경험했으며 90년대를 살고 있다. 한 장의 사진과 쥐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경험했던 6.25 전쟁에 얽힌 이야기를 회상하고 다시 경험한다.

초침 소리는 벽시계 옆에 매달린 틀사진 속의 아버지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막상 영정에 쓸 사진을 한 장도 구할 수 없어 몹시 당혹스러웠다. 육십하고도 세 해를 넘겨 살았던 삶이건만 아버지는 그 흔한 사진 한 장 이땅에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쥐잡기], 11면)

주인공 '나'의 아버지는 김소진의 첫작품에서부터 죽은 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기억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벽에 붙어 있는 아버지 사진은 거울처럼 '나'의 자아인식의 매개로 보이는데, 민홍은 영정 사진을 보면서 자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부재하는 실체인 아버지를 다시-경험한다. 기억의 문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사진은 '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던 흑백 증면사진'을 확대한 영정사진이다. 사진 속에서 '조붓한 공간 속에 갇혀 겅성드뭇한 대머리를 인 채 움펑 꺼져 대꾼한 눈자위로 방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는 무엇에 놀랐는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쥐잡이], 12면) 사진이 단 한 장밖에 없다는 점, 확대한 것이기 때문에 선명하지 못하다는 점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즉 '나'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흔적이자 그림자만을 기억하고 다시-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실체(아버지)에 대한 흔적은 지각에 선행하여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진을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나'가 말을 하기 시작하고,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운명에 빠지고 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先在하는 역사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는 일이 이야기하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라면 쥐는 현재 민홍의 삶을 위협하는 영악한 짐승으로 제시된다. 일 년 전 아버지의 가게에 나타나 아버지를 극도의 긴장 상태로 몰아가서는 급기야 아버지의 운명을 재촉한 그 쥐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아버지와 쥐의 인연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쥐는 아버지의 삶에 여러 번 개입한다. 6.25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는 거제도 수용소에서 한 마리의 흰쥐를 길렀고, '남이야 북이냐' 하는 이데올로기의 선택 상황에서 '헛것'과도 같은 흰쥐를 쫓아 남한을 의미하는 복도로 내려서고 만다.

내이가 왜 그랬겠니? 여기 한번 나와 있으니까니 못 가갔드란 말이야. 어딜 간들 하는 생각 때문에 도루 못 가갔드란 말이야. 기거이 바로 사람이야. 웬 쥐였냐고? 글쎄 모르지. 기러다 보니 맹탕 헷것이 눈에 끼었는지두. 언젠간 돌아가갔지 하며 살다보니…… 암만 생각해봐두 꿈 같기두 하구…… 기리고 이젠 모르갔어…… 정짜루다 돌아가구 싶은겐지 그럴 맘이 없는 겐지…… 늙으니까니 암만해두.([쥐잡이], 28면)

--모르지 맹탕 헷것이 눈에 보였는지두.
아버지의 늘쩡한 목소리가 귓전에 와 달라붙었다. …… 불끈 쥐어본 주먹에는 연탄집게가 알맞춤하게 들어 있었다. 왠지 느꺼운 감정이 밀려오면서 저만치서 채 시작되지도 않은 겨울의 출구가 보이는 듯했다. 그쪽은 맨발이었다.([쥐잡이], 31면)

아버지는 자신의 선택이 '헛것'과도 같은 흰쥐 때문이었다고 변명한다. 이때, 6.25에 대한 역사화는 이데올로기적 색깔론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흰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실체가 없는 허상, 그것이 그를 몽환적인 상태에 빠지게 만든 것이며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선택을 가장한 정치적 억압에 불과하며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한 상태에서 선택이란 언어도단일 뿐이다. 헛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자조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잔인하게 민중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감정과 이성이 무디어지면서 당신의 선택에 대해 회의가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들 민홍도 쥐와의 대치상황에서 아버지와 같은 경험을 한다.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물건들을 소삭거리던 늙은 쥐를 놓치고 아들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헛것으로 경험한다. 운명처럼 쥐와 대립하는 아버지와 동일시되는 자신을 경험하며 '불끈 쥐어본 주먹' 안에 있는 연탄집게를 떠올린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에게 역사적 경험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며, 더 나아가 어떤 감수성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러한 감수성이 실제하는지 실제하지 않는지도 모르는 '헛것'이라는데 있다. 게다가 민홍이 본 헛것은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하면서 터득한 경험과 새끼를 밴 암컷의 빈틈없는 대담한 산술'마저 가지고 있다. 40여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고 재생되는 '헛것'을 향해 주먹을 쥐고 연탄집게를 거머쥔다고 달라질게 있는가?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며 오히려 세력을 강화해 가고 있다. 억압의 이데올로기는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사소한 개인'의 삶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와 있다. 김소진은 회상이라는 서술행위를 통해 역사 속에 혹은 기억 속에 감추어진 은폐된 억압의 이데올로기와 마주하고 그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지나간 역사를 다시 경험하면서 김소진은 '역사의 진실'을 새롭게 쓰려고 했지만, 이미 그 진실이라는 것을 역사라는 제도 속에서 보고 말았다. 그 결과 그의 강요된 기억은 폭력을 유발하면서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과거의 진실을 왜곡하고 말았다. 이때 과거는 개별적인 삶의 파편으로 제시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편들이 암시적으로 남겨둔 보편적인 역사적 사실과 힘에 의존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이 철저하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사소한 개인'의 삶은 그 역사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상식으로부터 김소진의 역사서술도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기억 상실의 두려움과 잘못된 재현이라는 두 개의 억압에 사로잡히면서 '기억을 쫓아 글쓰기'는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순류(順流) - 실패한 성장의 기원

앞에서 살펴보았듯 김소진 소설에서 기본적으로 회상을 통한 과거 기억하기는 소설 구성의 중요한 전략이다. 이러한 회상을 통해 잠재적으로 망각하고 있던 시간의 순차적 진행이 환기되는 순간, '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의 성장을 경험한다. 이런 점에서 김소진 소설은 성장 소설의 한 변형이다. 이때 성장이란 개인의 내면적 세계가 변모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명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억압해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회상에 의한 역사의 반복적 재생이 '근대적 주체'의 역사적 속성과 이데올로기적 억압를 확인하는 것이다. 즉 성장한 '나'가 반복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유년의 '나'를 대면하는 소설 구성은 실패한 성장 과정에 대한 또다른 재현이다. 이때 '나'의 성장 과정이 보여주는 미숙함과 낯설음은 사회적 존재가 안고 있는 불완전함에 대한 표상이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난 무엇보다 외로움을 느꼈다.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당한 안토니오의 무너진 등이 견딜 수 없어 콧등이 시큰해졌고, 그보다는 무너져내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목격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평생 씻을 수 없는 내면의 상처를 끌어 안고 살아갈 어린 아들 브루노 때문에 나는 혀를 깨물어야 했다. ([자전거도둑], p.107)

김소진이 쓴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렇듯 아버지는 유년의 '나'가 감당해야 할 태초의 서사, 원초적 장면이다. [쥐잡기]에서 아버지는 영정사진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존재하고 그 이미지를 통해 '나'의 모든 서사적 행위는 시작한다. [자전거도둑]에서 '나'는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 속의 父子관계를 통해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역사에 패배한 자로서 '운명의 힘에 끌려다녔'야 하는 무기력한 존재이다. 그의 소설에서 아버지는 무능하고 나태하며 비굴한 존재로 그려진다. [춘하 돌아오다]에서 아들의 중학교 등록금으로 반지를 사 술집여자에게 준 아버지, [개흘레꾼]에서 개에게 물려 사내 구실을 못하는 아버지,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 병들고 무능한 아버지, [자전거 도둑]에서 가난 때문에 아들 앞에서 수모를 당해야 하는 영화 속의 아버지처럼 '소주 두 병' 때문에 아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대면하는 건, 불쾌하고도 슬픈 일이다. 그래서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 병들어 무능한 아버지를 지켜보는 어린 소년의 시선은 연민이 아니라 냉담함과 잔인함에 가깝다. [쥐잡이]에서 민홍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라든지, [자전거 도둑]에서는 강한 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약한 아버지를 닮아가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아버지와의 대립은 역사에 대한 '나'의 저항과 같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권력적 관계가 공시대적인 갈등을 유발한다면, 아버지와 '나'의 불화는 통시적인 역사적 갈등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반복되는 역사와의 불화는 '나'의 성장을 불완전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불완전한 성장은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통해서만 강요된 것은 아니다. 아래의 인용들은 작품 [부엌]에서 주인공이 누나의 목욕장면을 훔쳐보는 장면이다.

기다란 연필심을 틈새에 박아 툭 분질러뜰린 나는 어느새 그 둥근 틈새로 눈알을 박아넣었다.
달거리에 이상은 없지?
엄만……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릎을 모으고 쭈그리고 앉은 누나의 기다란 머리채였다. 양동이에서 바가지로 물을 풀려고 앉았다 일어서느라 머리채가 출렁거렸다. 뽀얀 살결이 눈에 들어왔다. 엉덩이 같았다. 나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부엌], 137면)

육체의 변화 과정 속에서 여자 아이들의 성장이 자신의 초조를 경험하면서 시작된다면, 남자 아이들의 성장은 여성의 신체를 응시하면서 시작된다. 병치레를 하기 위해 부엌 위 다락방에 드러누운 '나'는 그곳에서 누나의 목욕하는 장면, 남녀의 성교 장면, 눈이 내리는 장면 등 다양한 장면들을 훔쳐보게 된다. 은폐된 내부 공안에서 외부의 삶을 훔쳐보는 관음증적인 시선은 자신의 공간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이면서 그 공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다. 특히 부엌 위 다락방에서 누나의 육체를 훔쳐보는 행위는 소유할 수 없는 텅빔에 대한 경험을 각인시켜 준다. 실체가 없는 그 텅빔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빈자리로 남는다. 남자아이는 신체적인 변화에서 기인하는 자연스러운 욕구가 근친상간이라는 사회윤리로 인해 좌절되면서 자신의 성을 억압하고 나서야 '사회 속에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억압은 성인이 된 '나'로 하여금 성장의 불완전한 속성을 환기하면서 죄의식을 느끼도록 만든다.

게다가 '열꽃'이 필 정도로 강렬한 누나의 벗은 이미지는 자신의 출생이라는 상상적인 장면(어머니는 '나'를 어두운 부엌에서 낳았다.)과 겹치면서 '나'는 여성의 신체와 생명의 근원이라는 상상을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이 유년의 '나'가 성장한 후에, 여성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과 '생명 탄생의 근원으로서의 여성'이 그의 인식 속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녀한테 질펀한 농지거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그때 어깨 위에 간신히 달라붙은 줄에 매달린 얇은 웃옷을 거추장스러운 듯 걸치고 있는 두 봉긋한 젖가슴이 벌름벌름 숨을 쉬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내 아랫도리가 불끈 천막을 치지만 않았더래도 말이다. 나는 바짓주머니에서 동전 이백원을 꺼내 평상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뒤에서 욕이 튀었다.
"썅새끼!"
욕과 동시에 동전 하나가 뒤통수를 알딸딸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입술을 종그렸다.
"쐐년!"([눈속의 검은 항아리],p.25)

나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걷잡을 수 없는 기분이 돼버렸다. 술기운이 일시에 목덜미로 뻣뻣하게 밀려들고 있었다. 그때 내 손아귀 안으로 도톰한 살덩이가 한가득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는 짧은 숨을 토하며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렸다.([자전거도둑],p.124)

위의 장면에서 성행위는 실재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다만, 여성과의 단순한 신체적 접촉이 성적 환상을 '나'의 '상상' 속에서 불러일으키고 있다. 육체가 배제된 성행위는 '병적 징후'이며, '나'의 남성성을 의심하게 한다. 게다가 적극적인 두 여성은 이러한 일이 있은 다음 '나'를 혐오스럽게 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나'의 불완전한 성적 결합이 훼손시키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합의 불완전성'은 이미 '거세당한 아버지'에 대한 소년의 태도에 잠재되어 있던 것이고, 현재의 삶과 기억의 흔적을 넘나드는 '나'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한다. '나'의 과거에 대한 서술 또한 경험적이고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과 상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이 육체를 언어 속에 포함시키려 하고 재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육체의 타자성에 대한 인식 때문일지 모른다'(피터 브룩스, 육체와 예술, p.34) 김소진은 언어를 통해 성적대상을 노골적으로 재현하고 있지만 실제로 욕망의 충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여러 소설 속에 나오는 성적이미지인 '허연 허벅지'라는 표현 속에는 기호적이고 상징적으로 개념화된 '허벅지'가 있을 뿐, 실체로서의 '허벅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를 언어적으로 재현하는 행위 자체에 불완전한 성적 결합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여성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상상력이 내포한 죄의식은 현실에서의 죄와 관련이 없다. 이때의 죄의식은 인간 존재의 윤리적 의미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존재에서 근대적인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체계와 법률제도에 순응해야 한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이 억지는 존재하지도 않는 죄의식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개인의 삶을 통제하려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술수일 뿐이고 이미 프로이드나 푸코에 의해 그 정체가 폭로되었다. 그러나 왜곡된 근대화 과정일망정 현재 우리 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이라면 '사소한 개인'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작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버지를 거부하고, 누나와의 근친상간을 상상하는 행위가 '나' 안에 잠재되어 있는 죄의식을 추동하는 것이라면, 남의 집 전기를 도둑질하는 행위([사랑니 앓기]), 남의 가게를 쑥밭으로 만드는 행위([자전거 도둑]), 깨진 옹기 그릇을 눈사람 속에 숨긴다는 영악스러운 행위([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사회 안에서의 죄의식을 추동한다. 김소진이 이렇게 잠재되어 있는 죄의식을 드러난 죄의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죄의식에 대한 사유를 명확하게 하기 위한 심리적 과정이다.

그런데 나는 왜 구린내가 진동하는 깨진 항아리 속에서 똥을 누는데 울고 싶어졌을까? …… 아아. 하지만 여태껏 나를 지탱해왔던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온 욕체인 이 산동네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이렇게 감상적으로 만드는 게.([눈속의 검은 항아리], p.33)

막 돌아서려는 내 눈에 혹부리 영감이 맨날 보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사는 시커먼 돈궤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당일 벌어들인 그 안의 돈들은 이미 영감이 다 계산을 마치고 나서 텅텅 비어 있었다. 나는 꾸르륵거리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그 궤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한동안 참았던 굵직한 대변을 그 위에 질펀하게 싸질렀다. 하수구 냄새 때문에 잠깐 감각을 잃었던 내 코였지만 어린애답지 않게 굵게 늘어진 똥줄기에서는 몹시 구린 냄새가 진동했다.([자전거도둑], p.122)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 '나'는 우연한 사고 때문에 짠지 단지를 깨뜨리고 '감쪽같이 눈사람 속'에 그 깨진 단지를 감춘다. 그리고 하루종일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처벌받지 않기 위해 먼 곳으로 돌아다닌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짐작'과는 다르게 엄마에게 볼따구니를 비틀리는 정도의 미약한 체벌만을 받을 뿐이다. 그로 인해서 나는 '생각하는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의 머나먼 거리감', '이 세계는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남들은 '죄'로 생각하지 않는 일이 '나'에게는 죄의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제목인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하얗다'는 이미지와 '검다'는 이미지가 대립적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낮이 되면 눈이 녹는다는 인식은 시간 관념 속에서 깨어진 검은 항아리가 어느 순간에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르게 되고 그러면 그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성인이 된 '나'에게도 영향을 주는데, 재건축으로 인해 기억의 공간인 미아리 달동네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문명화 과정이 내포한 파괴적 힘이 점차로 '나'의 의식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게 된다. 그 죄의식에 대한 기대치만큼의 죄값을 치르지 못한 '나'는 '커서' 페허의 판잣집 속 깨어진 항아리 속에 변을 보며 그 '죄값'을 치룬다.

[자전거 도둑]에서 '나'와 아버지는 소주 두 병을 훔치지만, 혹부리 영감에게 들키고 만다. 아버지는 나의 빰을 때리는 것으로 혹부리영감에게 용서를 빈다. 자식 앞에서 한없는 나약함으로 자리하는 아버지 때문에, '나'는 '내면의 상처'를 끌어안고 혹부리 영감의 가게를 습격하게 된다. 아버지가 하지 못한 일을 아들이 대리하는 것은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적대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잡히지 않을 요량으로 혹부리영감의 돈궤에 똥을 싸고 나온다. 그러나 이 행위는 뜻하지 않게 혹부리 영감을 죽게 만든다. 이 대리처벌은 단순히 아버지 대신의 희생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버지의 정적을 처리함으로 해서 아들의 지위가 아버지와 동등해지는, 일종의 위계질서의 전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혹부리 영감을 자신이 죽였다는 자각과 그에 따른 '나'의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우월감은 그러나 죄의식으로 억압되어 성장 이후에 표면화된다.

두 작품에서 '짠지 단지'와 '돈궤'는 '나'가 소유할 수 없는 영역에 놓인 욕망의 대상들이다. 그러한 대상이 두 작품 속에서 변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옛말에 '도둑질을 하고 그 곳에 똥을 싸놓으면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때의 '변'은 '죄'에 대한 상징적 처벌이며 또한 죄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전략이다. 죄에 대한 처벌은 '과거'에 행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재'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죄는 바로 저의 죄였고 거꾸로 저의 죄는……"
……
"그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저지른 죄를 두고 애비는 죽었다 해서 제외되고 아들은 우연히 고백성사를 했다고 해서 용서받고 한다면, 도대체 용서받고 용서받지 못함의 차이는 무엇인지요?"([사랑니 앓기], 162면)

점심시간을 빌려 우연히 들린 성당에서 '나'는 어릴적 아버지와 함께 도전(盜電)을 했던 일을 속죄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죄는 저의 죄'라고 말하는 '나'에게 신부는 '결국 부질없음'을 말하며 고해성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의 죄의식은 종교라는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속죄받지 못한다. '나'의 고백이 나약한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이고, 이로써 '나'를 지배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권력의지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면, 사회는 그러한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에 나의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죄는 있고 처벌은 없다. '나'는 고해성사라는 사회 제도를 역으로 이용해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했지만 이것은 또한 죄의식에 대한 궁극적인 처벌은 아니다.

이러한 '죄의식'과 '깨달음'은 마지막 작품이면서 미완의 작품인 [내 마음의 세렌게티]에서 극단적으로 확대된다. 게다가 인식의 전환을 감행하고 있다.

이제 나는 세상의 똥으로 돌아갑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버려지는 똥입니다. 저 다양하고 갖가지 표정을 짓고 있는 동을 한번 들여다봅시다. 똥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 짜장면을 욱여넣고 싼 검은 동, 김밥을 먹고 눈푸르딩딩한 똥…… 내 몸뚱어리는 스스로가 똥이 되려 합니다. 거름이 되려 합니다. 끝내 다시 태어나려는 기억도 잊으려 합니다.([내마음의 세렌게티], 367-368면)

이제 똥은 배설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똥을 나의 의식과 몸뚱아리와 동일시함으로써 순응과 포기의 자기 동일시를 시도한다. 즉, 숭고하다, 비천하다, 쓸모없다, 유용하다라는 한낱 인간의 입장에서 본 관념적 가치, 언어를 포기함으로써 김소진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성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 이후에 '기억을 잊으려' 한다는 선언을 통해 궁극적인 글쓰기의 모순성을 간파하고 기억으로서의 주체, 글쓰기(이야기하기)로서의 주체, 억압을 통해 성장하는 근대적 주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김소진의 '글쓰기'와 '육체'는 죄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짠지 단지'와 '돈궤'에 똥을 싸는 것이 죄에 대한 스스로의 처벌이었다면 그 동안의 기억하기로서의 글쓰기는 고해성사와 같이 자신의 속죄를 위한 수행적 행위였던 것이다.

폭로와 처벌의 역사의식

거대서사가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는 수많은 말, 목소리들이 떠돌아 다녔다. 수백년 동안의 폭로된 예언들, 수십년 동안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외침. 침묵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지만 반성적으로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바로 보지는 못했다. '역사의 의미'는 절대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김소진의 끝없는 글쓰기 작업은 한 개인의 생을 재구성한다는 소박한 측면만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회상의 작업과 맞물려 '한국 현대사를 반복·재생하는 중첩된 역사로 봄'으로써 '사소한 개인의 역사', 그러나 어쩌면 유일하게 실체화된 역사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죄의식의 기원을 찾고 그것을 속죄하려는 과정과 병행한다.

"몸만 헐렁하게 커버렸지 뇌 속은 말랑말랑한 유년의 기억으로 각인된 회백질 덩어리가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김소진, [원체험, 기억 그리고 소설], 김소진 산문집-아버지의 미소, 솔, 1998)라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 속에서 김소진은 소설을 썼다. 그러나 [내 마음의 세렌게티]에서 기억마저 잊겠다고 단언하는 것처럼, 김소진 소설에 나오는 유년의 기억은 배고프고 못살던 어린 시절의 동화같은 삽화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감당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현재의 '나' 안에 감추어진 죄의식을 건드린다. 어린아이의 미숙함이 가져오는 파국에 대한 걱정과 피해의식은 나이가 든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좀더 근사하게 포장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결국 김소진 소설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근대적 주체' 속에 감추어진 우울한 죄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의 글쓰기는 회상이라는 상투적인 소설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실체로서의 과거를 폭로하는 것이다. 유년으로의 반복적 회귀는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길들여지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존재론적인 투쟁이었다. 그러나 기억의 늪에서 낚아 올린 혐오스러운 자신의 몰골을 감당하진 못한다. 삶의 반복성이 가져오는 무의미함과 두려움. 왜곡된 역사가 정당한 처벌없이 수없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진정한 '사소한 개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처벌받지 않은 역사, 정치·경제적 억압이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김소진 소설이 지식인 소설로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도, 그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현재형'이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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