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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 소통과 윤리적 주체의 성장
- 황석영 『바리데기』

- 박은주

1. 새로운 타자, 새로운 이야기
베를린 장벽과 철의 장막이 사라지고 시작된 새로운 세계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주변부 나라들은 지금까지도 안팎의 분쟁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굶주림으로 인해 그 나라의 국민들은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타자가 되어버린 북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 세계를 향해서 발언해야 한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리데기』에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라는 테두리 안으로 담아지지 않고 넘쳐흐르는 다양한 서사들이 존재한다. ‘북한’이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의 의식 저변을 흐르는 거대 담론을 제외시키더라도 『바리데기』에는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소녀의 삶에 대한 일상적이면서도 특수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소설 속의 바리는 예측할 수 없기에 대비할 수도 없는 사건들로 둘러싸인 미래를 만나게 된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만 다가오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바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지는 다양한 사람들과 경험하게 되는 사건들을 통해서 점차 자신의 삶의 능동성을 확보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만 집중되어 있던 바리의 시선은 ‘나’가 아닌 타인들에게로 옮겨간다. 타인의 고통과 호소를 외면하지 않는 윤리적 주체로서 바리의 삶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리가 자신의 내면성을 정립하고 세계와의 관계를 맺는 작업에서부터 일 것이다.
『바리데기』속에서 바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시킨다.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간다.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 여행을 떠한 『연금술사』의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에게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문학 동네, 2004, p48. 라며 팍팍한 현실을 견뎌낼 힘을 주는 늙은 왕처럼, 『바리데기』의 바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희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우리들이 보기에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바리는 세상 사람들이 각자의 삶에서 웃음과 행복, 그리고 기쁨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손을 잡아준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초자 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지만, 자신이 가진 단 하나의 재주로 아기 예수께 경배 드렸던 사제처럼 파울로 코엘료, p273. 진정한 연금술을 터득한, 삶의 연금술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홀로서기와 끊임없는 이주
『바리데기』는 ‘황천무가’라는 굿의 여러 과장(科場)중에 ‘바리공주’라는 서사무가에서 차용된 모티프를 사용하고 있다. 김영민, 「<바리데기> 무가의 신화 비평적 연구-자기실현의 과정을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학회, 한국언어문학58, 2006, 9, p180. 바리는 서사무가의 바리공주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기다리는 집안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난다. 버려진 후 신성한 존재에 의해 구출 받은 바리공주가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기 위해 귀환한 것과 같이, 바리는 어머니에 의해 산속에 버려졌다가 집에서 키우던 흰둥이에 의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축복받지 못하는 아이로 태어나 백일이 넘을 때까지 이름이 없던 바리는 ‘버려짐’이라는 바리공주와의 동일성으로 ‘바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나 ‘바리’라는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보다 중요한 의미는 바리공주가 부모를 구하고 세상을 구한 것처럼, 바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 성장할 것에 대한 기대이다. 바리공주는 죽인 이를 저승으로 천도했고, 바리는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에서 그들이 각자의 삶의 방향을 찾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 것이다.
타인의 삶에 중심을 둔 바리의 삶은 바리가 ‘염병 구신’을 만나게 된 사건을 통해서 시작된다. 한 가족의 막내딸로서는 정당한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바리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할머니와 바리 큰 할머니의 피를 이어 받음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얻게 된다. 타인을 향한 시선을 가지고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방식이 아닌 타인에 의한 방식으로 그들과의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바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보여 지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됨으로써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 존재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리는 ‘나 닐곱채 바리야. 내 동생들 보고프다. 걱정 마아.’라는 마음속의 울림을 통해 자신의 새끼와 떨어지게 된 흰둥이와도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물리적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바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제 바리는 타인들을 도와주면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꿈꾸는 윤리적 주체로의 초월을 준비하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타자의 사유’이며, ‘타자의 철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타자를 통해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타자를 살려내고 타자와의 인격적, 사회적, 윤리적 관계가 가능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은 레비나스 철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자아 또는 주체성을 해소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을 비판할 때 주체가 밖에 설 수 있으려면 먼저 안으로의 복귀, 내면성의 구성이 선제되어야 함을 강조한 데서도 그와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내면성을 지닌 주체의 성립 없이 안과 밖, 내재성과 외재성의 구별이 무의미하며, 초월에 대한 논의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강영안, 『타인의 얼굴』, 문학과지성사, 2008, p118. 내면성의 정립, 자기 정체성의 확립은 윤리적 주체 탄생을 주장한 레비나스에 의하면, ‘홀로서기’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2001, p36. 의 과정을 의미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그저 있음‘ 레비나스, p40. 의 상태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자신에게 벌어졌던 익명적 사건들에 대해 주체가 됨을 스스로 선언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존재의 익명성에 매몰되어 있던 바리는 내면성을 확립하게 홀로 섬으로써 윤리적 주체로의 전환을 위한 기반을 형성한다.
홀로 서기는 요소 세계 음식, 공기, 햇볕, 빛, 잠, 심지어는 생각, 이와 같은 것은 ‘표상의 대상’(후설)이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 또는 ‘도구’(하이데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음식을 먹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일을 즐기는 것은 삶의 과정이고 삶의 내용이다. 이것을 떠나, 이것과 관계없이 이루어낼 수 있는 삶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강영안, p125. -음식, 공기, 햇볕, 빛, 잠, 생각 등-를 주어진 방식 그대로 즐기는 방식인 ‘향유’ 레비나스, p65. 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세계, 요소의 세계에서 바리는 자신의 홀로 섬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건들과 계속해서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세계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려는 바리의 노력들은 매번 바리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들로 인해 좌절되기에 바리는 고향을 버리고 끊임없는 이주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사업에 실패한 외삼촌은 북한을 버리고 두만강은 건너 남선,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예기치 못한 사건 때문에 아버지는 청진으로 소환되고, 할머니, 현이, 바리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에게는 부령으로 옮기라는 당의 명령이 전달된다. 바리에게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없기에 자신의 삶을 위협하며 연속적으로 도래하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에 대한 능동적 존재자로 성장과 세계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담고 있으며 세상과의 매개체가 되는 물리적 신체, 몸이 쉴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는 깨끗한 물과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가 제공되는 곳에 정착하여 ‘거주’할 수 있는 공간에서의 자리 잡기를 지향한다. 그러나 북한은 더 이상 이러한 거주를 시도할 만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기에 바리와 남은 가족들은 세계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이 가능해지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거주의 가능성을 찾아 북한을 떠나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 도착한 중국의 한 과수원에서 미꾸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바리와 현이, 할머니는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을 꿈꾼다. 바리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있는 고향에서는 떠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고향과 가까운 중국에서의 정착을 희망하며 아버지를 기다린다. 바리가 ‘아버지의 귀환’이라는 사건을 기다렸던 것은 아버지를 통해 불안정하고 위협적인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보름쯤 지난 후 아버지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소소한 일거리들을 찾아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중국 공안들의 호구조사가 시작된다는 소문이 들리자, 안전을 위해서 한속에 은거할 장소를 마련한다. 가족들이 주거와 노동을 통해서 익명적이고 지배가 불가능한 세계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산 속에서 겨울을 지내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과 같은 통제할 수 없는 자연 환경 속에서 현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남은 가족들은 찾아 북한으로 돌아가고, 안식처였던 할머니까지 세상을 떠남으로써 바리에게 과수원 뒷산의 보금자리는 삶의 의미와 안정을 주지 못했다.
떠나온 고향,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조차도 실패한 바리는 미꾸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새로운 거주의 공간을 찾아 떠난다. 바리는 한족 부부네 집에 아이보개 겸 가정부로 지내다가 낙원 안마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낙원 안마방에서 안마술을 가르쳐준 샹 언니, 쩌우 형부와 함께 따렌으로 옮겨 함께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사업의 실패로 이들은 중국 국경을 넘어 다른 공간으로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제 바리는 영국으로 이주를 시작하게 된다. 영국에 도착하기까지 한 달, 도착해서 열흘 동안의 기간을 배 안에의 컨테이너 선실에서 어둠과 배고픔, 더위 등도 견뎌내야만 새로운 공간, 영국에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바리는 영국에 도착하기까지 정신적 · 육체적 고통의 시간들을 잘 견뎌낸다. 영국에서 바리의 첫 번째 거주지는 루 아저씨가 수석 주방장으로 근무하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한 중국 식당이다. 그곳에서 바리는 끊임없이 노동하고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게 된다. 영국으로 오는 동안 바리의 꿈에 나왔던 할머니는 바리가 이 같은 과정을 견뎌내고 영국에 도착하게 된다면 한 단계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바리의 삶은 바리를 위협하는 대상이 달라지고 노동의 현장이 달라졌을 뿐, 주어진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삶의 방식에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은 없다.


3. 타인과의 소통과 윤리적 주체로의 성장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과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주체가 응답함으로써 이기적 주체에서 윤리적 주체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주체의 존재 의미, 삶의 의미는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로 삶의 중심을 이동시킬 때 생성되어 진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짊어지는 것을 넘어서 ‘타인을 위한 책임’ 강영안, p166. , 타인의 삶까지도 주체의 책임으로 떠안을 때, 윤리적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윤리적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큰 만신 바리가 될 것이라는 할머니의 믿음은 바리가 통킹 네일쌀롱을 운영하는 베트남 사람을 만나 직장을 옮기면서부터 실현의 가능성을 보인다. 또한 바리는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노동과 거주 장소의 변화는 바리의 삶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생계를 위한 노동이라는 표면적 목적은 동일해보이지만, 네일쌀롱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발 마사지를 제공하는 일은 중국 식당에서 허드레 일과는 동일하지 않다. 타인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고독한 존재로 머물러 있던 바리의 시선은 네일쌀롱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같은 집에 머무는 타인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진다. 이러한 시선의 이동, 즉 삶의 중심을 주체에서 타인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함을 의미하며, 동시에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던 주체가 윤리적 주체로 성장하는 첫 발걸음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바리는 ‘언어’로 표현되는 이야기, 즉 이성의 방식으로 소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호소하는 눈빛, 삶의 과정을 담고 있는 발,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마음 등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이야기를 함께 공유한다. 비이성, 비언어적인 소통은 예전에 염병 귀신을 만나게 된 후 형성된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바리만의 고유한 정체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대화를 통해서, 또는 겉으로 보여 지는 것만을 통해서 드러나는 타인들의 이야기보다 더 진정한 타인들의 이야기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었어도 바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지 못하는 힘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그녀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지 차이나타운에 대한 불법 이주 노동자 단속이 시작되어 나이지리아에서 온 그녀의 남편이 잡혀간 것이다. 한 사람이 잡혀가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지만, 바리는 자신의 걱정은 숨긴 상태로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한다.
네일쌀롱에서 손님으로 오는 사라 아줌마가 아픔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바리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의 겉모습에서는 아픔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녀 스스로도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질투와 아니꼬움의 마음을 갖게 된 루나 언니는 사라 아줌마를 좋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바리는 공손하게 정성으로 사라 아줌마를 위해 발 마사지를 해준다. 사라 아줌마가 일하는 집의 주인마님인 에밀리 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바리는 사람들이 마음에 담고 있는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바리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타인들과 소통하기도 한다. 이러한 소통 방식 역시 이성적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리는 꿈에서 만나는 할머니, 칠성이, 바리 큰 할미를 통해서 소식을 알 수 없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의 상황을 알게 된다. 꿈을 통해서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꿈은 바리가 타인과의 소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파트 관리인 압둘 할아버지의 손자이며 바리의 남편 알리의 동생, 우스만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는 9.11 월드트레이드 센터 붕괴가 시발점이 된 미국과 무슬림 간의 전쟁 때문이다. 미군과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선언하자 무슬림 청년들 사이에 연대와 지원이 요청되었고, 우스만은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여 뜻을 같이 한 다른 청년들과 함께 고국으로 떠난다. 알리는 우스만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국경 근처의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라는 마을로 떠난다. 알리가 전쟁터로 떠난 지 반년이 넘어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전쟁터의 모습을 보여준 또 다른 꿈에서 알리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우스만의 모습만 보게 된다. 바리는 꿈을 통해서 동생 우스만의 죽음과 남편 알리의 생존을 확신한다.
꿈은 이러한 소통의 기능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윤리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바리가 지향해야할 삶의 방향과 마음가짐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바리에게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성을 제시함으로써 바리의 타인을 위한 주체로의 성장을 돕는다. 바리는 꿈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고무산 마을에서 만난 아낙네와 아이들, 역에서 만난 할머니, 심지어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얼굴들’(135)이 몰려든다. 바리가 꽃을 던지자 온갖 음식이 나타나 몰려들었던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준다. 비록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바리가 타인을 위한 행동을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책임이 물질적ㆍ경제적 차원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강영안, p141. 바리는 꿈속에서만 타인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타인을 돕기 위한 행동을 한다.
바리는 돈을 돌려받을 마음으로 빌려준 것도 아니고, 보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샹 언니에게 돈을 빌려준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함께 고생했었던 샹 언니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선(善)을 행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샹 언니가 찾아 왔을 때에도 바리는 그녀를 외면하지 않는다. 샹 언니가 말하지 않아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함을 바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바리가 ‘언어’로 표현되어 나타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바리는 독특한 소통 방식, 감성적 소통으로 ‘진짜’ 타자의 이야기를 전해지는 대로 느끼고 그들에게 적절하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존재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4. 생명의 탄생과 가능성의 발견
이제 바리는 윤리적 주체로 성장한다. 그리고 삶의 주체로서 바리의 존재 의미가 생성되어 진다. 그러나 죽으면 사라지게 되는 신체를 가진 주체의 존재 의미 역시 영원할 수는 없다. 주체의 존재 의미가 영원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주체는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주체의 죽음 초월은 나로부터 시작된 존재이면서도 나와는 다른 존재인 ‘타자가 된 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번역본 없음) 강영안의 『타인의 얼굴』에서 재인용. 인 아이의 출산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 이때의 출산이 생물학적 측면에서만 설명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레비나스가 말하는 출산은 자신의 아이에게 베풀듯이 타인에게 최상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가짐을 갖게 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주체가 보살펴주어야 할 새로운 생명은 실제로 낳은 아이가 될 수도 있고, 입양을 통해 가슴으로 낳은 아이가 될 수도 있으며 이외에도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연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인 것이다.
영국에 도착한 바리가 처음으로 만난 루 아저씨는 ‘나도 이십년 전에 고향에 두고 온 딸이 있단다. 자랐으면 이제 너만할 텐데.’ 황석영, p149. 라며 고향에 두고 온 딸 대신 바리를 딸처럼 보살펴준다. 루 아저씨의 덕분으로 바리는 중국 식당보다 좋은 근무 환경과 높은 수입이 보장되는 곳, 그리고 바리의 윤리적 주체로의 성장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통킹 네일쌀롱으로 일터를 옮기게 된 것이다.
바리의 삶에 또 한 번의 성장은 새롭게 이사 간 아파트의 관리인 압둘 할아버지의 손자, 알리와의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바리는 이제 생물학적인 출산을 통해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지닌 매우 중요한 측면인 출산성을 통해서 죽음을 뛰어넘어 무한성의 차원, 절대적 미래, 폭력과 죽음에 맞서는 무한한 잉여의 차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 강영안, p156. 바리는 파키스탄으로 동생을 찾아 떠나는 알리에게 임신 소식도 전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알리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혼자서 아이를 출산한다.
이제 출산을 통해서 한 없이 베풀어 주는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 바리는 자신의 딸 이외에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지만 아직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수동적인 존재들이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보살핌으로써 ‘바리’라는 주체의 존재 의미는 아이를 통해서 미래에도 유지ㆍ변형되며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홀리야를 보살피고 함께 살던 ‘타일랜드년’ ‘글세 여우 같은 년이 제 나라에 애인이 있었다는 거다. 그래 비행기를 타고 가서 일련에 서너 차례씩 지내다 왔지. 아마 돈도 많이 훔쳤을 거야. 이젠 늙은이에게도 싫증도 났겠지. 눈이 뒤집혀서 총으로 쏘아 죽인거라고. 경찰에서 나보고 만나지 않겠느냐고 그러더라. 내가 왜 그 살인자년을 만나냐?’ - 에밀리 부인의 대사, 황석영, p237. 이 쏜 총에 남편을 잃은 에밀리 부인을 위로하는 등 주변을 돌아보고 관심을 갖고 보살피며 살아가던 바리에게 큰 시련이 다가온다. 사건의 시작은 샹 언니의 두 번째 방문이다. 바리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그녀가 바리의 집에 숨겨 있던 비상금을 찾아 도망가면서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열려진 문으로 바리의 딸, 홀리야가 기어 나가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숨지게 된 것이다. 샹 언니의 작은 실수로 인해 아이를 잃어버린 바리는 ‘샹 나쁜 년, 널 죽여버릴 거야.’ 황석영, p262. 라며 샹 언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나 이 분노는 샹 언니만을 향한 분노는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샹 언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보살피고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바리의 가슴속에 감춰져 있던, 그 동안 먼 길을 거쳐 오는 동안 바리를 괴롭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원한이 응축된 분노일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가혹했던 세상을 향한 절규와 분노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는 생명수를 찾아 헤매는 여러 번의 꿈을 통해서 홀리야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된다. 바리는 홀리야가 자신 안에 함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압둘 할아버지는 그래도 아이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구해낼 생명의 물을 소망하는 바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면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 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286)

이제 바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통킹 네일쌀롱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을 무렵, 샹 언니가 투신자살을 했다는 루 아저씨의 전화를 받는다. 바리는 꿈속에서 자신을 언제 풀어줄 거냐고 외치던 샹 언니의 모습을 기억해낸다. 그러고는 모든 것은 자신이 샹 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반성한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러한 삶을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알리가 돌아온 후 새로 임신한 바리는 그와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평온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런던에서 발생한 지하철 폭발 테러를 목격한 바리는 세상에 여전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타인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바리와 알리가 함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끝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폭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바리는 알리가 돌아오고 새로 임신하기 전까지 홀리야 때문에 미워했던 샹 언니에 대한 마음의 분노를 무화시킴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또한 남편과 내연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토니’를 입양함으로써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극복한 에밀리 부인의 변화된 삶을 보며 바리는 자신의 할 일이 끝난 것처럼 느끼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에 폭발 사건이 일어났고 바리는 고통 받는 타인을 위한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도 타인을 위해, 타인을 향해 살아가고 타인에 의해 보여 지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5. 또 다른 바리를 기다리며
『바리데기』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 나름의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텍스트 안에서 바리는 주체이지만, 텍스트 외부에 존재하며 바리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에게 바리가 타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리데기』는 ‘타자가 전하는 타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지금까지 타자를 이야기하는 문학은 다수 존재해 왔다. 그러나『바리데기』는 타자를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단순한 명제를 넘어서, 어떻게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타자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타자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황석영은 그의 소설에서 남성성을 대체하는 새로운 담론이 아니라 남성의 피해의식을 보듬어 안는 ‘식물적인’ 모성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오흥진, 「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 황석영의 ‘20세기 3부작’을 중심으로」, 『모더니티와 타자의 현상학 : 한국 근대 문학의 풍경』, 솔출판사, 1999, p275-276.
혹자는 2000년을 전후하여 발표된 『오래된 정원』(창작과 비평사, 2000), 『손님』(창작과 비평사, 2001), 『심청』(문학 동네, 2003) 등의 작품에서도 여성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소설을 창작해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바리데기』의 주인공인 바리는 남성 주체의 확립을 도와주는 조력자로써의 여성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남성에 의해 삶이 좌지우지 되는 수동적 존재로 형상화되지도 않는다. 바리는 고유한 정체성, 내면성을 가지고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는 능동적 주체인 것이다. 인물이 처해 있는 위치는 우리 시대의 타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큼은 삶의 주체로써 능동적인 태도로 삶을 마주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나감으로써 여성 주체, 바리는 소설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리의 성장은 한 번의 사건이나 계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바리의 성장은 ‘생명수’를 찾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수를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생명수를 찾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타인을 돕기 위해 생명수를 찾아 나서는 그 마음 자체인 것이다. 생명수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해보겠다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며,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진정한 성장, 윤리적 주체로의 성장인 것이다.
이에 『바리데기』에서 기존의 남성을 주체로 내세운 성장 소설과 다르게 여성을 주체로 내세운 여성 성장 소설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은 여성 성장 소설에서 여성 주체들의 성장은 일회적 성장으로 완결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리가 삶을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윤리적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상은 혼자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기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며, 그러한 타인들은 언제나 어느 곳에나 언제까지나 존재하기에 타인에 대한 관심 갖기를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면성의 정립에서부터 윤리적 주체로 전환되기까지의 과정이 바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중요한 의미 구조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일회성으로 완결 지어지는 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바리는 윤리적 주체가 탄생했다고 해서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않는다. 새로운 타자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경험하고 느끼면서 바리는 시선이 확장되고 선을 베푸는 영역을 확장시켜가면서 전보다 타인들을 위하는 마음이 켜지는 윤리적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윤리적 주체는 고정된 실체, 명사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움직이고 운동하는 동사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소설 속 세상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이곳에서도 타인을 위해, 타인을 향해,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바리의 성장 이야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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