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당선작
2010
2009

2008
2007
2006
2005
2004
2003
2002
2001
2000
1999
1998






[장평]
길 위에서 '사랑'을 묻다 박찬옥 감독의- 파주
[단평]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엄마의 '축제' 봉준호 감독 - 마더

- 유종수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짓 낯선 무표정. 불편한 질문과 침묵, 그 사이를 오가는 혼돈의 기억들. 그리고 왠지 불길하면서도 귀기 어린 공기. 꽤 오랜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박찬옥 감독은 ‘파주’의 안개 속에 우리를 감금시키고 도발한다.
시종일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 박찬옥이라는 작가, 질문을 가진 작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파주>는 비로소 우리에게 질문하는 영화인 것이다.
열린 텍스트로서 가지는 여백과 그 빈 공간에 참여되는 기이한 영화 관람.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들며, 묘하게 영화에 젖게 만드는 것. 이것은 분명 보기 드문 성취며, 박찬옥 영화의 최대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마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길고양이처럼, 도도하고 쓸쓸하며 독보적이다.
첫 장편 <질투는 나의 힘>은 분명 매혹적인 데뷔작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섬 같은 관계를 탐색하는 집요하고도 독한 시선을 가진 영화였다. <오! 수정>의 조연출로 참여했던 박찬옥 감독은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도 가지게 됐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별명이며, 첫 장편 <질투는 나의 힘>에서도 그녀는 홍상수와 사뭇 달랐다. 두 번째 장편인 <파주>는 <질투는 나의 힘>을 넘어선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박찬옥 감독은 이미 여러 단편과 장편 영화에서 자신만의 개성적인 세계를 선보였다. 그의 영화들은 일상의 공간에서 서스펜스적인 긴장감을 유발 시키며, 그 긴장감 속에서도 성숙하고 자유분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런 점이 그녀의 영화들을 독특하게 존재(To Be)하게 만들며,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파주> 또한 앞선 작품들과 일관된 톤을 유지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영화다.

길고양이의 시선으로

우선 박찬옥 감독의 걸출한 단편 <캣우먼과 맨>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액션 시리즈인 ‘캣우먼’을 기묘하게 비튼 수작이며, 대단히 ‘선언적인 작품’이다.
볼링 핀 청소부인 캣우먼은 사회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아웃사이더’다. 그럼에도 그녀가 위치한 공간은 도심의 꼭대기, 옥상이다. 매일 똑같이 출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캣우먼은 무심한 어조로 일침을 가한다. “볼링 핀이 큰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작아진 것”이라는 대사는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향한 독설이며 선언이었다.
캣우먼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복적이며 위험스럽다. 한편 캣우먼의 탈주를 바라보는 길고양이의 시선은 불길하기보단 천진스럽다. 이 개성적인 고양이의 시선은 박찬옥 영화의 출발점이 된다. 이것은 애초부터 ‘묘감도’(猫瞰圖)로서 세계를 바라보겠다는 단단한 각오처럼 느껴진다. 물신화 되고 타락한 인간의 시점이 아닌 고양이의 시점, 이 차별화된 시선이 신물 나도록 익숙한 프레임 속 장면들을 미치도록 낯선 풍경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고양이의 시선은 이렇듯 ‘낯설게 하기’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리얼리티 속에서 ‘환상성’을 획득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세계로 들어가는데, 그것은 가장 일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공간 속에 판타지가 공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고양이는 환상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며 우리에게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을 선사한다.
장 루이 뢰트라에 의하면 영화의 환상성은 스크린에 새겨진 ‘환상성의 문양들’에 의해 구현되며, 그 중에 고양이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문양으로 쓰여 왔다. <시체 강탈자> 같은 영화 속에서 고양이는 살해 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증인, 혹은 공범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단편 <캣우먼과 맨>의 고양이는 비정상적 탈주의 증인이면서, 살해 당하는 공범자로 사용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또한 그 고양이는 박찬옥 영화에서 쭉 동행하며, 마치 그림자처럼 아스라하게 그 존재를 느끼게 만든다.
물론 영화 <파주>에선 직접적으로 고양이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굳이 찾는다면 주인공들의 서먹한 밥상 너머로 지나가는 고양이 울음 소리 뿐이다. 그러나 <파주>는 증인이나 공범자가 아닌 천진난만한 고양이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 자체로 안개 속 어둠을 응시하며 등을 곧추세운 고양이 같은 영화다. 더 정확히는 ‘길고양이’의 운명을 잉태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길거리를 배회하며 양식을 구하고, 사랑을 만나고, 빈집에 새끼를 낳고, 길 위에서 죽음을 맞는 길고양이의 일생. 그 길고양이의 일생이 은모(서우)와 중식(이선균)의 한 때와 너무 닮아 있으며, 영화가 끝난 뒤 이어질 그들의 생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이런 점에서 <파주>는 길에서 탄생한 일종의 로드무비이며, 그 길 위에서 사랑을 묻는 영화다.

떠남과 돌아옴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로드무비의 범주로 분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여행’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순간이동 하여 일상을 떠나고, 다시 극장을 나서는 순간 일상으로 돌아온다. 간단명료하게 영화와 현실을 분리할 순 없지만, 영화를 통해 우리는 늘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한다. 돌아오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조명이 켜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나는 <파주>는 떠남과 돌아옴의 영화다.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파주를 떠났다가 돌아오며, 혹은 왔다가 떠난다. 영화는 은모가 파주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시작된다. 무표정한 시선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는 은모, 그리고 뒷좌석에 앉은 중년의 나이트클럽 사장. 그들의 파주로의 귀환을 담은 이 오프닝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은모는 영화에서 가장 많이 떠나고 돌아오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당면한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길을 찾아 떠나는 도피자이며 여행자이다. 그것은 우리도 숱하게 자신에 질문했던 것, 영화를 보면서도 의문을 가졌을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녀의 첫 번째 가출은 언니와 형부를 관계를 거부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반항에 가까운 것이다. 두 번째 가출은 비로소, 그녀가 자신 안에 스며든 사랑의 감정을 인식하고 나서 일어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에 근접하는 순간, 은모는 형부와 주변사람을 배신하며 떠난다. 하지만 이 떠남의 행위 또한 그녀가 선택한 사랑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영화는 은모가 파주로 돌아오는 장면 뒤에 다시 8년 전으로 유턴해 중식의 떠남과 돌아옴을 보여준다. 금기의 대상이며 동경의 대상인 첫사랑 선배와의 상처를 갖게 된 중식은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파주로 온다. 그에게 파주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점에서, 떠남의 행위 자체가 구원을 향한 몸부림처럼 여겨진다. 그는 이곳 파주로 와서 죄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며, 은모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예수와 유다에 대한 인용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영화에서 보여지는 또 하나의 떠남과 돌아옴이다. 그것은 나이트클럽 사장이라는 제3의 인물의 떠남과 돌아옴이다. 그는 우연히 은모와 같은 택시를 타고 와서, 이해관계가 해결되자 파주를 떠나는 인물이다. 권력과 자본의 상징이며, 은모에게는 강력한 아버지이자 남성의 상징으로 느껴지는 이 인물의 떠남과 돌아옴은 이중의 플롯으로 영화를 증폭시킨다.
오프닝의 돌아옴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떠남. 이 마지막 떠남이야말로 영화를 폭발적으로 만들어버린다. 떠나는 은모와 나이트클럽 사장의 잠깐의 마주침, 그 은밀한 눈빛 교환. 그 가운데 도도하게 눈을 내려 뜨며 자신의 길을 가는 은모의 표정은 곧 영화 <파주>의 표정이며, 이 영화가 독보적이며 혁명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중첩되는 떠남과 돌아옴 속에서, 영화는 미묘한 긴장감을 조성하며 삶의 여러 층위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 다양한 삶을 지닌 인물들은 어쩌다 길 위에서 스치며, 어쩌다 한 공간에 만나,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그리고 다시금 하나의 삶을 더 얹은 채 인생이라는 길을 떠난다.


파주, 어디에도 없는 불행의 땅

이 영화의 제목이자 중요한 공간이 되는 ‘파주’는 사실 ‘파주’가 아니어도 좋다. 어쩌면 그들은 파주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만나도 좋다. 파주라는 지역을 어떤 특정 정치적 고발을 고려해 선택한 공간도 아니다. 이곳은 어떤 공간이라도 대체 가능하다. 어쩌면 영화 <파주>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파주는 영화에서도 그 공간적 정의가 모호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처럼 안개가 빈번한 곳이기에 필연적으로 파주라는 공간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영화 속 파주 또한 ‘무진’처럼 어디에도 있으며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철거민들은 왜 파주를 지켜야 하며, 은모 자매는 왜 부모님이 남겨준 집을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도 분명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이주 지원 대책에 대한 불만, 부모에 대한 책임감 등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여기서 파주는 그런 공간으로 쓰이지 않는다.
영화 속 파주라는 곳은 인물들이 만나고 스치는 장소다. 파주는 어쩌다 마주치는 공간, 혹은 어쩌다 머물게 된 정류장 같은 공간인 것이다. 이곳은 예기치 않은 만남을 만들며, 안식과 고통을 함께 제공한다. 이런 공간의 역할을 때론 의외의 인물들이 대체하기도 한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어쩌다 함께 자게 된 하숙집 딸 혜옥(서영희), 어쩌다 인연이 닿아 결혼까지 하게 된 은수(심이영)는 모성적인 안온함과 파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하숙집 딸은 원상을 궁지로 몰아 연적이었던 편집장의 집에 기거하게 만들며, 은수는 그녀 몸에 있는 화상의 흔적으로 중식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게다가 궁극적으로 그녀의 사망은 중식을 또 다른 불운으로 치닫게 한다.
이런 점이 파주라는 곳을 너무도 일상적이며, 끔찍한 공간으로 만든다. 그곳은 엄연한 현실이며, 인물들이 발을 담그고 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쨍쨍한 목소리로 데모를 선동하는 첫사랑 선배(<파주>), 이미 편집장에게 빼앗긴 연상여자 성연(<질투는 나의 힘>), 미술을 전공한 첫사랑 선배(<잠복>)로 상징되는 동경과 이상의 세계와의 괴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공간이다. 그것이 불화를 만들며, 이곳 파주를 불행의 땅으로 만드는 결정적 이유다. 일상에 발을 딛는 동시에 인물들은 자신들의 이상과 갈등을 일으키며,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곳에 머물지만 언제든 떠나길 희망한다. 그러나 중식은, 파주에 머물며 은모를 기다리면서 떠남을 유보한다. 아직 죄의식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이상 갈 곳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 불행과 불화의 땅, 파주라는 공간은 허상인 동시에 폐허에 가깝다. 그곳은 은모에겐 이미 원형이 훼손된 기억의 장소이며, 부모가 부재하는 결핍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파괴되는데, 그것은 굴착기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괴기스럽고 신경증적으로 느껴지는 포크레인의 이미지. 이것은 이미 <캣우먼과 맨>에서도 목격된 적 있는, 신경숙 소설 <배드민턴 치는 여자>에서 보여 지는 포크레인의 상징과 닮아있다. 남성성, 폭력성으로 대변되는 이 굴착기는 (이유는 모르지만) 그녀가 지켜야 하는 그 공간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폐허에, 은모와 중식은 길고양이처럼 거처를 만들고 차를 팔고 잠시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물론 그들도,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파주라는 곳에서 둘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파주라는 정류장에서 마주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그들의 사랑이 중심으로 향하지 못한 채 주변에 맴도는 건 바로 이 결함 있는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데 있다. 그곳은 너무 많은 기억과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파주는 사랑하는 자리마다 폐허가 되는 ‘불행의 땅’인 것이다.

형부와 처제, 그들은 사랑했을까

영화의 말미 형부는 처제에게 고백을 한다. “단 한 순간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이다. 이 당황스러운 고백 앞에서 우리는 의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형부는 처제를 사랑 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여느 멜로처럼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 형부인 중식의 관점에서 처제 은모에 대한 갈망의 숏이 거세돼 있기 때문이다. 중식을 연기한 이선균 조차 “과연 둘이 언제부터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는 건가” 감독에게 질문했을 정도다. 이 영화가 철저하게 중식을 관찰하는 대상으로 봤다고 해도 무방하다.
때문에 오프닝 시퀀스 이후 전개되는 중식의 8년 전 플래시백은 은모에 의해 윤색되고 변형된 기억이라는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이 부분에서 어쩐지 연대도 불분명하고 어설픈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투명하고 흐릿한 안개의 이미지와 함께 이 영화 전체를 소녀의 성적 욕망과 강박에 대한 기억으로 읽어내는 것 또한 매력적인 해석이다. 그만큼 이 영화가 은모의 시점에서 방점을 찍고 있으며, 중식의 시점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취하는 드러냄과 드러내지 않음, 그 균일하지 않은 전개 방식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금기’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분명 영화 <파주>에는 불온한 욕망과 충동들이 팽팽하게 존재하고 있다. 단편 <있다>에서의 동성애적 충동을 비롯해 <잠복> <질투는 나의 힘>에 이르기까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결핍과 갈망이 영화를 움직이는 중요한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랑에 대한 욕망과 충동은 의식 저편에 가라앉아 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중식의 말을 빌리자면 ‘해서는 안 되는 말, 할 수도 없는 말’, 즉 금기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그 금기를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 중식과 은모는 각기 다른 포지션을 취한다. 중식은 금기를 탐할 때마다 좌절을 겪으며 죄업을 쌓아가는 인물이다. 무언가 갚아야 할 게 많아진 중식은 철저히 현실 세계에 발을 딛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은폐하고 위장한다. 중식이 은수의 좋은 남편이기보다 은모의 좋은 보호자를 자처한 것도, 바로 그런 선택을 반증한다. 자신을 억압하며 순응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 중식이 은모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크린에 투영된 중식의 욕망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은모는 처음엔 자신의 욕망을 알지 못한 채 배회한다. 자신의 욕망이 금지된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녀가 떠나는 것도 금지를 인정해서가 아닌, 그 금지를 인정하지 못해서라는 걸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진실을 알고자 한다. 그녀에겐 떠남과 돌아옴이, 사랑에 대하는 자세이며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번번이 그 둘의 멜로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그들 자신이 쳐놓은 ‘심리적 바리케이드’라는 점이다. 중식은 자신의 욕망을 풀어놓는 대신, 구도자와 같은 삶을 산다. 그가 인권 운동과 철거 시위에서 앞장서는 건 일종의 종교적 희생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사회적 코드에 반항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짐을 짊어지고 복종한다. 이런 지리멸렬한 방어의 몸부림으로 인해, 그는 은모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부의 고백-은모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진실에 접근하는 순간, 그들의 방어선은 무너져 버린다.
이때 영화는 덥석 개인적 쾌락과 행복을 택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자칫 진부해질 수 있었지만, ‘롤리타’적 충동을 과감히 배신하면서 통속의 함정에서 비껴난다. 이런 포기가 이 영화의 미덕이며, 영화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한다.

은모의 선택은 왜 ‘나쁜’ 것인가

우리는 마지막 은모의 선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결단은 중식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인도여행을 떠나는 것과 다르지 않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배덕’(背德)을 낳기 때문이다. 박찬옥 감독은 스스로 이 영화를 ‘배덕’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대의를 갖고 덕을 행하는 자가 중식이라면, 의도치 않게 덕을 깨뜨리는 쪽은 은모다.
그러나 조금 더 주목해볼 점은 단순히 은모의 ‘나쁜 결정’이 아니다. 어느 철없는 소녀의 부덕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덕을 베푸는 결과를 가져오는 ‘부조리함’을 주시해야 한다. 이것은 은모의 배덕으로 인해, 나이트클럽 사장은 이익을 얻는 이 이상한 사회의 ‘배덕’을 고발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쁜 결정은 은모가 했지만, 그 결정을 종용한 것은 폭력적인 외부 권력이라는 사실을 정상참작 해야 한다.
어찌됐든 은모의 가출은 언니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되며, 마지막 떠남은 철대위의 해체에 기여한다. 하지만 이런 떠남의 선택은 우연히 덕을 배반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 그녀에게도 아픔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부의 고백을 들은 은모의 선택은 이기적이며, 현실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것은 양자택일 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는 은모가 ‘경계’에서 주춤거리며 서성이는 인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녀는 늘 경계에서 진실로 향하는 통로-문을 응시한다. 나이트클럽 사장이 지나간 복도, 형부가 잠들어 있던 안방 문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에 주목해야 한다. 은모는 그녀가 알지 못한 세계를 알고자 하며, 진실의 중심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하여 진실을 은폐하고자 하는 중식과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은모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이것은 구심력과 원심력, 상반되는 속성 간의 충돌인 것이다.
그래서 은모는 그토록 알고 싶었던-중식이 자신을 사랑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들었을 때, 또다시 질문한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자 했던 진실이 자신을 압도하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떠남을 선택한다. 무엇보다 두려웠을 것이다. 또한 중식을 사랑하든, 사랑하길 멈추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중식에 대한 사랑과 언니에 대한 신의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진실이 어떤 것이든 그녀는 떠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중식을 감옥에 다시 가두는 것에 대해선, 은모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은모의 사랑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에 대한 처단이며, 나이트클럽 사장으로 대변되는 세력들로부터 중식을 지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중식이 사회를 위해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사기 혐의로 수감된다는 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중식이 택했던 은폐의 방식을 배반하면서 ‘배덕’을 행하게 되며, 그녀는 경계 밖으로 나와 자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도도한 삶의 방식을 채택한 셈이다.

물과 불, 그리고 안개

<파주>의 파격 멜로는 영화가 다룬 사회적 문제 때문에 희미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착시에 가깝다. 오히려 주목할 점은 이 멜로가 파주의 철거현장과 만나면서 ‘폭발적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런 공간의 확장과 통찰적인 이미지들은 인물들의 상황을 증폭시키며, 이 영화에 오롯한 독창성을 부여한다.
이 영화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4대 원소, 물-불-흙-공기에 관한 내밀한 상상들을 여러 형태로 형상화 하고 있다. 일종의 욕구불만의 팽창 상태는 부글부글 끓는 냄비의 물로 변주되며, 이것이 넘쳤을 땐 화상이 되어 각인된다. 은수의 몸을 통해 반복되는 화상의 이미지는 중식에게 큰 상처가 되며, 그를 더욱 무거운 고통으로 이끈다.
또한 이 영화의 주된 무대인 파주 철거 현장은 사실, 그들이 안락하게 둥지를 틀어야 할 대지와 같은 공간이다. ‘흙’이 주는 몽상이 그렇듯, 그들이 살아왔던 그 공간은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포근하고 튼실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그곳은 부모가 주는 안온함이 부재한 곳이며, 집의 기능을 상실한 빈집과도 같다. 상처로 얼룩진 그들이 쉬어 가기엔 너무도 고독하고, 헐벗은 공간인 것이다. 때문에 철거깡패들이 거대한 중장비로 허물어진 건물을 공격하는 장면은 압도적인 폭력성을 선사한다.
도시재개발의 폭력성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진 그들이 선택하는 건 화염병, 즉 불이다. 살수차가 뿜어내는 물과 화염병이 일으키는 불의 대립. 이 반대 되는 에너지의 불화가 빚어내는 미장센은 가히 폭발적이다. 일찍이 타르코프스키가 <노스탤지어>에서 만들어낸 8분여간의 롱테이크, 불과 물의 이미지와 견줄만한 미학적 성취다.
그 불과 물의 이미지, 불화의 이미지를 감싸는 것이 바로 ‘안개’다. 공기 혹은 바람의 속성을 지닌 안개는 파주를 미스터리의 공간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조엘 코엔의 <파고>에서 그 지역을 특정 짓던 안개와 유사한 시도이지만, 파주의 안개는 어떤 환상적 무드 그 이상이다.
파주가 한국전쟁 당시 남북양측의 요충지였고, 그런 전쟁으로 인해 처연한 사연들을 가진 도시라는 점을 상기시키지 않아도 파주와 안개는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전쟁과 도시재개발 등의 그 지역의 외상과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사연, 그런 환경과 개인의 불화를 모두 품고 있는 매개체가 바로 안개다. 앞으로도 뒤로도 한 발짝씩도 움직이기 힘들게 만드는 안개의 위력은,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 아주 가끔씩 삶의 비밀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언뜻언뜻 출몰하여 우리의 길을 막고, 어떤 때는 길을 열어주는 안개는 영화 <파주>로 통하는 비밀 통로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어쩌면 은모를 성장이라는 다리를 건너는 소녀로 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느린 여름>과 <질투는 나의 힘>이 소년의 성장기였다면, <파주>는 마치 소녀의 성장기와 같다. 그래서 ‘안개 속의 풍경’을 지나, 파주를 벗어나는 은모의 엔딩 클로즈업은 더 묵직한 감동을 준다. 비극적이며 우울하고 낙관적이지 않은 그들의 불운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도, 바로 이 장면에서다. 물론 회화적인 풍경에 터치하듯 잠잠하게 침투하는 장영규의 음악도 이 감동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질문을 남기는 영화

<파주>는 근래 들어 드물게 관객에게 ‘질문’을 남기는 영화다. 이 점에서 성숙한 시선을 가진 작가 박찬옥의 존재가 반갑게 여겨진다. 영화 <파주>는 익숙했던 것을 일견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질투는 나의 힘> 엔딩 시퀀스에서 원상과 성연의 대화를 지켜보던 윤식의 딸 미림의 시선에 담긴 그 무엇이며, 결국 7년 후 은모의 입을 통해 질문 된다.
영화에선 여러 번의 질문이 오간다. 처음에는 주로 중식이 은모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때 왜 그랬니?”라는 물음에 은모는 선문답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 대답을 한다. 그리고 직접 화법으로 말할 수 없던 대답들은 또 다시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왜 이런 일을 하시나요, 그 일이 형부에게 무슨 보람이 되죠?” 이 질문은 누구나 가볍게 넘기지 못하는 질문이다. 박찬옥 감독이 80년대 학번이며, 민주화 운동 등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세대라는 점에서 자신에게 던진 질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이 질문은 영화가 세상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영화를 한다는 것이 세상에 어떤 보람이 되는가 하는 자조적인 웅얼거림 같기도 하다.
영화는 늘 말하듯 일종의 ‘꿈’이다. 그러나 이 꿈이 단순히 감독 혼자 꾸는 꿈이며, 한낱 이미지의 배열이라면 이것은 무의미한 ‘일장춘몽’에 불과할 것이다. 박찬욱 감독 또한 <박찬욱의 오마주>를 통해 영화광들에게 “당신의 영화가 인생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 못한다”라고 강조하지만, 영화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종종 질문한다. 영화가 2시간 동안 극장에 앉아 꾸는 짧은 꿈이지만, 이것은 함께 꾸는 꿈이기에 넌지시 희망을 가져본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의 효용을 따져보자는 건 아니다. 다만 영화가 그저 팝콘을 먹으며 시간을 때우는 기능 이외에 그 어떤 질문과 생각도 전달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뿐 아닌, 영화를 보는 사람의 몫이기도 하다.
은모의 질문이 삶 자체를 뒤흔들어 고민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관람하는 순간, 그 짧은 시간을 통해 내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진다면 그것은 꽤 행복한 꿈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개 같은 질문을 던지는 <파주>는 큰 울림을 주며, 오랫동안 영화에 대해 긴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힘일 것이다.

[단평]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엄마의 ‘축제’
봉준호 감독 <마더>

메마른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들판을 헤치고 한 중년의 여인이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러더니 그녀 또한 갈대처럼 몸을 흔든다. 춤사위라기엔 조금 엉성하고 싱겁다. 마치 기타 선율에 맞춰 추는 것 같지만 사실 음악은 우리에게만 들린다. 우리와 마주보는 이 여인의 표정도 가늠할 수 없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놀랍고 압도적인 ‘김혜자의 춤’은 영화를 함축 하는 빛나는 오프닝 시퀀스다. 앞으로도 보기 힘든 명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영화 <마더>는 이미 이 춤 하나로 모든 걸 말해 버린다. 어느 날 살인죄를 뒤집어 쓴 아들 도준(원빈)을 구하기 위한 엄마(김혜자)의 고독한 사투, 장르적 관점에서도 이 스토리는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러나 모성이라는 뜨거운 에너지를 극단으로 밀어 붙이는 이 영화의 실험은 그리 간단치 않다. <마더>를 단순히 모자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바보 같은 사랑’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아들 혹은 대리 남편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한 판의 굿, 제의처럼 느껴진다.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서스펜스의 방식, 가족을 지키려 스스로 괴물처럼 변해가는 엄마의 모습은 <살인의 추억>, <괴물>과 겹쳐진다. 혹은 <피아니스트>(미하엘 하네케)의 전복적인 내러티브와 가혹한 모녀관계를 연상 시킨다. 그러나 스릴러로 봤을 땐 영화 속에 제시된 단서들이 조금은 허술하고 석연치 않다.
반면 엄마가 무엇을 지켜야 하며, 무엇을 희생해 왔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백하게 도드라진다. 엄마는 하나 뿐인 아들(심지어 남편과도 같은)을 지키기 위해, 사회라는 괴물에게 제물을 바치고 위로해야 하는 무녀(巫女)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극중 혜자는 침술로 민간치료와 출산에 관여하는 주술사다. 동네 아낙들은 그녀들의 남편이 아닌 혜자의 침술과 약재로 아이가 생기길 기다린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어둡고 음울한 동굴-터널-골목으로 치환되는 약재상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장소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봉준호 영화를 통해 번번이 제물로서 누가 희생돼 왔는지도 알고 있다. 연쇄살인범에 의해 살해된 것도, 괴물의 손아귀에 끝까지 들려있던 것도, 생계를 위해 매춘으로 이끌리는 것도 바로 소녀들이다. 항상 괴물들은 강인한 엄마가 될, 아직은 여린 처녀를 제물로 원한다. 아니면 순수한 상태의 아이를 잡아먹는다.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보호 받아야 하는 먹이사슬 최하단에 위치해 있는 존재다.
이제 엄마는 눈을 질끈 감고 아들을 위해 타인의 아들딸을 제물로 바친다. 또 다른 도준과 같은 바보 종팔이를 바치고, 모든 사건의 목격자인 고물상 노인을 죽인다. 희생양의 피로 아들을 구하는데 성공을 거두지만 이미 엄마는 반은 미친 상태다. 모성으로 모성을 반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영화에서 가장 공포를 주는 대목은 바로 이 미친 모성이다.
아들 도준은 아정에게 돌을 던졌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5살 때 엄마가 건넨 박카스 병을 기억해내고, 엄마의 범죄를 목격한 듯 침통을 건넨다. 죄가 또 다른 죄로 돌아오는 순환 고리 속에서 엄마는 구원받지 못한다.
엄마는 고통을 잊게 만드는 그 침을 결국 자신의 허벅지에 찌른다. 그리곤 다시 일어나 춤을 춘다. 이것은 자학의 행위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위의 춤이다. 마치 고통을 잊고자 하는 처연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광버스 바깥에서 담아낸 이 눈부신 엔딩 시퀀스는 그래서 어쩌면 착각이 아닐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어머니들의 저 막춤이 알고 보니 춤이 아닌 게 아닐까. 사실 우리가 잘못 본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마더>는 엄마의 착각과 오해를 통해, 우리의 판단 오류를 보여주는 이상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어찌됐든 피와 광기로 물든 엄마의 축제는 끝났다. 춤인 듯 아닌 듯 소리 없는 몸부림과 함께.


 

Copyright 2002 donga.com. E-mail.sinchoon@donga.com
Privacy poli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