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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경유한 것들만이 진실이 된다 -조현훈의 '꿈의 제인'에 대한 단평  - 김예솔비


,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영원한 불행을 예고하는 이 문장은 어떻게 위로가 되는 걸까. 제인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살다가 때때로 그녀의 무대가 생각나면, 그녀의 웃음이 떠오르고, 그럼 그걸로 그만이다. 비록 불행은 연속이고 행복은 점처럼 드문 일이라 하더라도, 불행이 진실은 아닐 것이다.

소현이 제인과 함께 살던 이야기가 끝나면, “이제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거예요라는 소현의 독백과 함께 거짓말처럼 제인이 없는 세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첫 번째 이야기가 꿈 내지는 환상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두 번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예단할 수 있을까. 꿈이라는 현상이 무의식의 재조합이라면, 두 이야기는 동일한 등장인물과 소재를 공유하는 여러 가지 조합의 가능성들 중 하나는 아닐까.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꿈의 제인에서 무의미하다. ‘있는데도 없는 것을 가진 제인과 소현에게,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은 경계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에 의하면, 제인과 소현의 존재 기반은 거짓이다. 트렌스젠더 제인은 자신의 성기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성 정체성은 의도치 않게 거짓말이 된다. 소현의 거짓은 그녀의 의도와 행위의 결과 사이의 간극에서 기인한다. 소현은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저 사람들과 같이 있기 위해서. 하지만 그녀는 결국 지수의 죽음을 방관하고 심지어 이용하기까지 한 사람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소현에게 말한다. ‘이기적인 새끼’. 아무도 그녀의 의도가 그토록 천진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서 거짓말 취급을 당하는, 발가락에 대한 그녀의 환상통과도 같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소현의 본능에의 희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의 존재 기반 또한 거짓과 분리될 수 없게 된다.

제인은 거짓된 존재라는 모순을 믿음의 방식으로 극복하려 한다. 제인은 믿음을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믿음에 맞추기로 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믿으면, 그럼 됐어식의 화법은 사지도 않은 물건을 가져가며 주운 사람이 임자에요라고 말하는 억지처럼 들릴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그녀의 믿음은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그녀가 경환이 아닌, 제인이 되기 위해서는 약을 먹어야 한다. 제인은 매일 밤 꿈에서 좋아하는 정호와 연인이지만,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다. 정녕 제인의 말이 모두 옳은 걸까.

어차피 삶은 불행의 연속이니 모두가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믿는 소현과, 케잌을 나눠 주면서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라고 말하는 제인. ‘나누기는 두 이야기 안에서 모두 중요하게 작동하는 삶의 체계처럼 보이지만 그 양상은 너무도 다르다. 제인의 세계에서는 파이를 공평하게 나눌 수 없다면 차라리 다 같이 안 먹고 마는게 옳은 일이지만, 가출 청소년들은 파이를 먹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그들이 말하는 단체생활의 공평함은 맹목적이어서 본질은 왜곡된다. 죽은 지수의 돈을 나눠 가짐으로써 소현은 시시해졌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사실 소현이 원한 것은 지수의 파우치였지만,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에서 그 말은 차라리 거짓에 가깝게 느껴진다. 결국 소현은 거짓의 굴레에 사로잡힌다. 소현의 달리기는 존재 기반의 모순에 좌절하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소현은 달리면서 제인의 말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꿈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것은 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누군가의 방문을 통해서만 열릴 수 있는 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소현이 직접 쉼터의 문을 열고 나가는 것으로 끝난다. 두 이야기 사이에는 시간적인 인과성이 없을뿐더러, 영화의 형식은 오히려 시간을 뒤섞는 서사에 가깝다. 하지만 이 변주에 가까운 변화가 어떤 성장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현은 제인의 방식을 믿어보기로 한다. 비록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진실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제인의 방식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용기는 소현을 위한 노래였다는 사실은 믿는 순간 진실이 된다. 우리는 불행한 얼굴로 살다가도, 때때로 제인의 무대를 떠올릴 것이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행복이라 믿으면서. 오직 주체의 믿음을 경유한 것들만이 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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