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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검은 돌의 문장들-임솔아론 - 홍성희


1. 길 잃는 말들의 세계

아버지, 아버지,
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내게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진정하거라, 아가야. 걱정 말아라.
단지 마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란다.
- 슈베르트 가곡 「마왕」 부분

괴테의 시 「마왕」은 해설자, 아버지, 아들, 그리고 마왕 네 개의 목소리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마왕은 자신과 함께 가자며 아들을 유혹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두려움을 호소하며,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불안을 나지막이 다독인다. 해설자는 이들의 유혹, 두려움, 위안 어느 것에도 개입하지 않은 채 '정황'을 제시하고, 그렇게 제각각 목적에 충실하게 발화되는 이들의 언어는 그러나 하나같이 서로에게서 어긋나며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한다. 해설자의 설명, 마왕의 유혹, 그리고 아버지의 위로는 아이를 사로잡는 끔찍한 두려움을 거듭 비껴가고, 아이의 절규는 저 혼자서 진실인 채 모두에게 '곡해'된다. 서로 소외되고 소외시키는 이들 언어들의 연속으로 서사는 구성되고, 시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에서 바리톤 한 사람의 목소리로 재현된다. 이 한 사람의 발화자는 음의 장단조, 높이, 빠르기 등을 달리 하여 네 목소리의 간극을 최대한으로 벌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로를 들을 수 없거나 듣지 않는 이들 인물들을 하나의 연속된 시간으로 연결해내는 유일한 발화자로서, 그는 각각의 인물들이 감당하는 소외의 사태를 한꺼번에 견뎌야 한다. 아이의 공포에 사로잡힌 언어를 이해하지도, 아이를 다독이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신뢰하지도 못해 말을 서둘러 채찍질하는 아버지의 이중 소외도, 마왕과 아버지의 목소리 사이에서 자신이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의문의 형태로 밖에 말할 수 없는 아이의 소외도 이 한 사람의 발화자는 모두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감각하며, 어떤 인물의 목소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비극을 이어가는 일을 홀로 견딘다.
임솔아에게 시 쓰기는 유일한 발화자로서의 바리톤이 되어 슈베르트의 「마왕」을 부르는 일과 같다. 그의 시편들은 인용으로 가득하다. 어머니, 애인, 전 애인, 친구 혹은, 스쳐가는 사람들,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들, 책에 나오는 인물들. 다양한 사람들이 발화하는, '나'의 언어로 재-발화되는 그 모든 언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기보다는 충돌하거나 미끄러지는 방식으로 병치된다. 완료되지 않는 환유를 따라가듯 시의 언어가 직조되는 시간을 따라가며 감각하게 되는 것은, 이 모든 언어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비껴가는 채로만 연결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무기력함과 더불어, 지금 여기의 모든 발화들이 바로 그렇게 판정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 세계의 비극을 구성하고 있는 것만 같은 어떤 참담함이다. 임솔아의 시가 서로 다른 '말'들을 모으고, 그들이 서로 미끄러지는 장면이 반복되는 복수(複數)의 장소가 되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말'을 통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말'들은 끝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는가, 그 지경을 우리는 어떻게 감당하려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오늘 여기에서 발화되거나 발화되지 않고 있는 말들의 안부를 물으며 임솔아의 시는 이 시간을 살고, 견딘다.

2. 창문의 깊이와 꽃잎의 높이

살의를 느꼈나요? 기자는 물었다. 필리핀의 열두 살 킬러는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저었다.
동생들이 굶고 있어서요, 방아쇠만 당겼을 뿐인데요.
미안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도 가족이 있었을 텐데.
제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돈을 받았을 테죠.
- 「살의를 느꼈나요?」 부분

말들은 대개 나름의 맥락 속에서 매끄럽게 발음되지만, 어떤 귀에게 어떤 말들은 문턱처럼 솟아올라 발을 걸고, 신발 속 가시처럼 자꾸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말들이 틀리거나 나쁜 것이어서 라기 보다, 그 말들의 배경이 되는 어떤 '자연스러움'이 그 귀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열두 살 아이에게 총자루를 쥐어주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이 돈벌이가 되고, 열두 살 아이가 더 어린 동생들의 끼니를 챙겨야 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온 아이에게 기자가 꺼내놓은 언어들은 당연하고 마땅하기보다는 "머리를 긁적이"게 하는 것일 뿐이고, 지금 여기에서 굶고 있는 동생들에 관해 말하는 아이의 언어가 기자에게는 아이가 죽인 사람의 가족에 관해 되묻게끔 하는 무엇으로 작용할 따름인 것처럼 말이다. 말들이 전제하는 각자의 당연함들은 서로 충돌하지조차 않는다. 말들은 그저 서로를 철저히 비껴가고, 각자의 당연함을 안전하게 간직한 채로 허공중에 사라진다. "그물처럼 서로의 그림자가 겹쳐질 때 그곳은 우리의 집이 된다. 아무나 밟고 지나갔으나 아무리 밟아도 무사해지는 집이 느리게 방바닥에서 움직인다." - 「악수」 부분. 이 글에서 인용하는 시는 모두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 에서 가져왔다.
그렇게 제각각 자연스러움 속에서 말들이 태어나고 그대로 사라지는 무수한 장면들 속에서, 임솔아의 귀는 그 당연함'들'을 듣고, 그의 손은 메모처럼 그것들을 적는다. 포스트잇에 메모하듯 적어 모은 것들은, 포스트잇을 잃어버려도 또박또박 새겨진 채 잊히지 않고 "잊지 않으려고 포스트잇에 적었지만/검은콩, 면봉, 펑크린, 8일 3시 새절역, 33만 원 월세 입금,/포스트잇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었다.//까맣게 잊어버린 검은콩이 냉장고에 있었다./썩은 내를 풍기는 검은콩엔 왜 싹이 돋아 있는지." - 「어째서」 부분.
, 그대로 쌓여 시가 된다.
임솔아의 시는 그렇게 투박하다. 그가 모은 것들은 하나하나 그를 멈칫거리게 하는 분명한 문턱들이지만, 그는 그 문턱들의 의미를 해설하지도, 그 해설들을 엮어 더 큰 차원의 무언가를 거창하게, 힘주어 말하지도 않는다. '당연한 말들'을 모으는 임솔아에게 중요한 것은 각각의 말들이 가지고 있는 배경의 편협성과 발화자들이 선택한 무지(無知) 속에서 기실 어떤 고통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켜켜이 따져 말들을 보편절대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는 것,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에, 혹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말과 장면이 어긋나는 순간, 말과 말이 서로에게서 소외되는 찰나의 광경을 잊어버리지 않는 일이다. 멈칫하게 되는 찰나를 잊지 않을 때에만 그것을 곱씹을 수 있고, 곱씹을 수 있어야지만 모두가 쉽게 뭔가를 잊어버리는 습관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솔아의 시는 다른 걸 말하기 위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서 기억한다.
임솔아의 시가 지금 여기의 말들의 사태들을 살피면서 초점을 말들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아니라 말 속에서 무음 처리되는 '고통' "빈대가 옮았다. 까마귀 몇 마리가 쥐 한 마리를 사이좋게 찢어 먹는 걸 구경하다가. 아무 일 없는 길거리에 아무 일 없이 앉아 있다가. 성스러운 강물에 두 손을 적시다가. 모를 일이지만 풍경의 어디선가.//빈대가 옮았다. 빈대는 안 보이고 빈대는 안 들리고 빈대는 안 병들고 빈대는 오직 물고 물어서. 없애려 할수록 물어뜯어서. 남몰래 옆구리를 긁으며 나는 빈대가 사는 커다란 빈대가 되어간다." - 「옆구리를 긁다」 부분.
에 두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말'들이 어떤 평면을 가정하는가를 골똘히 지켜보고, 그 가상의 평면에서 지워진 '고통'들을 문턱처럼 기억해낸다.

사슴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슴은 태어나면서부터 갈지자로 뛴다
는 말을 들었다. 먹히지 않으려고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먹고 싶다
는 말을 들었다.

*

목소리는 어디까지 퍼져나가 어떻게 해야 사라지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면 눈알이 붉어졌다 고통에 색이 있다면 그 색으로 나는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다면 창문을 넘어 번져가 창밖의 은행나무와 횡단보도와 건너편 건물의 창문까지 부글부글 타오르는(창문을 열어줘) 저것을 나는 고통의 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의 피가 빨갛다는 말을 믿고 있다 새빨간 태양이 떠오를 때처럼 점점 눈이 부시다

살인자에게서도 기도를 빼앗을 수 없다는 나의 한 줄 일기와
당신들이 자살하게 해달라는 나의 기도 사이를 헤맬 것이다.

*

이곳으로 가면
길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인간이라는 말을 들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어야 한다
는 말을 들었다.

당신들은 발가벗은 채 발목을 잡히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매를 맞고
처음으로 울어야만 한다.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말해지는 동안
믿어본 적 없는 소원이 이루어진다.

고통을 축하합니다.
빨간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른다.
- 「빨간」 전문

인용되는 말들 속에서 사슴과 여자는 한낱 '잡아먹힐 것'에 불과하다. 사슴과 여자를 '먹을 것'으로 볼 때에만 발화될 이 말들은 누군가의 '먹이'가 아닌 사슴과 여자에 대해 상상하지 못한다. '먹을 것'을 탐하는 이러한 말들은, 아마도,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행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다만 개인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선택하고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발화하는 것은 모두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미 항상 사슴과 여자를 먹잇감으로 희생시키는 이 '살인자'의 말들을 어느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다.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살인자에게서도 기도를 빼앗을 수 없다'는 한 줄을 일기에 적어 간직하면서 살인자의 기도들을, 식욕들을 인용하여 적는다.
그러나 말들은 정말 그저 말일 뿐일까. 때로 말들은 특정한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하고, 그러한 선택을 정당화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어야 한다'는 말은 의도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승인하고, 그 가운데 '인간'은 어떤 '적당한' 맥락들 속에서의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용인하는 인간, 이 된다.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탄생을 증명하는 최초의 행위가 '울음'이고, 그 울음이 "발가벗은 채 발목을 잡히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매를 맞"는 폭력의 승인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라면, 탄생이라는 사건을 반복하여 기리는 '생일'은 특정한 폭력을 축하할 만한 것으로 바꿔 말하는 언어가 된다. '나'는 이 말들도 기록한다.
그러나 '나'의 인용들, 기록들은 폭력을 용인하거나 묵인함으로써 잔잔한 표면을 만들어내는 말들을 수집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생일을 축하합니다'를 "고통을 축하합니다."로 바꿔 '말'함으로써 '생일'과 '생일들'에 새겨져 있는 고통의 경험들을 불러들이기를 반복하며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가 이어지는 가운데 타고 있는 '빨간 촛불'은 공간을 온통 붉게 비추고, '나'는 "눈물을 흘리면 눈알이 붉어"지듯 그 "빨간" 색깔을 고통의 색이라 여긴다. '나'의 목소리는 사라져도 초는 도처에 '켜'져 있어서, 모든 '인간'의 피의 색이자, 나의 창문에서 건너편 건물의 창문까지 부글부글 타오르고 있는 저 색깔을,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미 알아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창문'만 열면 우리는 이 고통의 색의 복판에서 이것이 바로 고통의 색이라는 '말'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이미, "(창문을 열어줘)", 말하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고통의 색깔 속에서 창문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세계에는 무수한 '창문 안쪽'이 생기고, 창문으로 매끄럽게 평면화되어 있는 건물들은 창문 개수만큼의 깊이로 입체화될지 모른다. "창문은 창밖에 서 있는 나를 보게 한다. 내 허벅지 위로 도로가 나 있고 내 허리 속으로 막차가 도착한다.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고 내 가슴 속 빌딩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슴에 손을 넣어 창문을 연다. 한 여자가 화분을 분갈이하고 있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쪼개어진 석류가 식탁에 있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하얗다. 갓난아이가 눈을 움켜쥔 채 설원 위를 기어간다. 그 아래 창문을 열면 내 눈썹에 가로등이 켜진다. 내 이마에서 비행기가 지나간다. 몸속에 있던 도시가 몸 밖으로 배어 나온다. 마지막 창문을 열면 창 안에 서서 창문을 세어보는 나를 볼 수 있다. 알알이 유리가 빛나고 있다. 불을 끄면 창밖에 서 있는 나와 창 안에 서 있는 내가 함께 사라질 수 있다." - 「석류」 전문.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은 묵음으로만 말해지거나 아직 '말'해지지 못한 채로 남아있고, '나' 역시도 '목소리'가 어떻게 해야 사라지지 않는지를 알고 있지 못하며, 그래서 저것이 바로 고통의 색이라는 '말' 역시도 붙잡아둘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다만 계속해서 말하고 노래 부를 수 밖에 없다. '나'는 고통을 지우는 평면의 말들을 불러와 재-발화하면서 말들을 고통의 현장으로 전유하고, 복수의 고통을 환유적으로 연결하여 저 건물 표면의 창문들처럼 세계에 자꾸만 깊이를 새겨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살인'을 반복하는 말들의 '자유'를 옹호하는 일기와 그 '자유'가 자멸하기를 바라는 기도, 두 극단의 '말'들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그 '사이'를 오래 헤맨다. 다시 말해 '나'의 '말'은 '당신들'의 '말'들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지도, 그것을 살해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지겹도록 인용하고 비틀어, 평면화에 맞선다.

끝없이
티슈를 뽑아 입을 닦았다. 새 티슈가 또 버젓이 나와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는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꿈을 꾸고 싶었다. 나쁜 꿈은 놀아달라고 번번이 칭얼댔고 같은 놀이를 반복했고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 사람과 같은 모습을 했고

매번 얼굴을 바꿨고 매번 이유를 바꿨다. 너 같은 아이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나쁜 꿈에게 나는

말해주지 않을 수 있다. 끝까지 그 말을 들어줄 수 있다. 똑같은 자세에서 끝나버리는 실뜨기처럼 멍청해 보여도 기꺼이 처음을 반복할 수 있다.

버려진 기억에게서 버려진 기억으로부터 다시 버려지는 기억이 될 때까지

캄캄한 복도를 향해 텅 빈 문이 열리고 모든 층의 버튼을 장난삼아 눌러놓은 엘리베이터처럼 캄캄한 복도마다 티슈 같은 불빛이 쏟아지고 티슈를 찢어가며

나는 국화를 접고 있었다.
끝없이 꽃잎을 접어야 한다.
- 「가장 남쪽」 부분

깨끗하게 다림질된 새하얀 티슈는 뽑아도 뽑아도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물질로 거기에 있다. 그에 비해 번번이 칭얼대고 같은 놀이를 반복하는 '나쁜 꿈'은 '나'의 꿈의 형태로만, '나'의 몸과 정신과 마음에서 되풀이되는 사후적 흔적으로만 있다. 꿈에도 얼굴이 있고 이유가 있지만, '나'는 그 모든 얼굴들을 '너'로 만나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너'들은 이름이나 기억으로 실체화되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 사람과 같은 모습'이라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이 거듭 덧칠해져 서글픔이 뭉뚱그려진 형태로만 남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 아이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든 그 무수한 아이들을 모두 '너'로 만나며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반복한다. '나'의 꿈에만 있는 '너'의 말을 듣고 꿈에서 깨어나고 다시 처음부터 꿈을 꾸는 것이 "똑같은 자세에서 끝나버리는 실뜨기처럼 멍청해 보여도", 그에게 이 멍청한 일은 '기꺼이' 해낼 무엇으로 돌아온다. 얼마나 깊숙이 버려졌는지 알 길 없는 캄캄한 기억들을 되불러와 잠시 잠깐 "티슈 같은" 불빛을 비추어, 그 캄캄한 어둠에 깊이를 만들고, 꿈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꿈을 열어 "캄캄한 복도마다" 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때 버려진 기억들을 비춰주는 '나'의 불빛이 굳이 "티슈 같은 불빛"이어야 하는 이유는, 꿈이라는 저편에서 발화되는 '너'의 '말'들은 이편에서 인용될 수 없는 뭉뚱그려진 것이어서, 이편의 '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물질로 여기에 있는 새하얀 말들을 빌려서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편의 말은 입에 묻은 지저분한 것을 닦아내어 나쁜 꿈은 애초에 없었던 듯 살게 하는 '티슈' 같은 것이라서 "맛있었어? 응. 옛날 애인의 버릇대로 나는 보리차로 입을 헹군다. 온정은 매번 끔찍함과 엉겨 붙어서 끈적거리는 입과 손을 물티슈로 싹싹 닦고 싶어진다." - 「복성루」 부분
, '나'는 이편의 언어 그대로는 '너'의 복도에 빛을 비출 수가 없다. 그래서 복도마다 '나'는 "티슈를 찢어가며" 이편의 티슈 같은 말도 꿈속의 '너'의 말도 아닌 하나의 꽃잎을 만든다. 꽃잎들은 뭉뚱그려진 '너'의 말들에게 구체적인 몸이 되어줄 것이고, 새하얀 티슈가 무한 생산되는 이 세계가 반듯하게 다림질 된 평평한 세계가 될 수 없도록 '너'를 향해 벌어지는 틈이 될 것이다. '나쁜 꿈'들은 새하얀 티슈들의 세계에서 기어이 다시 "버려지는 기억이 될" 것이지만, '나'의 멍청한 반복 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은 하나 하나의 꽃잎이 되어 언젠가, 새하얀 티슈만큼이나 구체적으로 거기에 있는, 무수한 꽃잎들이 피어있는 국화꽃이 될 것이다. 그 꽃이 하얀 티슈의 조각들로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반듯하게 펼쳐진 티슈들과는 다른 무엇으로 살아남도록 '나'는 티슈를 찢고 접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발랄한 말들이 은폐하고 있는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 말을 갖지 못해온 것들을 말로 하기 위해 매끈한 언어들을 가져와 '접는' 방식으로 임솔아의 시는 '말'한다. 그 '말'에는 언제나, 매끈한 표면 위를 질주하는 언어와, 무수한 문턱들 앞에서 기우뚱대는 언어, 그리고 표면 위를 향해 손을 뻗어 손바닥 모양의 높이/깊이를 만들어내는 언어들이 엉켜있다. 당당하게 발화되는 말들과 매끈한 풍경이 될 수 없는 말들과 말이 되지 않는 무음의 언어들을 한 데 모아 발언권을 쥐어주는 것이 바로 임솔아의 시라고 한다면, 수도꼭지마다 다른 온도의 물이 나와 뒤엉키고 있는 기이한 목욕탕에 앉아있는 것처럼, 어느 온도에도 어떤 표면에도 안락하게 놓여있지 못하는 채로, 우리는 그 불안을 그대로, 견뎌야 한다. 매끄러움이 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견디는 것, 거기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한다.

3. 아름다운 액자, 창문 안쪽의 날씨

임솔아의 시는 고통을 잊으려는 언어에 고통의 깊이를 되새겨 넣으려 애쓰는 언어들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 깊이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안락한 평면이 있다면 그곳을 찾아 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당신들'이 사라지기를, 때로는 '내'가 지금 여기의 흑구름 낀 날씨 바깥으로 나갈 수 있기를, 때로는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어떤 '선의'로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그렇다. 그러나 담담하면서도 참담한 이런 바람들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평면은 임솔아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표면을 매끈하게 사포질하는 언어들이 문턱처럼 발부리에 걸릴 때, 어떤 구체적인 현장들이, 창문 안쪽의 이야기들이 제 자신의 버려진 주검처럼 그의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바다를
액자에 건다.

바다에 가라앉는 나를 본 적이 있다.
팔다리가 부식되어
산호가 되어갔다.

허옇게 변한 사지가
산호들 사이에 갇혀 있었다.
노랗거나 파란 물고기들이 주변을 배회했다.

저기 열대어가 있어, 스킨다이버들이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젖은 빵을 찢어 던졌다.
아름답다는 말을 산호 숲에 남겨두고
스킨다이버들은 뭍으로 돌아갔다.

나를 그곳에 둔 채 나도
꿈에서 빠져나왔다.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나를 여기에 둔 채 나는
저곳으로 다시 빠져나가서

정육점과 세탁소 사이에
임대문의 종이를 쳐다보고 서 있다.
텅 빈 상가 속에서 마리아가 혼자
퀼트 천을 깁고 있다.

이 액자를
다시 바다에 건다.
- 「아름다움」 전문

풍경을 아름답게 담아 전시하는 평면의 액자 속에서 '나'는 부식되어 산호가 되어가는 자신의 몸을 본다. '내'가 점점 허옇게 변해가는 동안 스킨다이버들이 그곳을 다녀가지만, "노랗거나 파란 물고기들"에게 스스럼없이 "열대어"라는 이름을 붙여 말하듯 그는 '나'의 몸이 갇혀 있는 산호 숲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빵을 찢어 던지는 '선의'도 잊지 않지만, 그는 '나'를 보면서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름다운' 액자 안에서 '아름다움'을 말하는 스킨다이버의 말에 의해 '나'의 몸은 거기 없는 것, 혹은 있어도 말해질 필요 없는 것으로 남겨진다. 액자 '밖'으로 나와 깊이를 높이로 전환시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지구를 '별'로 볼 수 있는 높이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말하지만, 아름다운 별을 매끈한 창문에 담아 바라보지 못하는 '나'에게 그 '말'은 이곳에서의 '나'의 삶과 생을 철저히 외면해야 발화될 수 있는 것, 따라서 그 스스로는 결코 발화할 수 없을 낯선 말로 휘둥그러니 남는다.
'나'는 그들의 '아름답다'는 말을 굳이 인용하고 그 말들이 발화되는 바로 그 시간에 어떤 지옥 같은 시간이 그곳에 있는지를 함께 발화하면서, 그들의 말과 자신의 말, 그들의 말을 인용하는 자신의 말과 그것을 초과하여 발화하는 자신의 말 사이의 거리를 벌린다. 벌어진 틈만큼 깊이 혹은 높이가 생긴 말의 공간에서 막막한 입체감을 견디는 '나'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여기에서 저기로 다시 또 저곳으로 거듭 '빠져나가'면서도 언제나 완전히 '바깥'으로 떠나지 않는다. '바깥' 없는 곳에서 그는 '말'들이 '말'하지 않는 장소에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고 살아있는 것들을 곳곳에 남겨놓은 자신의 몸인 양 알아본다. 임대문의라 쓰인 평면의 종이 '속'에서 비어 있는 상가를 보고 그 상가 '안'에 홀로 앉아 있는 마리아를 보는 '나'의 시선은, '말'이 평면화하는 세상을 층층의 깊이로 늘어나게 하여, 그 마디마디에 빼곡하니 무언가가 살아있고 그 '지옥'들은 '말'해지든 말해지지 않든 이 세계를 구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 속에서 세상은 어느 한 곳 빈 곳 없이 모든 오늘 여기의 삶들이 빽빽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이며, 동시에 '아름답다'는 말이 알아차린 적 없는 구체적 고통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수천의 파편들이다. 수십의 천 조각을 기워 퀼트 천이 만들어지듯, 세상은 '아름답다'는 한 마디 '말'로 표현될 수 없고 '평면'으로 이해될 수 없는 깊이들의 병렬, 파편들의 전체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구를 아름다운 별이라고 하는 '말' 앞에 지옥이 여기라는 다른 '말'을 들이미는 대신, 지옥이 여기임을 '증명'할 일을 생각한다. 단 몇 마디 말로 '정의'내리는 것이 아니라 말의 조각들을 지난하게 이어 붙여 '지구'라는 하나의 '별' 안에 얼마나 많은 '증명' 거리들이 있는가를 하나, 하나 기억해내는 '쓰기'로 '나'는 한 마디 '말'에 맞선다. 퀼트 천은 모든 것을 평면으로 보려는 말의 관성 안에서 '아름다운 퀼트 천'으로 말해지겠지만, 그 말에 의해 잘려나가는 깊이들을 시간을 초월하여 붙잡아두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퀼트 천을 기우며, "불가능을 보여주는 서커스 단원"이 되는 일을 생각한다.

한 사람의 옷 속에서 다른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사람들이 연이어 걸어 나왔다. 둘둘셋셋 대화처럼 불을 내뿜었다.

불가능을 보여주는 서커스 단원이 되고 싶어.
- 「중계천」 부분

맨발의 소년들이 높은 나무를 다시 기어오른다. 한 켜 한 켜 신발로부터 멀어진다. 기는 것만으로도 높이
높이 올라간다. 낮아지는 것과 높아지는 것이 같은 날씨 안에서 동시에 생긴다.

구멍들이 절벽처럼 깊어간다.
하나의 구멍에서 수천의 개미가 쏟아져 나온다.
- 「같은」 부분

아주 작은 구멍에서 수천의 개미들이 쏟아져 나올 때, 땅이라는 표면은 불안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깊이를, 그 깊이를 가로지르는 무수한 구멍들과 그 구멍들을 따라 기어 다니는 수천의 생명들을 마주하는 일은 표면을 표면이 아닌 것으로 알아차리게 하기 때문이다. 일상을 가볍고 자연스럽게 채우고 있는 '말'들이 사실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우리는 말이 저당잡고 있는 무수한 고통들에 대해 알아차리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무지(無知)를 선택하여 말의 구멍들을 마주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깊이와 높이는 불안이 되므로, 세상의 '입체'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그렇게 각자에게 '자연스러운' 말들을 발랄하게 지켜낼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그 마땅한 '아름다움'이 눈 감고 귀 막아온 모든 소외와 고통이 '아름다운' 표면 위로 기어 나오려 할수록, 우리는 어쩌면, '아름답다'는 말에 더 강박적으로, 있는 힘껏 매달린다.
그래서 '나'는 "마왕"을 부른다. 무수한 사람들이 '아름다움' 하나를 향해 내달리는 모습을 인용해 오면서,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계속해서 슈베르트의 「마왕」을 부른다. "아버지,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볼 수 없는 자에게 보이지 않느냐고, 보이지 않느냐고 물을 때 더 가학적으로, 자학적으로 질주하는 언어들을 보는 것, 그 광기에 의해 오히려 어둠이 더 커지고, 가까워지고, 분명한 것이 되어가는 아이러니를 지켜보는 것, 이 '끔찍한' 클라이맥스를 목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나'는 "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마부들을 읽는다.

나는 달리는 마차가 등장하는 장면이 좋았다. 마차가 달리면 거기가 어디든 클라이맥스가 되었다. 가장 두려운 걸 벗어나려 할 때, 가장 소중한 걸 구하러 갈 때, 마차는 달렸다. 채찍을 휘두르며 계속해서 달렸다. 매 맞는 말들이 죽도록 달리는 게 나는 좋았다. 고통스러울수록 더 빠르게 마차가 달리는 게 좋았다. 두려워질수록 더 세게 채찍을 휘두르는 마부가 좋았다. 말들을 때리면서, 꼭 맞고 있는 것처럼 부들부들 떠는 게 좋았다. "아버지,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
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마차가 달렸다. 목숨과 맞바꿔가면서 달렸다. 내가 읽은 문장들이 마차처럼 달려갈 때, 내가 학대한 말들도 덩달아 정신없이 날뛰었다. 밤이 검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마차가 급류에 뒤틀리고 바퀴가 떨어져 나가고 몸은 덜덜 떨리고 밤은 성큼 건너오고
(…)
** "함께 가지 않겠느냐, 귀여운 아가? 내 딸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내 딸들이 너와 함께 밤의 춤을 출 것이야, 잠들 때까지 노래하고 춤을 출 것이란다." ─ 슈베르트의 「마왕」에서

- 「계속」 부분

'아름다운' 것에 닿겠다는 생각에 점령당한 이들이 모는 '삼두마차'는 모든 공간을 집어삼키며 달려간다. 이들에게는 마침내 현실이 되어야 할 약속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이 채찍을 휘두르고, 말들을 '죽도록 달리'게 하는 동력은 사실 제가 집어삼키는 공간에 자기가 삼켜낼 수 없을 '마왕'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인지 모른다. '아름다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시커먼 유혹들, '아름다운' 안락을 완전무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속삭이는 심연들, 혹은, 그런 유혹과 심연들이 있어서 끝내 저 완벽의 세계에 마침내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과 자기암시. '내'가 괴테의 시가 아니라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는 이유는, 마부의 질주를 비극으로 내모는 '마왕'이 마부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슈베르트의 「마왕」에서 마부와 마왕, 아들과 해설자의 '말'들은, 아무리 목소리를 다르게 연출해도, 가곡을 부르는 한 사람, "입을 크게 벌리고 계속해서 「마왕」을 부르"는 한 사람의 것이어서,

나는 나를 해설하고, 나는 나를 안고 달려가고, 나는 내 품에 안겨 두려움에 떨고, 나는 나를 유혹하면서 쫓아가고, 나는 내 품에서 내게 삼켜지고 죽는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계속해서 「마왕」을 부른다.
- 「계속」 부분

문장들은 내가 나를 두려워하고 쫓아가고 삼키고 죽이는 자폐(自閉)의 상황 가운데 끊임없이 매 맞으며 달려야 하는 '말(馬/言)'들이어서, 마부들은, 그리고 그의 말들을 따라 읽고 목청껏 부르는 '나'는, 질주하는 말들의 '클라이맥스' 복판에서 급류에 휩쓸리고, 바퀴가 떨어져 나가고, 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말들을 때리면서, 꼭 맞고 있는 것처럼 부들부들 떠"는 것은 제각각 모두가 스스로 마부이고, 아이이고, 마왕이고, 그 사태를 짐짓 모르는 척하는 해설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부'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스스로 '마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그렇게 그 자폐의 언어들의 광기를 제 몫으로 견디면서, 임솔아의 시는 '스스로 닫혀 있는(自閉)' 것들을 자꾸만 돌이켜 생각하고, 말을 학대하는 자폐와 말이 되지 못하는 자폐를 나란히 놓아 그 간극을 재차 견딘다.

이오나는 가능한 한 잔뜩 웅크리고 마부대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식힌다. 바람이 계속해서 날뛰고 있다.
(…)
***** "젊은 마부가 그렇게 물을 마시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도 무척이나 말하고 싶다. 아들이 죽은 지 곧 1주일이 되지만 그는 아직 그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다…… 자세히 차근차근 이야기 하고 싶다…… 아들이 어떻게 병에 걸렸고, 얼마나 괴로워했으며, 죽기 전에는 무슨 말을 했고, 또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해야 한다……" ─ 안톤 체호프의 「애수」에서
- 「계속」 부분

마부이면서 마차를 움직이지 않은 채 마부 자리에만 앉아있는 이오나는, 어서 채찍질을 하라는, 더 세게 후려갈기라는 손님들의 거센 항의에도 말의 속도를 올려붙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어느 누구에게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말을 몰듯 말을 할 수는 없다. 마차는 멈추어 있고, 마부는 눈썹에 눈이 쌓이도록 자신이 말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 이오나의 달리지 않는 말을, 술술 풀려나올 수가 없는 말을, 혹은 여직 말해지지 못해왔던 말을 인용하고 읽고 발화하는 가운데 '나'는, "(창문을 열어줘)" "창문이 열려 있다면 창문을 넘어 번져가 창밖의 은행나무와 횡단보도와 건너편 건물의 창문까지 부글부글 타오르는(창문을 열어줘) 저것을 나는 고통의 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 「빨간」 부분
, 괄호 안에서 웅얼거리는 대신, 어떤 깊이 안쪽에서 바깥으로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지만, '말'을 해야만 살 수 있지만 "말을 해요, 그래야 살 수 있어요, 나는 티브이에게 말을 건다." - 「티브이」 부분
, 말해야 한다는 목적과 말할 것이라는 의지의 이름으로 말을 학대할 필요는 없다. 말의 폭력을 말할 때, 그것이 말에 의한 폭력이기도 하고 말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다면, 당신의 말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그 매끄러운 표면을 얻기 위해 무엇을 살해하고 침묵시켰는지, 그 표면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폐쇄 속에 당신의 말들을 가두게 되었는지에 관해 말하는 일은 당신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일도, 당신의 언어를 부정하기만 하는 일도 아니다. 당신에게서 기도를 빼앗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며, 다만 당신의 '권리'처럼 당신의 기도 속에서 빼앗겨서는 안 될 다른 기도들이 있을 따름이다.
소설들의 구절들을 인용하고 재-발화하는 위의 시에서 임솔아가 보여주고 있는 지난한 작업은, 다시, 어떤 말들도 침묵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자신의 일기와, 다른 말들을 강제로 침묵 속에 놓아버리는 어떤 말들은 사라져버리게 해달라는 자신의 기도를 나란히 놓고 그 사이를 견디는 일이다. 폭력이 아닌 언어를 상상하는 일이 기만적인 것이라면, 폭력을 극복하는 언어를 약속하는 일 역시도 순진한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지금 이곳에서의 최선은 언어들을 모으고, 말이 되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언어의 세계로 불러들이고, 그 모든 것들이 나란히 말해지는 공간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말'이라는 '자유'를 이미 누리고 있는 자들만이 '자유'를 '권리'로 말할 수 있는 이곳에서, 그런 너의 '자유'와 다른 '너들'의 자유들이 같은 퀼트 천 위에 엮일 수 있도록 임솔아는 무수한 당신들의 '날씨'를 말하고 또 전한다. 자꾸만 "창문을 열"면서,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밀"면서. 「예보」
모든 '날씨'의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 수 있도록 기워지는 중인, 언제나 현재 진행형인 이 작은 시(詩)-공간에서, 우리는 어느 쪽에서 보아도 평면일 수 없는 세계를 줄곧 목도하게 될 것이다.

4. 별로 별로 사라지지 않는다.

개 옆에 앉아 개의 주인을 기다렸다.

스케이트보드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사람이 세번째 지나갔고 개가 꼬리를 세번째 흔들었다. 왜 혼자 있어? 같이 탈래? 어떤 애가 물어보길래 별로, 라고 대답했다. 별로 별로 중얼거리면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이 개를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아이들이 죄다 사라져버렸으면. 아이들이 또 말을 건넸으면. 벚꽃이 벚꽃으로부터 꽃잎을 풀어주고 있다. 그늘이 그늘로부터 그림자의 윤곽을 풀어주고 있다. 벤치에는 모르는 사람의 카디건이 걸려 있고 카디건에는 실밥이 풀린 채 단추가 달랑거리고 있고 벚꽃잎 몇 장이 단추처럼 얹혀 있다.

개는 내 발을 베고 잠이 들었다. 나는 개를 모르는데 발이 개에게 묶여 있다. 개의 코가 천천히 말라가는 걸 보며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옛날옛날 한 옛날에 다섯 아이가 우주 멀리 아주 멀리 사라졌다네. 이젠 모두 용사 되어 오 돌아왔네. 후뢰시맨 후뢰시맨 지구방위대──

개가 깨면 안 되니까 조용조용 부르고 조용히 부르니까 씩씩한 노래가 구슬퍼지고 스케이트보드는 무거워지고 벚꽃잎은 우르르 멀어져가고

나는 별로 별로 사라지지 않는다.
- 「별로」 전문

임솔아는 자신이 타자의 목소리들을 모두 모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말'들이 누군가의 '말'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말'들이 누군가를 '만질' 수 있다고도, 누군가가 자신을 '만진' 적이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아무나 밟고 지나갔으나 아무리 밟아도 무사해지는' 그림자처럼, 우리는 겹겹으로 맞닿아 있을 뿐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벤치가 있고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이곳에서 나와 아이들과 개와 그림자들과 꽃잎들, 카디건, 단추, 벚꽃잎 들이 그저 거기에 함께 놓여 있듯, 모든 것은 실밥이 풀린 단추처럼 서로에게 겨우 기워져 있고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 버릴 벚꽃잎처럼 허술하게 맞닿아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생각하면 서글픈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 때로 말을 걸고, 체온을 나누고, 노래를 불러주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거창한 윤리 의식이나 정치적 기도 없이도, 세계를 구하러 와줄 후뢰시맨 후뢰시맨 지구방위대 없이도, 서로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들은 낙관도 비관도 아닌 오늘의 '날씨'처럼 이곳에 있다. 이 날씨들을 거듭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임솔아의 시들을 경유하여, 미친 말들의 세계가 우쭐대며 내리누르는 모든 구석들을 잊지 않으며 한 명의 바리톤이 되어 우리가 부르는 시들은, 해결할 길 없는 참담함 속에서 이토록 비극인 세계를 참담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검은 돌밭에 검은 돌을 던지듯, 젠더, 나이, 신체, 지위, 국적, 인종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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