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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된 질서와 두 개의 음(音) -박판식과 조연호의 시세계
-이성주

 

1. 밤의 시간

 

상처……라는 단어와 함께 어떤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 밤. 잠을 잘 수도 그렇다고 불을 켤 수도 없는 이상한 밤에, 그런 밤을 만드는 기억이란 무엇일지 생각한다. 그것을 실패한 사랑, 군중 속에서 놓친 어머니의 손,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죽음, 가난……어떤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단지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아픔이야 누구나 겪을 수 있고, 실제로 겪지 않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실패한 사랑이 ‘뼈아픈 후회’로 남아 있다거나, 군중 속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친 아이가 ‘여전히’ 길을 잃고 울고 있을 때다. 그럴 때 기억의 조각들은 순차적인 시간에 나열되는 하나의 점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5살 때 놓친 어머니의 손, 10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유년시절의 가난, 20살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이별은 5살 10살 15살 20살에 겪어야 했‘었’던 일이지만, 현재의 당신을 만들어내기 위한 ‘과거형’의 고정된 원인으로 남기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기억은, 원인과 결과가 뒤섞여 어느 것이 먼저인지도 모르게 침대에 누운 당신을 당신‘들’로 조각내는 ‘현재형’의 아픔이다. 그래서 당신은 잠들지 못한다. 그래서 당신은 깨지 못한다. 당신이 처한 그 시간을 ‘밤의 시간’이라 부르자. 그런 밤의 시간에는, 잠의 세계와 깸의 세계를 오가며 조각난 파편(기억)들을 모으거나, 이미 조각난 파편을 더 잘게 조각내는 수밖에 달리 할 것도 없다.

“오늘의 시간에는 질서를 부여하는 리듬이 없다.”는 한 철학자의 말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밤의 시간을 겪은 당신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몸으로 감각하고 있을 테다. 이미 우리는 질서 정연한 리듬의 시간을 살고 있지 않고, 그 ‘우리’ 중에는 시인이 있다. 시(詩)가 기본적으로 리듬을 바탕에 두고 있는 장르라고 한다면, 질서를 부여하는 리듬이 없다는 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은 역시 시인일 것이다. 그러나 질서를 부여하는 리듬이 없다는 말은,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 리듬(만)은 존재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지점이 젊은 시인들이 미적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그럴 수밖에 없는) 토대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질서와는 무관해 보이는 시에 우려 섞인 눈총을 보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험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나 우려 섞인 시선에는 그들의 시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을 때가 많다. 당연하지만,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 리듬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는 (질서를 찾기 어려우니까) 실패할 확률이 높다. 과연, 그 실패가 두렵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옹호든 우려든, 어떻든 간에 낯선 리듬에 대해 들여다보는 시도가 전제되어 있지 않은 논의들은 모두, 껍데기일 뿐이다.

밤의 시간에 관해서라면 많은 시인들이 저마다 겪을 테고 또 그에 대해 쓰고 있겠지만, 뚜렷한 음(音)을 발산하는 시인들은 흔하지 않다(뚜렷한 음이라는 말과 질서 있는-완결된 음은 다른 말이다). 밤의 시간과 낯선 리듬에 관해서라면 두 명의 시인, 박판식과 조연호를 떠올리는 것에 무리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란히 첫 시집을 냈던 두 시인은, 어느 사이엔가 조각난 파편을 모으거나 파편을 더욱 조각내는 놀이에 심취해 파편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시집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 같다. 박판식의 세계에서는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타박타박 걸어가”(「화남풍경」『밤의 피치카토』)는 소리가 들리고, 조연호의 세계에서는 “나의 밀실 어디쯤이었을” “어두운 밀밭”에서 “붉은 매화처럼 피었다”“소리”“소리 없는 것들”(「自序」『죽음에 이르는 계절』)에게까지 도달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니까 껍데기는 가라, 들어야 할 시간이다.

 

 

2. 현(絃)과 손가락

 

‘밤’은 고요함과 어둠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채워져 있다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안온한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고요함과 어둠은 줄을 퉁기는 퉁퉁거리는 소리에도 쉽게 흔들려, 채워져 있던 어둠과 고요함은 순식간에 ‘소리’로 가득 차게 된다. ‘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무기력하게, 가지고 있던 것들을 쉽게 내어준다. 소리는 ‘밤’의 공간을 쉽게 채우고, 다시 쉽게 나간다. 나간 뒤에 ‘밤’은, 다시 고요함과 어둠으로 채워져 있지만,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 묻은 여운, 잔상 같은 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절친한 점쟁이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 문지방

에다 붙여주었다

장밋빛 손가락은 체온도 활기도 없는 내 소지품들 속

에 섞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찾아와 그 손가락을 가리켜 이르길

더러운 샘은 왜 파놓았느냐

그러나 내 더운 피를 다 빨아먹고 생긴 더러운 샘이

지진 같은 굉음의 푸른 줄기 하나는 보아야지

1-「밤의 피치카토」전문

 

앞서 말한 ‘밤의 시간’에 대해 부연하자면, ‘밤의 시간’은 인과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파편화된 조각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위의 시를 읽으면, ‘절친한 점쟁이’라는 말과 ‘손가락’이라는 말을 ‘밤의 시간’과 ‘피치카토’(손가락으로 현을 퉁기는 주법)의 음(音)으로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음은 ‘고정화된 시간’이 아니라, ‘절친한 점쟁이’라는 다른 시간에서 온 손가락이어야 낼 수 있는 소리다. 그러니까 현을 퉁길 수 있는 손가락은, “열한 번째 손가락”(2-「음(音)」)이며, 이 세상에 없는 것이어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이라는 말은, 시인이 “사실은 못쓰게 된 동전들이야 말로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니다”(2-「하이델베르크로 가는 두 번째 여행」)라거나, “고양이는 아름답고 불필요한 동물이에요/그게 가장 마음에 들어요”(2-「우아하게」)라고 말하듯이, 세계가 쓸모없고 불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실은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시인 자신의 미학을 바탕에 두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없는, 혹은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손가락이 퉁기는 소리-‘지진 같은 굉음의 푸른 줄기’는 ‘세상에 없는 것이 곧 존재하는(아름다운) 것’이라는 명제를 만들어 내는 음(音)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좀처럼 한 가지 생각에 초점을

맞추지 못 한다

1-「그리운 가족」부분

산다는 것, 도무지

갇혀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2-「파트너」부분

 

누구든 인생을 체념하면 별것 아닌 존재가 된다

2-「결별의 불」부분

 

그러나 애초에 ‘밤의 시간’이 파편화된 기억의 모임이었듯,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음(音)은 좀처럼 붙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 시간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흔들의자에 앉아 이리저리 흔들리며 몽상하는 일, 즉 ‘밤의 시간’의 일부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 그것을 무의식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은 별로 없는 일이다. 때문에 앞뒤로 흔들리던 생각의 종착점이 ‘갇혀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는 허무한 인식에 도달할 수밖에 없고, 다른 한 쪽 편에 ‘인생을 체념하면 별것 아닌 존재’가 된다는 말을 세워놓고 겨우 균형을 잡으며, 시인은 시를 아스라한 지점에 놓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더라도 몽상의 시간을 피하려 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을 때 나는 희미해지거나 아름다웠다”(2-「A에서 A까지의 귀머거리」)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때문에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는 희미한 몽상의 시간이 시인이 가까워지고자 하는 기본형의 리듬이라면(1-「화남풍경」과 2-「가족사진」이 그에 가까운 리듬의 시다), 기본형을 흔드는 줄다리기의 긴장된 음(音)이야말로, 시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만드는(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는) 피치카토의 리듬이다.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드는 기본형의 리듬에, 존재를 분명하게 만드는 허무와 생의 의지라는 이중 리듬의 개입이 박판식의 음들을 단일한 완성곡으로 남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미완성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돌출된 문장을 시집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문장은 일종의 잠언투로 보이기도 하고, 시인의 육화된(일상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탄식 혹은 감탄으로 들리기도 하나, 어찌됐든 박판식의 시집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리듬과는 어울리지 않는 문장임에는 틀림없다. 그 문장들을 편의상 허무함과, 생의 의지라는 편으로 각각 나누어 본다면 대충 보아도 여러 문장들을 나열할 수 있다.

한랭의 기후를 견뎌낸 나무들을 누군가 전지하고 있/다 (1-「그리운 가족」)

손에 쥐어지는 완벽한 구근은 없다 (1-「사과 위의 과도」)

대부분의 인생은 이미 마침표를 얻은 법칙들입니다(2-「발가숭이들의 거짓말」)

누구라도 자신의 꼬리에만 몰두하는 법이다(2-「口」)

 

새의 반발력을 오른편 손바닥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1-「인생의 전진」)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가망 없는 욕망이 꿈틀거린다(1-「사월의 비」)

생존의 욕구 때문에 화가 나는 것도/당연하다(2-「당신의 이름이 태어난 자리」)

너를 아름답게 만들지 못한다면 결코 사랑은 아니다(2-「언제나」)

 

위의 문장들은 ‘나’가 ‘갇혀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허무한 인식과 겹쳐지고, 아래의 문장들은 앞서 말한 ‘생의 의지’라고 부를만한 것에 가까운 문장들이다. 물론 두 문장은 완전히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고, 제각각의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거나, 얽혀 있을 때가 많다. 가령, “운명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그게 낫다”(2-「결별의 불」)라거나, “무엇인가를 죽이려면/부피와 질량보다는/그것의 시간을 죽여야 합니다”(2-「옮기다」)와 같은 문장은 허무함의 소산인지 생의 의지의 발현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여하간 “너의 육체를 짜고 또 푸는”(1-「사육」) 사이 어디쯤의 문장일 것이다.

박판식의 리듬은 “깨진 거울로 조각난 표정을 맞추는 놀이”(2-「토르소」)의 소산이다. 그러니까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박판식의 피치카토의 음은 어쩐지 슬프게 들린다. “괴로운 것은 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2-「해후」)라거나 “죽고 싶은데/죽지 못한 사람이 미치는 법이니까”(2-「물벌레들의 하루」)라거나 “온갖 얘기 소곤거리는 새들의 세계로 돌아가기에는/나는 근심이 너무 많았다”(2-「새」)는 것을 느끼며 “인생 계약을 파기하는 방법”(2-「찬드라의 손」)을 찾는 것에서, 어쩐지 놀이가 끝날 것을 예감한 아이의 불안한 눈빛을 떠올리게 한다. 놀이는 언제까지 계속 될 수 있을까? 질문을 끌어안은 아이의 불안한 눈빛이 들려주는 위태로운 리듬, 그것이 박판식의 음(音)이다.

 

 

 

3. 적(?)과 흑(?)

 

“밤이 만드는 어둠의 질서”(3-「맹지(盲地)」) 속에서 “밤의 총합이 나라는 조각으로 나뉘고 있었다.”(4-65쪽)는 조연호의 세계도 ‘밤의 시간’을 겪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연호의 ‘밤의 시간’은 어떤 상황이 추가되어야 한다. 이를 테면, ‘밤의 시간’을 겪고 있는 ‘나’가, 기억의 조각 중 하나인 15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는데, 어머니가 들어와 네 아버지는 네가 16살 때 죽었다고 말하는 상황 같은 것. 그렇다면 15살부터 16살까지의 아버지는 무엇인가. 1년의 시간동안 아버지는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그런 질문들은 기억을 더 이상 실제라고도 허구라고도 할 수 없는 경계에 놓는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은 죽은 아버지가 다시 죽어가는 시간이면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모호한 시간이 된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시간과 또 다른 시간의 겹이 단순히 과거-현재-미래의 조각이 모여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에는 없는 완료형의 시간, 이승과 저승이 구분되지 않는 시간까지도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문장이나 하나의 단어에 여러 이미지가 겹으로 포개져 있을 때가 많고, 한국어의 문법구조에는 익숙하지 않은 시간의 겹이 조연호 시에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기본이 낯선 리듬’을 『암흑향』에 여러 번 제목으로 쓰이는 ‘적(?)’이라는 한자를 사용하여 ‘적의 리듬’이라 부르자. 이 한자는 부적이라는 뜻 뿐 아니라, 가리키는 모양, 귀신이 죽어 또 귀신이 되는 것 등의 의미가 있고, 어조사의 역할까지 한다. 이 한자는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죽어 또 귀신이 된 너와 만나 즐거웠다”(5-「적?」외 다수)는 문장처럼, 이미 ‘귀신이 죽어 또 귀신’이 되는 ‘시간의 겹’이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문장처럼 직접적으로 하나의 의미를 표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체로 여러 의미가 응축되어 하나의 문장에 담기는 경우가 많다. 시집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그런 문장은 무언가가 ‘겹겹’이 쌓여 있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밤의 무늬는 교양의 싸움들로 채워진 독경사의 구역질처럼 겹겹이 두려운 별을 싹 틔우고 있었다”(4-109쪽)같은 문장이 표현하는 분위기가 그럴 것인데, 그런 분위기는 “세계관을 하나씩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나의 세계는 더는 나뉠 수 없는 박약이 되었다”(3-「저녁 수집벽」)라고 하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여하간 조각난 기억을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교차(交叉), 겹, 복층 등 뭐라고 해도 좋을 이 지점(‘적의 리듬’)이 조연호의 시를 특징지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많은 평자들이 두 번째 시집부터 조연호의 시가 크게 달라졌다고 지적하지만, 오히려 ‘적(?)의 리듬’에 가장 가까운 시는 첫 번째 시집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왼발을 저는 미나, 미나는 지금 페리호를 타고 3시간

남짓 떠나는 물 위의 어떤 여행. 미나의 허무한 이름들

은 늦여름까지 계속 산등성이를 뒤덮는다. 백사장 끝

에 서서 미나가 구토한다. 깨진 창문은 아름다웠는데,

방 안에 꾹꾹 찍힌 구두 발자국들은 아름다웠는데, 방

문을 열면 죽은 미나가 흉한 냄새로 사람을 반기곤 했

다. 아무도 네 어린 딸이 울고 있다고 미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1-「왼발을 저는 미나」전문

 

‘왼발을 저는 미나’는 ‘페리호를 타고 3시간 남짓 떠나는 물 위의 어떤 여행.’이라는 문장을 ‘지금’이라는 한 순간으로 압축해서 먹어버린다. 응축된 시간, ‘적의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미나’는 ‘단 하나’가 아니라 이름‘들’이며, ‘단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허무한’ 이름들이다. 이름‘들’인 ‘미나’는 사람일 수도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물건이나 벌레, 혹은 ‘흉한 냄새’라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떠올려지는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미나’는 미지수이며, 미지수이기 때문에 무엇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도 가능한 미지수 ‘미나’를 ‘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박판식의 말에 의하면, “신은 아마 절름발이일 것이다,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2-「번쩍거리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조연호의 시 곳곳에도 절름발이와 ‘신’을 연관시킬 수 있는 구절이 다수 등장하지만 말이다.

 

달밤의 절름발이가 되는 날(3-「칸나가 핥는다」)

오늘 밤은 귀신에게서 나의 가루를 묻혀오게 될 것(4-9쪽)

병신의 에필로그가 되게 해다오.(4-65쪽)

추어라, 병신의 춤을. 신접자(神接者)는 웃는다(4-100쪽)

다급한 변의(便意) 속에/신이 되려는 매일의 나(5-「시」)

 

위의 구절 중, 앞의 네 개의 구절을 통해 밤-귀신-절름발이-병신을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조연호의 독특한 ‘밤의 시간’은 ‘귀신에게서 나의 가루를 묻혀오’는, 즉 ‘신접자(神接者)’가 되는 밤이면서, 그런 밤의 ‘나’는 ‘병신’, 즉 ‘절름발이’가 되는 밤이기도 하다. 이런 구절들이 생기는 요인은, 그 제목도 의미심장한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이 되려는 매일의 나’에게서 비롯된다.

 

헤엄을 멈추면 숨을 멎는 회유어(回遊魚)처럼

밥상 앞에서 괜히 먹고 있는 사람처럼

시는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

(...)

신이 되려는 매일의 나를

물과 함께 내려 버렸다

(...)

나 역시 눌러 어둠을 터뜨릴 것이다

5-「시」부분

 

그러나 그런 욕망과는 달리, ‘시’는 ‘헤엄을 멈추면 숨을 멎’거나 ‘밥상 앞에서 괜히 먹고 있는’ 것처럼, 뚜렷한 의지를 지니지 않는 ‘무엇’이다. 때문에 ‘신이 되려는’ 거창한 목적(의지)은, ‘시’에 의해 (변기)물과 함께 내려지는 운명 앞에 하찮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언가’를 한다. 그 ‘무언가’는 ‘나 역시 눌러 어둠을 터뜨’리는 행위인데, 그것은 여전히 ‘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무목적성의 ‘시’와 하나의 「시」안에서 대치상태의 긴장을 유지하도록 만든다.

‘흑’이라는 한자는 검다(黑)에 물(水)이 결합되어, 물을 검은색으로 흐리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한자다. ‘적의 리듬’이 응축이라면, ‘흑(?)’은 응축된 무언가를 터뜨려 퍼지게 만드는 모양(검정색 잉크 몇 방울이 투명한 물에 떨어져 퍼지는 모양을 떠올리자)을 뜻한다. ‘시’가 투명한 물을 투명한 물 그대로 두기를 원하는 것과 반대로, ‘나’가 ‘어둠을 터뜨려’ 검게 만들고 싶은 의지, 그 의지를 ‘흑의 리듬’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연호의 시에는 투명한 물은 점차 짙어지고, 검정색 잉크는 점차 희미해지는, 두 가지 역설의 리듬(적?과 흑?)이 동시에 진행된다. 때문에 조연호의 세계에는 시를 쓸수록(목적이 있으니까) 시(목적이 없는)를 배반하는 특이한 역설적 구조가 생겨난다.

이런 역설은 “뒤집힌 손이 뒤집힌 손을 맞잡았다.”(1-「해피엔딩」), “흰 건반이 뒤집힌 맛”(3-「검은 밤 뒤의 흰 밤」)과 같이 “뒤집힌”이라는 직접적인 형용사로 표현되거나, 가버리셨다, 가버리셨다 두 개의 다른 말을 중얼거리”(3-「관측자의 것」)거나,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같이 태어나는 사생아의 바다”(4-122쪽)와 같이 간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것은 시인이 “창밖은 비극적 세계관이지 않은가”(1-「죽음의 집」)라고 자문하듯, 자신이 보는 세계의 풍경이면서, 집 안 한쪽 벽에 “달력 대신 뭉크의 판화”(1-「죽음의 집」)를 걸어 놓듯, 시인 내면의 풍경이기도 하다. 뒤집힌, 세계와 내면의 만남, 이것은 ‘동일시의 완성’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에 대한 가능만큼이나 불완전에 대한 불가능”(4-33쪽)을 생각하는, 흔하지 않은 미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러니 조연호가 닿으려는 신은 불완전하다. 완전한 신은(시는) 애교가 없어 불행하며, 목적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목적과 의지에 ‘완전히’ 자신을 맡길 수도 없다. 그 또한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닿으려는 신은 ‘절름발이’다. “아주 오랫동안 자기 발목을 깎았고 이제 부러질 것 같은 발목”(2-「새를 볼 수 없는 계절」)을 지닌 ‘미나’ 말이다. ‘오랫동안 자기 발목을 깎’는 ‘미나’가 걸을수록, 무게를 지탱하는 발자국 하나는 더 깊게 파이고, 다른 하나는 더 희미하게 파일 것이다. 깊은 발자국 소리는 짙을 것이고, 희미한 발자국은 옅을 것이니, 시를 쓸수록 짙고 옅은 절름발이의 발자국 소리는 점차 멀어진다. 조연호의 음(音)이 멀어진다.

 

 

4. 피로한 아이

 

박판식 리듬의 독특함이 기본형인 몽상의 리듬과 줄을 퉁기는 퉁퉁거리는 개별적인 소리에서 나온다면, 조연호의 음은 짙고 희미한 교차의 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소리 없는 것들에게 닿는 소리’라는 말이 어울리는 특이한 음이다. 이 둘의 음은 제각각이지만, 둘의 음에는 희미함에 닿겠다는 공통적인 소망이 있다. 그 희미함에 닿겠다는 두 시인의 소망과, 박판식의 “세상에서 가장 많이 불리어 심히 피로한 이여, 네가 바/로 신이다”(2-「오후 4시 51분 15초」)라는 말, 조연호의 “그가 신인 이유는 언제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5-「사물이 필요로 한다」)라는 세 개의 말이 섞이면, 어쩐지 ‘참을 수 없이 무표정한 사내’가 떠오른다.

그 사내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화를 내는 ‘나’와 화를 내는 것을 받아주는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화를 내는 주체이자 대상이다. 우는 사람이면서 우는 것을 달래는 사람이다. 기뻐하면서 슬퍼하고, 권태롭고 즐겁다. 그래서 겉으로는 표정이 없어 보이지만 내면의 표정은 무한 증식하며, 미로처럼 복잡해진다. 아니, 참담해진다. 무엇보다 그 사내가 그렇게 된 이유는, “누구와도 외로움이 섞이지 않도록”(조연호, 3-「조화(弔花)공예」)바라기 때문이다. 이 사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다면, 그것은 그가 그런 표정을 짓고 싶어서 지은 것이 아니라, 포화상태에 이르러 터져버린 것이다. 신이 절름발이라고 생각한다는 박판식이 “더이상 걸을 수 없을 때/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신이었어요”(2-「우아하게」)라고 말할 때, 그러니까 자기 안에 모든 것을 담으려는 그 사내가 신에 닿았을 때, 그는 이미 병신이다.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지경의 절름발이다.

나는 그런 사내를 떠올리는 반대편에, 난해함이 곧 모험이며, 모험이 곧 현대시라는 너무 많은 것을 건너뛰어 아리송한 옹호자들과, 알아듣지 못하겠는 시는 고전(classic)명시가 될 수 없고, 그런 시들은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자들을 함께 떠올린다. 그들은 뭐랄까, 쉽게 말한다. 그들은 쉽게 분노하고, 쉽게 잊어버린다. 쉽게 슬퍼하고, 쉽게 애도하고, 쉽게 누군가를 적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자신은 ‘뭔가 했다’고 생각하고 쉽게 안도한다. 공감과 연대 그리고 분노자본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습관적으로 외친다. 그럴 때 표정이 심각해야, 심각하지 않은 사람들을 타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두 시인의 음을 듣지 못한다. 음은, 무표정에서 터져 나오는 음이기 때문이다. 희미해지고 싶다는 소망이 좌절된 절뚝거림이기 때문이다.

조연호의 세계에서 “참으로 외롭고 나른한 아이”(4-168쪽)“자신을 만질 때 가장 많은 타인과 만나”(4-19쪽)게 되는 아이다. 조연호가 “내가 겨울의 삽화를 구기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무(無)라는 신적 실현을 할 수 있는 한”(4-19쪽)이라고 말하듯, 아이의 내면이 신에 닿기 위해 구기고 구겨진 복잡한 미로라면, “내가 미로의 입구에 반”(4-188쪽)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슬픈 일이다. 아이는 미로에 들어서는 것이 ‘놀이’이고 즐거운 일인데, 그 놀이가 계속되려면 미로는 계속 복잡해져야 하고, 미로가 계속 복잡해지기 위해, 아이는 계속 외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조연호의 아이는 자신을 만지는 아이다. 스스로 갇혀있기를 선택해 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아이는, 실은 누구보다도 많은 타인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시인의 시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은, 놀이가 끝날까봐 불안한 아이와 놀이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외로운 아이가 만들어 내는 음이다. 그러니까 이제, 너무 쉽게 큰 소리 치기보다는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절름발이의 한 쪽 발이, 거의 무용(無用)해져, 땅을 짚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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