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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로 극복한 게임의 진부함 [숨바꼭질]
-윤경원

1. 게임의 법칙

 

술래가 있고 숨은 아이가 있다. 숨은 아이가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은 채 술래의 구역으로 들어가면, 그 순간 숨은 아이의 승리로 게임은 종료된다. 이것이 단순한 술래잡기 놀이가 긴장 속에서 흥미롭게 유지될 수 있는 기본 방식이다.

허정은 이러한 게임의 법칙을 영화 속에 절묘히 녹여냈고, 그것은 제목마저 <숨바꼭질>이다. 이 영화는 사회·경제적 계층이 다른 두 주인공이 각자의 비밀을 숨긴 채 서로 숨거나 찾기를 반복하면서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내용으로, 나의 집 어딘가에 누군가가 숨어 살지도 모른다는 도시괴담을 모티브로 한다. 영화 속으로 들어온 술래잡기 놀이와 도시괴담이라는 신변잡기는 다양한 영화적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재창조되었고, 그것은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계층의 양극화 문제와 위기를 맞은 중산층의 불안을 이야기하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으로 탄생하는 괴물로서의 인간 그리고 그를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잔혹한 소유욕과 그 허망한 끝을 환유하는 한편, 한 형제의 대립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서는 우연한 사건이 파급하는 삶의 잔혹성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숨바꼭질>을 통해 재현되는 이러한 현실은 계층의 양극화와 가진 자의 위선을 꼬집은 <델리카트슨 사람들>, <설국열차>, <카트> 등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불합리한 시스템 내에서 탄생하는 괴물로서의 여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는 <캐리>나 <화차> 등과 닮아 있다. 또한,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 여성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잔혹성은 이미 <검은집>의 신이화(유선 분)로 형상화된 바 있으며, 소유욕이 주는 허망함이라는 것은 전 예술 분야에서 클리셰처럼 반복되는 소재 겸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우연성이 만들어내는 삶의 잔혹한 국면은 구전설화에서부터 최근작 <끝까지 간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렇듯 <숨바꼭질>을 둘러싼 외피는 많은 것을 시사하는 제목 그 자체와 함께 신선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을 법한 기시감은 그리 염려스러운 수준이 아니라는 점은 사실 놀랍다.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드러나는 숨겨진 비밀 또한, 제인 마치라는 젊은 여배우의 가녀린 이미지로 관객을 농락한 <컬러 오브 나이트>(1994)를 보는 듯한 반전임에도, 거기에 이르기까지 관객에게 예측불허의 몰입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숨바꼭질>은 오히려 새롭다.

그렇다면 이토록 진부한 외피 속에서도 도드라지는 <숨바꼭질>의 이 낯선 신선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또한 감독이 관객에게 제안하는, 이 영화 <숨바꼭질>과의 또 다른 숨바꼭질 게임일는지도 모르겠다.

 

2. 게임 스타트: 스타 페르소나와 초두 효과

 

관객은 영화를 통하여 스크린 속에서 재현되는 현실을 경험한다. 이는 영화 관람을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이성적 동기에 의해 인도되는 의식적이고 역동적인 행위로 정의한 인지주의 관점과 직결되는데, 과연 그로달(Grodal)의 말처럼 “영화는 환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일부”인 것이다.

이렇게 관객이 영화로 재현된 현실을 경험할 때는 내러티브 즉, 플롯과 스토리로 이루어지는 서사가 1차적 역할을 담당한다. 다시 말하면, 관객은 영화 속에서 분절되고 흩어진 플롯을 통하여 스토리를 유추해 내고 이것은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내러티브 분석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발되는 관객의 내러티브 해석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속성 상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이미지와 사운드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보드웰(Bordwell)이 언급한 ‘기술적인(technical)’ 과정으로 영화를 구현하는 일명 ‘스타일’이다.

이 스타일이라는 것은 내러티브(플롯과 스토리)에 덧붙여진 기술적 요소로 연출자가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방식과도 같은데, 일상적인 대화로 바꿔 생각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방식(목소리, 어조, 시선, 몸짓 등) 즉, 화법이라는 것과 닮아 있다. 화법이 그 사람만의 독특한 말 전달 방식이라면 영화 속에서 구현되는 스타일은 그 영화가 관객에게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숨바꼭질>이 주는 신선함은 어쩌면 영화 속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현한 바로 이 스타일에서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관객은 영화 보기를 시도할 때 영화 속의 무수한 시청각적 요소를 통하여 내러티브에 대한 가설을 설정하고 그것을 정교화하기도 하며, 확장 및 수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최종적인 내러티브를 획득해 나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술래잡기 놀이의 숨은 아이처럼 꼭꼭 숨어 있는 <숨바꼭질>의 스타일이 빛을 발한다.

이 영화의 스타일을 이야기함에 있어 영화 속에 숨겨진 결정적인 비밀을 언급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등 장르 영화에서 이야기의 비밀을 숨기는 장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장치가 무엇이든 영화 보기의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작용을 하였을 때에는 관객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 바로 이 놀라움을 우리는 언제인가부터 반전(反轉)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반전은 대부분 에드거 앨런 포의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즉, <도둑맞은 편지>에서처럼 사건의 실마리는 늘 가까운 곳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범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단지 그것을 대하는 이들이 무심코 지나칠 뿐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독자가 단순히 글에만 의존하여 텍스트를 읽어내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내재하고 있기에 관객에게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방식이 보다 다양해진다.

그렇다면 <숨바꼭질>은 어떠한가? 이 영화의 핵심 플롯은, 실종된 형의 소식을 접한 후 정체 모를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당하는 성수(손현주 분)의 가족이 괴한에게서 안전하게 피신하는 것으로,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플롯이 궁극적으로 형의 행방과 괴한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는 상황과 맞물려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하고 조밀해진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스릴러 장르의 영화가 그러하듯, <숨바꼭질>에서도 영화를 보는 관객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즉, 성수와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그로 인하여 영화 속에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성수의 일거수일투족에 동참하게 된다.

따라서 연출자는 성수와 동일시되어 의문을 밝혀내고자 하는 관객의 탐정심리를 철저하게 따돌려야만 하는데, 이를 위해 <숨바꼭질>은 캐스팅된 배우의 ‘스타 페르소나’로 점철된 ‘초두 효과(primacy effect)’ 즉,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이미지의 영역을 십분 활용한다. 여기서 초두 효과란, 특정 인물이 처음 등장할 때 관객이 형성하는 판단을 포함하여 영화가 설정한 첫인상들을 의미한다.

영국의 영화학자 러쉬튼과 벳틴슨(Rushton & Bettinson)은 이 “초두 효과와 캐릭터에 대한 계속적인 평가는 스타 시스템에 의해 의미심장하게 형성”되고, “스타 연기자가 대표하는 특별한 속성들에 초두 효과를 결합시켜 재빠르고 체계적인 캐릭터 묘사”를 만들어 내며, “일단 첫인상이 형성되면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영화에 의해 강화되고, 해체되거나, 혹은 전복된다.”고 하였다.

이들이 말한 것처럼, <숨바꼭질>에서 형성되는 캐릭터의 ‘보이는 이미지’는 스타 페르소나와 초두 효과에 근거하여 영화적으로 강화되고 해체 혹은 전복되고 있으며, 이는 단조로운 <숨바꼭질>의 플롯에 스타일을 덧입히고 있다. 하지만 이 스타일은 때로 관객을 철저히 농락하기도 하므로 아주 맹랑하고 발칙하다.

 

2.1 스타 페르소나

 

관객에게 보이는 이미지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중 등장인물이다. 그런데 관객은 소위 캐릭터라 일컫는 이 등장인물의 성격과 실제 캐스팅된 배우의 스타 페르소나가 주는 간극이 지나치게 클 경우 어색함을 느낀다. 이것은 때때로 영화의 상업적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박중훈이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에서 탈바꿈하고자 흉악범으로 출연했던 <세이 예스>(2001)가 국내 개봉 당시 참패했던 것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또한, 배용준이 <겨울 연가> 이후 조선시대 카사노바로 분한 <스캔들-조선남녀 상열지사>(2003)가 일본에서 개봉되었을 당시, 일본 팬들에게 형성되어 있던 <겨울 연가>의 ‘준상’이 주는 고운 남자의 페르소나는 호색가 ‘조원’과 마주할 때 그들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이렇듯 관객이 보는 이로 참여하는 영화 안에서 특정 스타가 지닌 기존의 스타 페르소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의 성격과 직결될 수밖에 없고, 이는 관객으로부터 해당 인물이 지지를 받을 것인지 혹은 버림을 당할 것인지에 대한 바로미터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한, 결과적으로 그것은 관객을 영화 속 현실로 끌어들이는 몰입감의 성패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숨바꼭질>에 등장하는 두 주역 배우의 캐스팅은 현명했고, 영화 속에서 그들의 스타 페르소나를 운용하는 방식은 영악했다.

‘성수’로 분한 손현주는 직전의 드라마 <추적자>에서 절정의 연기로 정의감 넘치는 부성애 이미지를 환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각종 TV 프로그램을 통해 정직한 이미지로 신뢰를 쌓아 왔다. 그런가 하면 ‘주희’로 분한 문정희는 여러 편의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주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중산층 여성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왔다. 따라서 이러한 두 배우의 스타 페르소나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을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거나 동정하는 시선을 갖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배우 손현주와 문정희가 지닌 스타 페르소나에 대한 스키마타 혹은 사전 지식은 관객이 영화 <숨바꼭질> 내에서 성수와 주희라는 인물을 통해 마주할 두 캐릭터만의 특성에 대해 준비시킨다. 결정적으로 이 사전 지식은 관객이 성수와 주희를 향해 갖게 될 그 어떤 부정적 대응도 배제하는 작용을 하게 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스스로가 그런 부정적 대응을 저지당했음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관객은 손현주와 문정희라는 스타 페르소나를 입은 영화 속 캐릭터 성수와 주희에게 은연중 도덕적 정직성을 부여하고, 이는 결국 극의 후반까지 이어져 관객이 그들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숨바꼭질>의 캐스팅은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스타 페르소나에 의지한 채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영화 속 비밀은 이야기의 종반까지 안전하게 유지되며, 그 영악한 캐스팅 운용 방식에 힘입어 <숨바꼭질>은 성공적으로 <도둑맞은 편지>의 반전 효과를 획득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스타 페르소나는 관객에게 보이는 이미지와도 같은 것이기에 다양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배우들에게는 때때로 치명적일 수 있다. 즉, 특정 배우의 연기 스펙트럼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숨바꼭질>에서처럼 연출자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활용되었을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 연출자에 의해 영화 속에서 잘 버무려진 스타 페르소나는 배우의 연기 변신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 주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보는 이에게 새로움을 안긴다.

이는 <숨바꼭질>에서 주희로 분한 여배우 문정희를 통해 잘 나타나는데, 주로 조신한 소시민적 여성으로 활약해왔던 그녀가 이 영화 속에서는 사이코 패스적인 여성 괴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은 그녀의 전복된 이미지에서 어색함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놀라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 놀라움의 메커니즘은 이러하다. 남자 주인공인 성수의 관점으로 동일시된 관객이 주희를 응시할 때 영화 속 성수가 그러하듯 여배우 문정희에게서 기대했던 스타 페르소나 그대로 그녀의 캐릭터를 가정하는 나태함을 낳고, 관객은 자신이 부린 이 나태함을 결국 사건의 전모가 밝혀질 때쯤에야 알아차리게 됨으로써 스스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관객은 캐스팅된 배우의 스타 페르소나를 전복 당했을 때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그것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분산시키는 연출자의 내레이션 방식이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숨바꼭질>처럼 진부한 주제와 플롯을 지닌 영화들이 그 진부함을 극복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는 것이다.

 

2.2 초두 효과

 

앞서 <숨바꼭질>이 어떻게 스타의 기존 페르소나를 영화의 이미지로 활용하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철저하게 관객의 충성심을 담보로 복잡한 게임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감독은 숨은 아이가 되어 내러티브를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분산시키기를 시도하고, 관객은 술래가 되어 그렇게 분산된 내러티브를 하나로 엮은 뒤 전체 그림 혹은 그 의미 획득을 끈질기게 시도하는, 어찌 보면 이 영화의 보여주기 방식 그대로가 술래잡기 혹은 숨바꼭질 놀이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숨바꼭질>은 관객과 벌이는 이 술래잡기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어떻게 관객을 제어하고 조종하는가?

관객의 손현주와 문정희를 향한 스타 페르소나는 <숨바꼭질>이 노린 궁극의 초두 효과이지만, 영화 스스로가 결정적 단서를 발설하기 전까지 그 효과가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의 캐릭터를 둘러싼 또 다른 스타일 즉, 주변의 다양한 이미지를 대하는 카메라의 시점에 기대는 바가 크다.

우선, <숨바꼭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응시는 성수의 시점인데, 이 때 성수와 동일시하는 관객은 오로지 성수의 주관적 시점에만 의존한 채 영화 속에서 재현된 현실을 누비게 된다. 따라서 성수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실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관객도 동일하게 그것으로부터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로 관객이 영화 속에서 성철(성수의 형)을 대하는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성철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후반에 발견되기 전까지 동생인 성수의 주관적 시점으로만 등장하고, 그렇게 성수의 시점으로 보이는 성철의 모습은 추하다 못해 괴기스럽다.

이렇게 가족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지는 성철이라는 비밀스러운 인물을 대함에 있어서 관객은 동생인 성수가 그를 향해 느끼는 더러움과 극도의 경멸감에 동조하게 되며, 이는 관객이 성수가 보이는 결벽증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관객은 영화의 중반에 성수의 결벽증이 어린 시절 성수 자신의 소유욕에서 비롯한 형을 향한 끔찍한 거짓말에서 발단한 것임이 밝혀진 이후에서야 비로소 성철에 대한 경멸감을 거두게 되고, 그를 향해 여전히 공포스러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성철에게서 느끼는 이 공포는 영화 말미에 성철 또한 사건의 피해자임이 드러나면서 확실한 연민으로 뒤바뀌는데, 이는 영화 속에서 성수가 갖게 되는 감정 선과 동일하며, 이 연민의 감정에 따라 마침내 성수가 죽은 성철에게 “미안해.”라고 입을 여는 순간 비로소 관객도 성철과 화해하게 된다.

이러한 <숨바꼭질>에서의 카메라 시선은 관객이 특정 인물에 대해 갖게 될 초두 효과를 강화하는 동시에 관객의 시선을 교란시킨다.

이와 같은 카메라의 시선은 영화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하고 있는 주희를 대하는 태도 형성에도 영향을 준다. 결벽증을 가진 성수의 시점을 통해 발견되는 주희의 모습은 재개발 직전의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얼굴에 큰 흉터를 지닌 비루하고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가 성수의 시점을 벗어나 관객의 객관적 시점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은 그녀가 검정색 헬멧을 뒤집어 쓴 괴한으로 변신할 때나 영화 후반에 성철의 행방이 밝혀진 직후부터이다. 사실 영화 속에서 주희가 검정색 헬멧에 가려져 있을 때에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기에 사실상 그녀가 객관적 시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야기의 끝에서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에 대한 관객의 가치 평가는 오로지 성수의 시점에만 의존한다.

이처럼 영화의 결정적 단서가 발설되기 전까지 <숨바꼭질>의 관객은 맹랑한 카메라의 시선에 농락당할 수밖에 없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도 카메라의 시선으로 강화된 초두 효과에 철저하게 교란당할 수밖에 없다. 발칙하게도 그것은 <숨바꼭질>이 관객에게 제안한 진부한 술래잡기 놀이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만들어가는 하나의 스타일을 이룬다.

3. 게임 중독: 왜곡된 충성심

 

스릴러 장르에서 범인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영화의 초반부터 등장하고, 범인을 제외한 주인공들은 그 범인이 저지르는 엽기적 행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때 일반적으로 카메라는 범인을 타자화하여 보여 주기에 관객들은 범인이 아닌 피해자를 자기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고, 덕분에 영화 속 피해자들이 느끼는 공포의 현장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스릴러물의 장르적 성취는 이 공포감의 형성과 전달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숨바꼭질>에서도 이러한 스릴러의 장르적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정체불명의 괴한이 가하는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성수와 그의 가족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이 느끼는 공포감은 괴한의 엽기적 살인 행각에 근원하지만, 그것이 주는 긴장감은 근본적으로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의존하고 있는 스타 페르소나와 초두 효과에 의해 철저히 유지되고 보호 받는다.

<숨바꼭질>의 이 두 가지 이미지 전략이 플롯의 진부함을 극복하고 관객에게 새로운 만족감을 선사하기 위함이었다면, 그 전략은 비교적 잘 맞아 떨어졌다. 그렇다면 그것은 <숨바꼭질>을 보는 관객에게 만족감이나 몰입감 이 외에 또 어떤 심리 작용을 일으키는가?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두 주인공 즉, 성수와 주희에게서 느끼게 되는 양가적 감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쫓고 쫓기는 잔혹한 술래잡기 놀이 그 끝에서 드디어 마주하게 되는데, 이 때 둘은 모두 자신의 가면을 벗어 던진 상태다. 성수는 죽은 형과 화해함으로써 결벽증으로 가린 자신의 더러운 위선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주희는 그동안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힘없는 여성의 이미지를 가려준 검은색 헬멧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화가 숨겨왔던 비밀이 마침내 밝혀지는 동시에 모든 서사의 종결을 시사하는 이 지점에서조차 관객은 두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을 유보한다는 것이다.

<숨바꼭질> 전체에 걸쳐 가장 극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주희를 예로 든다면, 관객은 영화 후반에 드러나는 그녀의 실체를 목격한 직후 두 번의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우선, 1차적인 당혹감은 여배우 문정희라는 스타 페르소나와 초두 효과로 유지된 주희의 이미지 즉, 재개발이 예정된 낡고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도시 빈곤층 여성의 비루한 모습이 일순간 전복됨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곧이어 주희의 그런 실체에도 불구하고 관객 스스로가 여전히 주희를 동정하고 있음에 2차적인 당혹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원초적 본능>(1992)의 캐서린 트라멜(샤론 스톤 분)과 <컬러 오브 나이트>의 로즈(제인 마치 분)의 실체와 마주한 관객이 느끼는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그 당혹감은 배가된다.

관객의 동정심은 주희의 캐릭터를 향해 영화 초반에 형성한 충성심에서 비롯하는데, 영화평론가 스미스(Smith)는 이 같은 관객의 충성심이 “허구 속의 다른 캐릭터와 비교하였을 때 바람직하거나 적어도 선호할 만한 특징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그를 평가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한 바 있다. 즉, <숨바꼭질>을 보는 관객이 주희를 다른 인물들과 비교하였을 때 적어도 그녀를 선호할 만하거나 그녀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용인할 만한 특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에는 관객이 주희에게 선한 인상을 품을 법한 결정적인 장면이 들어있는데, 영화의 초반에 주희가 성수의 아내 민지(전민선 분)와 두 자녀를 미치광이로부터 구출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 관객은 주희라는 인물에게 높은 수준의 신뢰를 형성하게 되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도시 빈곤층으로 살아가는 주희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신뢰와 연민은 여배우 문정희라는 스타 페르소나와 어우러져 강력한 초두 효과를 만들어 낸다.

결국 관객의 특정 캐릭터를 향한 충성심은 이와 같이 영화 속에서 의식적으로 조작된 캐릭터 이미지에 영향을 받아 발현하고, 그것이 만들어 낸 강력한 초두 효과에 힘입어 쉽게 전복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영화에서 주희라는 인물 자체가 노숙을 하다 남의 집에 숨어 들어와 사는 도시 빈곤층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것은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는 현 사회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는 한 개인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기에 관객은 그녀에 대한 충성심을 쉽사리 버리지 못한 채 여전히 연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택시 드라이버>(1976)의 관객이 트래비스 버클(로버트 드니로 분)에 대해 느끼는 연민과도 닮아 있다.

이렇게 볼 때 <숨바꼭질>의 관객이 주희의 괴물스러운 행위에 경악하면서도 그녀를 연민하며 날선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왜곡된 충성심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의 종반부에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그 중심에 주희가 있었음이 드러나는 순간 그녀는 이렇게 울부짖는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는데!”

 

주희가 저지른 살인 및 강탈 행각은 위의 대사로 드러나는 스스로의 인식과 달리 명백히 비윤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주희를 연민하는 스스로로 인하여 혼란에 빠지게 되지만, 관객이 그녀에게 왜곡된 충성심을 발휘한다는 것이 단순히 그녀의 비윤리적 행위를 용인하거나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러쉬튼과 벳틴슨에 의하면 그것은 영화 속 특정 “캐릭터가 소유한 다양한 도덕적 특징의 합성물”이 관객들에게 “고차원적 정서(양가적이고, 복합적이고, 복잡한 정서적 상태)에 바탕을 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잔상일 뿐, 관객은 이미 그것이 실제 현실이 아니라 은막 너머의 세상에서 재현된 영화적 현실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게임의 끝

 

이처럼 <숨바꼭질>은 이야기의 태생적인 진부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스타 페르소나와 초두 효과 그리고 그것에서 발현하는 왜곡된 충성심 등 여러 가지 이미지 전략을 활용하고 있고, 그 전략들을 <도둑맞은 편지>의 구겨진 편지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분절된 플롯 속에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그 진부함을 명석하게 극복하고 있다. <숨바꼭질>이 보여준 이러한 내레이션 방식은 영화 속에서 테마곡을 활용하는 방식과도 일맥상통하다. 즉, 너무나도 잘 알려진 숨바꼭질 노래를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변주된 화성을 들려줌으로써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고, 그럼으로써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맞는 미묘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술래가 순라(巡邏)라는 조선 시대 야간 경찰의 직함에서 왔고, 그들의 임무가 야간 범죄를 소탕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갑(순라, 술래), 을(범죄자, 숨은 아이)의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갑(술래)과 을(숨은 아이)의 싸움으로 이루어지는 술래잡기 놀이는 ‘욕망’이라는 측면에서는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 다시 말해, 놀이에서 술래는 신속히 숨은 아이를 발견하여 역할을 바꾼 뒤 자신이 숨은 아이가 되기를 바라고, 숨은 아이는 영원히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를 바란다. 즉, 갑은 을이 되기 위해, 을은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며 을로 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형국이기에 참으로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

그러나 이것이 놀이가 아니라 실제 삶이었다면, 갑은 자신의 소유를 지키며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을은 현재의 소유에 만족하지 못한 채 갑이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엇갈린 현실적 욕망이 영화 <숨바꼭질>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숨바꼭질>의 비극성은 아무런 죄없이 소외당한 성철의 죽음을 통해 더욱 비통해지고, 소유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스스로 화염 속으로 몸을 던지며 최후를 맞이하는 주희의 모습에서 절정에 이른다.

숨은 아이일 수밖에 없었던 주희가 술래가 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소유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체훼손을 통한 공포 유발과 긴장감 환기는 전통적인 스릴러 장르의 방식이기에 진부하며, 무엇보다 여성의 욕망이 처단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는 다소 보수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헬멧을 뒤집어씌운 채 스크린을 오가게 만들기는 하였어도 결국 이 영화에서 주희라는 여성의 관점으로 이루어진 서사가 하나의 큰 축을 담당한다는 점에서는 이 영화 <숨바꼭질>이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술래가 되려다 숨은 아이로 남겨져 버린 주희는 성수와 최후의 대결에서 이렇게 절규한다.

 

“우리 집이야! 왜 우리 집에서 난리냐고!”

 

그녀의 바로 이 괴물스러운 행위로 인하여 놀이로서의 숨바꼭질은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나 삶으로서의 <숨바꼭질>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공포스러운 게임의 현장임이 더욱 극명해진다. 더군다나 이러한 방식으로 유발되는 공포는 그 주체가 주희의 딸 평화(김지영 분)로 이어져, 마치 아무도 몰래 심어 놓은 씨앗처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채 여전히 나의 생활공간 어디선가 조용히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더욱 소름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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