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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인, 그러나 전복적이지 않은…… :<피에타>를 향한 질문
- 이채원

1. 들어가며

  이 글은 의문에서 시작된다. 우선, 영화 <피에타>를 보고 난 후의 찜찜함, 그 석연치 않은 느낌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라는 물음이 첫 번째 의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피에타>에 대한 여러 글들을 읽고 그 글들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시각에서 영화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각도에서 다른 강도로 감정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여러 언술들, 게다가 내가 <피에타>를 통해서 본 것들이 영화텍스트 내부에 중층적으로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도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들인데 왜 그것들에 대해 침묵하는지에 대한 의아함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다. 나의 의구심들의 근원을 추적하면서 영화 <피에타>와, <피에타>에 대한 독해가 드러내는 현재 한국사회의 단면이 뿌연 막을 걷고 좀 더 명확해지기를 바란다.

  <피에타>에 대한 문제제기는 두 가지로 수렴된다. 하나는 영화 <피에타>의 궁극적인 지향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주제의식이라 부르건, 감독의 의도라고 하건, 대의라고 하건, 메시지라고 하건, <피에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척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제목에서도 명시적으로 드러나며, 처음 봤을 때 그 조악함에 놀랐던 포스터의 사진 속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메인 카피에서도 제시된 바 있는, ‘자비’를 호소하는 것이라고 일단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많은 평자들이 언급했듯이 ‘자비’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면, ‘자비’나 ‘구원’자체에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일견 성스럽게 추구해야 할 가치인 것처럼 느껴지는 ‘자비’나 ‘구원’이라는 테마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먼저 자비의 주체는 누구(무엇)인가의 문제가 있다. 그것을 너무 쉽게 ‘신(神)’의 영역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작가적 자세가 아닐 것이며 독재자를 위한 영화를 만들어 선동하는 것과 구조적으로 같다. 애초에 선교를 위한 영화가 아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가정한다면 <피에타>에서 ‘자비’의 주체가 누구(무엇)인지를 묻는 일은 중요하다. 나아가 그 주체에게 과연 그럴 자격이나 권리가 있는지 까지도 물어야 한다. 또한, 굳이 지젝의 언술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비를 베푸는 특권”을 떠맡는 일은 진정 오만하고 죄스러운 일일 수 있다. 자비와 평화의 단어인 ‘용서’도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성찰을 우리는 이미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나 ‘구원’이라는 대의 자체는 일단 인정한다고 해도 그 다음의 문제가 남아 있다. 이때의 ‘자비’나 ‘구원’은 체제 순응적인가 아니면 전복적인가의 문제이다. 김기덕 감독은 영화 상영 전부터 <피에타>가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그렇다면 영화 <피에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이 얼마나 진지하고 정치(精緻)한가에 대한 언술이 나올 법도 한데 대부분 <피에타>는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영화라고 쉽게 수긍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피에타>가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영화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생긴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문제제기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피에타>의 테마를 뒷받침하는 서브 테마들에 관해서이다. 그것들은 역시 영화텍스트 속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 ‘폭력’, ‘복수’, ‘모성신화’, ‘가족주의’, ‘정글’ 속 ‘먹이사슬’ 등으로 나열할 수 있겠다. 궁극적인 지향점을 향해서 서브 테마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데, 서브 테마들이 이야기들을 만들고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서브 테마들과 영화 전체의 대주제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작위적인 끼워 맞추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피에타>에 대해서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평한 언술이 있었다. 이 언술을 접했을 때 먼저 ‘정말 그런가? 정말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라는 의문이 생겼으나 곧 질문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라고 묻기 전에 ‘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물으려 한다. ‘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아니 ‘왜 고통스러운가?’ 아마도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언급한 평자는 <피에타> 속 잔혹한 영상들이 보기에 고통스러웠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본다. 잔혹한 영상일지라도 그것이 불필요하게 나열되는데 그치지 않는다면, 자극적 제시 이상의 이유가 있다면, 다시 말해서 영화 속 논리에 부합하다면 그것은 서브 테마들과 대주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장치가 된다. 그렇게 된다면 관객에게 엔딩에서 감동을 얻을 수 있으니까 라스트 신까지 참으라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피에타>에서는 서브 테마들과 대주제와의 연결이 너무 느슨하며 따라서 비약이 심하다. 그 결과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가 된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영화가 된 것이다.

 

2. 내러티브 대신 캐릭터?

 서브 테마들과 대주제와의 연결이 비약적이라는 것은 작위적이라는 것이며 작위적이라는 것은 내러티브의 구성과 전개가 허술하다는 얘기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작위적이며 허술한 내러티브에 대한 문제제기가 종종 있었다. 허구서사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현실세계에서보다 더 치밀한 내적 논리가 필요한데 그것이 엉성하다는 비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러티브 속 최소한의 인과성이나 개연성도 중시하지 않는 것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 스타일이라는 논평들이 제시되었다. 그 대신 캐릭터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아함을 넘어서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일견 <피에타>의 두 중심 캐릭터는 굉장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곧 식상한 캐릭터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고리사채 채권자의 하수인인 강도는 미선을 엄마로 받아들이기 전까지 바위같이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악마 같은 캐릭터로 형상화 된다. 채무자들의 손목을 자르고 죽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서 떠밀어서 불구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어떤 가학성을 보인다기 보다는 그저 감정 없이 자신의 일을 하는 듯하다. 자신의 일에 대한 회의도 가질 필요 없고 자신이 사실상 채무자들과 같은 계급이라는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허위의식도 없다. 굳이 수고스럽게 구하기도 힘든 산 닭을 사서 직접 죽이고 내장을 도려내고 삶은 닭을 소금에 찍어 먹는 강도와 굳이 살아 꿈틀거리는 장어를 사 들고 와서 강도 앞에 내미는 미선은 서로 닮아 있다. 일단 그들이 유사모자가 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또한 강도가 칼을 꽂아 놓았던 나신의 여자 상반신 그림과 후에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선 미선의 사진, 엄마임을 증명하기 위해 강도의 살점을 먹는 장면 그리고 “엄마가 아니라면 그만둘게”라고 말하며 금기시 된 모자간의 성관계를 하는 장면 더 나아가 강도의 자위행위를 도와주는 미선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장면들이 섬뜩하며 생경한 것 같지만 익숙하다. ‘여성=어머니=창녀’라는 남성판타지의 낡은 관습이기도 하고, 몰리 해스켈의 유명한 전언인 “숭배에서 강간까지” 혹은 그 변주인 강간에서 숭배까지를 반복해 온 김기덕 영화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장치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강도의 급격한 변화이다. 강도의 급격한 변화는 <피에타>의 서사구조를 ‘비포 앤 애프터(before & after)’의 구조로 만든다. 물론 그 터닝 포인트는 강도가 미선을 엄마로 받아들이는 지점이다. <피에타>를 “게임의 구조”로 해석한 논평이 있었으나 동의하기 힘들다. 게임의 구조라고 보기에는 속이고 의심하고 속는 과정이 너무 허술하고, 그 과정에서 정말 미선이 자신의 생모라고 믿어서 미선을 받아들였다면 강도가 어리숙한 것이겠으나, 사실상 강도는 미선을 생모라고 믿었다기보다는 미선이 엄마이길 원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해석이라고 본다. 미선과 밥상에 마주앉아서 “내게도 형제가 있느냐”고 묻긴 했지만 그건 정말 형제가 있는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가장(假裝)’이다. 즉 미선이 강도의 엄마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또한 미선이 강도를 속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는 강도의 심리가 중요하다. 강도가 미선이 가져 온 장어를 보고 미선에게 두 번 연속으로 전화했을 때 이미 강도는 무너진 것이며 무너져야 한다. 그래야 이후의 서사가 이어지며 그것이 결말부의 대주제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도의 변화가 너무 갑작스럽고 퇴행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인 줄 알았던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 그 인간적인 모습이 더욱 부각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미선 옆에서 웅크리고 자려고 하다가 “니 방 가서 자”라는 미선의 내침에 “내가 뭐 잘못했어?”라고 어린아이처럼 투정하는 강도의 퇴행적인 모습은 그 급격한 변화의 간극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아 당혹스럽다. 또한 강도의 퇴행적인 모습은 미선과 손잡고 외출했을 때 거리에서 풍선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관심을 갖는 모습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그런 강도의 모습을 비웃는 남자의 뺨을 때리는 미선과 미선을 보호하기 위해 머리에 쓴 풍선을 내던지고 남자에게 달려가서 위협하는 강도의 모습에서 그 두 사람은 사실상 유사하며 강도가 변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퇴행은 변화가 아니다. 무의미한 반복 역시 퇴행일진대 하물며 명시적인 퇴행이 변화나 진보나 저항이나 전복과 연결될 리 만무하다.

 강도의 퇴행적 변화 못지않게 미선의 일련의 행위도 작위적이며 또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만큼 익숙하다. 미선은 강도 때문에 자살한 아들 상구의 복수를 위해 강도를 찾아왔다. 앞서 미선과 강도가 많이 닮아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미선은 강도의 아킬레스건을 영리하게 간파한다. 강도에게는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등의 복수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의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강도에게 접근하며 강도의 폭력도 참고 견딘 미선이 어느 순간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강도의 엄마가 된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며 복수가 완성되는 시점에서는 진심으로 강도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한편 작위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에서 선화가 보여준 이해하기 힘든 변화와 일맥상통하는데 이를 ‘유사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미선은, 비록 ‘복수’와 ‘속임수’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다 내 탓이야. 엄마가 널 버려서.”라는 진부한 대사에서 집약되듯이 모성신화와 가족주의 신화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청계천의 영세한 수공업자 상인들의 삶을 잘 모른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은 어린 시절 청계천에서 구리상자를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피에타> 속에서 묘사된 디테일에 리얼리티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생긴다. 왜 저들은 저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을까? 라는 의문이다. 유사한 직업 유사한 환경 속에 있으면 그렇게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반응하는가? 그들은 정말 손을 자르려고 하면 비명 잠시 지르다가 별다른 저항 없이 손이 잘리고, 밟으면 밟히고 때리면 맞는 사람들인가? 심지어 손이 잘리고 다리가 불구가 된 상황에서도 그들의 저항이나 분노는 하나같이 무력하다. 미선의 복수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그들의 분노를 무력하게 만든 것이라면 이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말아야 하는가? 자본주의 거대기업인 보험회사에서 그렇게 단순한 방법의 보험사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는다는 리얼리티의 문제를 제시해서도 안 되는 것인가? 선뜻 승복이 안 되지만 일단 접어두려고 해도 또 하나의 기시감 때문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 <나쁜 남자>에서도 비슷한 인물화(characterization)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에서 선화가 끌려 간 사창가의 여인들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다. 비슷하게 말하고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 결국 청계천의 수공업자 상인들도 사창가의 창녀들도 개별적인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폭력의 최종 기착점이 될 뿐 아니라 자비와 구원이라는 제의(祭儀)의 들러리가 된다. 강도와 미선이 주인공이므로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하는가? 그들의 개별적인 삶과 개별적인 고뇌와 분노를 하찮은 것으로 치부한다면 과연 자본주의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강도와 미선이야말로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체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약육강식 생존경쟁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속성이 아닌가.

 아무도 개별적으로 주목하지 않았던 청계천의 캐릭터 군상들 중 하나만 분석해보자. 강도가 처음 손목을 잘랐던 남자와 그 아내(명자)이다. 이들은 영화서사 속에서 강도의 악행의 첫 제물이기도 했으며 영화의 라스트 신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인물화 역시 비루하다. 특히 남자의 경우는 그 비루함이 지나치게 전형화 되어 있는데, 강도가 오기 전에 돈을 구하려다 안 되니까 아내에게 “너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불안감과 공포를 섹스를 통해 잊으려 하고, 명자가 강도 앞에서 옷을 벗으며 시간을 더 달라고 간청하다 강도에게 맞는 동안 밖에서 담배만 피우다가 결국 손목이 잘린다. 그리고 사라졌던 그들은, 없어진 미선을 찾아 나선 강도와 다시 대면하지만 남자는 강도의 등장에 분노보다는 공포를 표현하며 숨다가 강도에게 매달려 술값을 달라고 사정한다. 반면 명자는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하려 몸부림치기도 하고 강도에게 저주를 퍼붓기도 하는 등 훨씬 적극적인 캐릭터이다. 또한 강도가 내던지듯 준 돈을 다시 가져가라고 소리치며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명자는 불구가 된 남편 옆을 지키며 그를 먹여 살리는 것일까? 남자가 명자에게 의처증적인 욕설을 하며 술 마시고 학대하는데 왜 그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 아내이기 때문에 당연한가? 불구가 된 남편을 버리고 떠나는 여자는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인가? 라스트 신에서 강도가 명자의 트럭에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기 전에, 강도의 시선에 의해서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서 마치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모습 같은 명자의 행동과 명자를 애절하게 바라보며 안기는 남자의 모습이 조명된다. 그들도 결국 유사모자관계 같다. 모성신화와 가족주의신화가 그대로 작동하며 모든 모순과 죄악을 두루뭉술하게 덮는다. 마치 미선이 강도에게 “니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작동원리이다. 여기서 기존 질서는 공고하게 유지된다.

 

3. 누구(무엇)를 위한 제의(祭儀)인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견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엄마가 아이를 버렸다는 것이 아이의 악행에 면죄부가 되게 한다면 대속을 자처하는 모성이 숭고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폭력적인 구조는 재생산된다. <피에타>의 (유사)모자 관계를 보면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그을린 사랑Incendies>(2010)이 대비된다. 전쟁의 광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중동 지역에서 이교도 남자를 사랑한 대가로 자신의 눈앞에서 오빠가 연인을 죽이는 것을 봐야 했고 갓 태어난 아이까지 고아원으로 보내야 했던 여자, 나왈이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테러리스트가 되고 혹독한 고문을 견디는 정치범이 된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그녀를 굴복시키기 위해 파견된 고문기술자 아부타렉에 의해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하고 결국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쌍둥이를 출산하고 그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로 망명한다. 오랜 시간 후에 그 곳에서 우연히 경악할만한 진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 후 숨을 거두고 아이들에게 기이한 유언을 남겼다. 아이들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편지를 전하라는 것인데, 쌍둥이 자녀인 잔느와 시몬은 그때부터 어머니의 과거와 역사적 소용돌이의 현장을 추적하여 탐색의 서사를 이어가고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들에 직면한다. 자신들이 강간에 의해 탄생했다는 첫 번째 진실만으로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1이었다는 것. 감옥에서 나왈을 지속적으로 강간했던 고문기술자 아부타렉이, 나왈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아들 니하드 드 메이였다는 사실이 무슨 막장드라마가 아닌 강렬한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딸 잔느와 아들 시몬의 탐색의 여정과 나왈의 과거 행적과의 교차편집 과정을 관객도 동행하는 추리와 게임의 서사로 정치하게 풀어갔기 때문이다. 즉 서브 플롯들이 메인 테마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인데, 여기서 ‘분노의 끈을 끊으라’는 나왈의 유언이 더욱 의미심장할 수 있었던 것은 끝내 아부타렉이자 니하드인 아들에게도 진실이 담긴 두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한 통의 편지에는 ‘창녀 72번’ 또 다른 한 통의 편지에는 ‘너의 엄마, 나왈 마르완, 수인 번호 72번’이라는 서명이 불도장같이 니하드(아부타렉)에게 각인되어 이제 그는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한다. <그을린 사랑> 역시 모성신화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희생양을 제물로 바치는 ‘대속’은 없다. 따라서 <피에타>의 라스트 신처럼 종교적이기까지 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않지만, 나왈의 묘비 앞에 선 니하드(아부타렉)의 뒷모습이 롱쇼트에 담겨서 그 먹먹함의 파장이 만만치 않게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을린 사랑>에서는 절절한 모성을 앞세워서 진실을 은폐하지 않는다. 니하드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와 함께 아부타렉에게 보내는 차가운 진실의 고백의 편지도 함께 보냄으로써 아들의 과오를 모성으로 덮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지난한 역사의 흔적들을 가린 장막을 걷게 한 후였으므로 분노의 끈을 끊는 것이 성급한 타협이나 오만한 용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탐색의 여정과 추리의 서사로 인해 “정치적 오이디푸스 신화”로 규정된 <그을린 사랑>은, 그러나, 서브 플롯들의 연결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메시지가 ‘자비’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퇴행이 아닌 성장의 서사로 갈 수 있었다.

  여기서 앞서 제시했던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자 한다. ‘자비’를 베푸는 주체는 누구인가? 또한 <피에타>에서 형상화 하고자 한 자비, 구원, 속죄의 메시지는, <피에타>가 문제시하고자 했다는 자본주의에 저항적인가? 먼저 제목과 포스터가 암시하듯이, 그리고 김기덕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현대의 모든 큰 전쟁부터 작은 일상의 범죄까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공범이며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이처럼 그 누구도 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신에게 자비를 바라는 뜻에서 <피에타>라고 제목을 정했다.”면 자비를 베푸는 주체가 ‘신’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정글 속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이어가며 편 가르기와 싸움에 익숙한 인간들이 신에게 자비를 바라는 것이 ‘겸허한 속죄’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을 소환하여 모든 문제들을 신의 영역에 환원시키는 것은 인문정신과 배치될 수 있다. 이미 지난 세기의 사상가들이 충분히 간파했듯이 모든 종교의 교리에는 당대의 시대상과 사회상이 투사되어 있고, 또한 현재의 불편부당함을 참고 견디게 하는 체제순응적인 기제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피에타>에서 자본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정글 속 먹이사슬에 대한 저항이나 전복이 아닌 순응을 봤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비’나 ‘구원’이 저항이나 전복이 아닌 순응과 마취로 작용함을 느꼈다. 먼저 상구의 엄마이자 강도의 유사엄마인 미선의 죽음으로 모성신화와 가족주의신화를 공고히 하고 이것은 다시 강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김기덕 감독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설명한 라스트 신에서의 숭고한 분위기는 자본주의의 먹이사슬과 구조적인 폭력에 은혜의 눈을 내려 덮어버린다. 먹이사슬과 구조적인 폭력은 가려지고 그로 인해 더욱 공고해진다. 김기덕 감독이 폭력을 미학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그가 기본적으로는 체제 순응적 혹은 체제 수호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폭력은 언제나 강자에게서 약자에게로 향하는 일방통행이기 때문이다.

 

4. 가시적인 변화 속에 변하지 않는 집요함

 김기덕 감독은 한국 관객들과는 “불화”했다는 얘기가 일반적이다. 또한 그가 한국 관객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렬하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리고 평론가들에게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감독이었다. 그런데 <악어>나 <나쁜 남자>가 개봉되었을 당시에는 비판적인 반응들이 압도적이었다. 그렇다면 <악어>나 <나쁜 남자>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듯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나 <비몽> 등은 논외로 하고, <피에타>에 대한 일방적인 찬사(물론 소수이지만 비판적인 글도 있긴 했다)는 어째서일까? 확고한 먹이사슬 속에서 약자를 제물로 소환하고, 특히 여성을 희생양으로 소환하여 가장 하위계층에 있는 남성의 폭력의 대상이 되게 함으로써 그 남성에게 구원의 마리아가 되는, 강간과 숭배를 오가는 모티프들은 여전한데, 어째서 <피에타>에는, <악어>나 <나쁜 남자>와 달리, 긍정적인 글을 넘어서 ‘헌사’를 바치는 글들이 이어지는 걸까? 해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을 우리가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다는 소박한 민족주의일리는 없다면, 이단아 혹은 아웃사이더에 대한 다소 낭만적인 애정일까?

  분명 <피에타>가 <악어>나 <나쁜 남자>와 공유하는 지점들이 있으나 갈라지는 지점도 있다. <나쁜 남자>의 라스트 신과 <피에타>의 라스트 신을 비교해보면 좀 더 선명해진다. <나쁜 남자>의 한기는 끝까지 ‘나쁜 남자’이다. 한기는 트럭에서 뻥튀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선화의 몸을 판다. 그러나 <피에타>의 강도는 ‘나쁜 남자’였다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의 위치로 자리를 옮긴다. 자신에 의해 청계천에서 떠나서 뻥튀기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명자의 트럭에 쇠사슬을 묶어 속죄의 자살을 한다. 그 때문에 <피에타>가 종교적 색채를 덧칠할 수 있었고, 성가(聖歌)의 사운드와 함께 관객에게 “예상치 못한 감동”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기존의 자본주의 그리고 더욱 강화된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의 기본 작동 원리인 약육강식의 질서와 폭력적인 구조를 잊게 하고 그럼으로써 체제에 순응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여기서는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에서 왜 그런 설정을 했는가를, 다시 말해서 왜 도플갱어일 수도 있는 <나쁜 남자>의 한기와 <피에타>의 강도가 결말부에서 다른 길을 가게 했는지를 질문하려 한다. 그 변화의 근원은 종교의 외피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한국 관객을 향한 호소라고 여겨진다. <피에타> 개봉 당시에도 김기덕 감독은 여전히 영화 상영관 문제에 대해 언급했고, 심지어 베니스에서의 인터뷰에서도 한국관객의 인정 혹은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공감은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관객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특정 작가(감독)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은 무조건적인 배타성만큼이나 위험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피에타>의 캐릭터들은 여전히 작위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고, 내러티브의 개연성과 유기적 연결은 미약하며, 대사도 조악하다. 영화에서 대사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대사는 설명도 묘사도 아니다. 대사는 말로 하는 행동이며 인물 형상화에 직결된다. 따라서 김기덕의 영화에서 여전히 대사가 빈약한 것도 분명 제기할 만한 문제이다.

 무엇보다 <피에타>는, 김기덕 감독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문제적이지만 전복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전복적인 텍스트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에타>에서 자본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면, 결과적으로 <피에타>가 자본주의에 대해 전복적인, 최소한 저항적인 텍스트인지는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익숙한 인물화가 반복되는 것에도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적극적이며 당돌하기까지 한 여성들도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자발적’ 창녀이자 어머니가 되어 남성들을 용서하고 보듬는 설정과 맞물려서 처음에는 예외 없이 폭력적이고 악마적이었던 남성들이 후반부로 가면서 연민을 구하는 퇴행적인 인물이 되어가는 인물화의 방식이 시대착오적이며 기존 질서에 대한 확고한 수호의지라는 당연한 비판도 제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김기덕 감독이 정글에서의 게임의 법칙을 신봉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가 형상화 하는 인물은 정글에서 짓밟히는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가학적이면서 자학적으로 정글의 법칙을 수호하려 한다. 그것이 인간 사회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법칙은 정글의 법칙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체중이 100 킬로그램인 사람과 50 킬로그램인 사람을 같은 링 위에 올리지는 않는다. 물론 깡패들의 싸움에서는 다르지만, 우리가 조직폭력배의 질서를 따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최광희 평론가의 언술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탐욕을 실천하는 자에게 명예까지 줄 수는 없다. 그것도 평론의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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