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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장평·죽은 풍경들의 시간과 죽은 시간들의 풍경-지아 장커의 경우와 홍상수의 경우
단평·그 여인의 등 뒤에서 -이창동의 ≪밀양≫에 관하여
                      - 이 나 라


장평·죽은 풍경들의 시간과 죽은 시간들의 풍경-지아 장커의 경우와 홍상수의 경우


0. 익숙한 풍경에 맞서다.

지아 장커와 홍상수는 익숙한 영화의 풍경내지는 풍경을 재현하는 익숙한 영화적 방식에 의문을 표시하는 감독이다. 이들은 자연이나 도시의 풍경을 안정된 깊이감을 지닌 영화적 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을 거부한다. 물론 이들의 장면 구성은 판이하게 다르다. 지아 장커의 영화가 시종 일관 넓은 범위를 담아내는 롱 샷으로 산시성, 북경, 삼협의 '어떤'풍경을 잡아내는 반면 홍상수의 영화에선 방 구석의 카메라가 잡아내는 어정쩡한 자세의 육신들이 풍경을 대신하기 일쑤이며, 집 밖에 나선 등장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세계의 풍경을 좀체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관광지로, 옛날 여자 친구가 사는 주변 도시로,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이 두 감독은 각각 ≪죽은 풍경≫ 속에 흐르는 시간을 찍어내려 하거나 (지아 장커의 경우),≪죽은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찍어내려 한다. (홍상수의 경우) 이들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근대적인 의미의 ≪풍경≫ 개념, 고정된 주체의 눈 앞에 펼쳐진 대상으로서의 원근법적인 풍경에 맞서는 영화적인 대결을 벌인다.

1. 여백의 풍경과 풍경의 부재

지아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의 한 장면과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의 한 장면을 우선 겹쳐 보자. ≪스틸 라이프≫ 속 산밍과 센홍 (그리고 다큐멘타리 ≪동≫ 속 화가 리우 샤오동) 은 모두 산샤 언저리에서 이 곳의 풍경을 바라본다. 물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산샤의 풍경은 중국 전통 산수화마냥 화면의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기며 인간을 압도하는 풍광을 드러낸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와 그의 선배 역시 댐공사로 만들어진 춘천 소양강호 풍경을 바라보며 전망대에 서 있다. 평평한 앵글로 찍힌 롱 샷은 소양강호의 풍경을 배경에 깔고 오른쪽으로 치우친 부분에 두 남자의 뒷 모습을, 왼쪽으로 살짝 치우친 부분에 여대생의 뒷 모습을 배치하고 있다.

산샤 계곡의 여백은 평소 지아 장커가 즐겨 담는 여백과 다른 듯 닮아 있다. ≪임소요≫에서 차오 차오가 아파트 단지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로 질러 걷는 빈 터 역시 황량하게 버려진 여백의 공간이다. ≪플랫폼≫에 등장하는 옛 성곽 역시 어떤 형태를 지닌 구조물의 역할을 하기보다, 여기에 기대 선 등장인물의 뒷면을 채우는 무차별적인 평면이다. 이 성벽은 인물 뒤에서 공간을 가득 메우지만 관객은 오히려 이 전면적인 평면 탓에 등장인물들을 빈 공간에 존재하는 형상들처럼 지각하게 된다. 동양의 산수화에서 여백은 의도적으로 비워진 공간이고, 산과 물을 이어주는 기가 흐르도록 하는 긍정적인 공간이다. 반면 서구의 공간론이나 시각 구성의 역사에선 이런 긍정적인 여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자들은 이들의 존재를 부인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빈 공간(진공)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그에 따르면 진공이 존재한다면 사물이 방향을 잃고 모든 방향으로 흐르고 뒤엉키는 무한한 혼란의 상태에 빠질 것이므로, 우리는 세계의 질서, 코스모스를 인정하는 한에서 진공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지아 장커가 구성해내는 여백은 세계의 흐름이 멈춰 선 고요한 지점이 아니다. 이 여백은 항상 세계의 혼돈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철학자들이 세계를 질서 지워진 공간으로 파악하기 위해 세계에서 배제한 빈 틈, 빈 공간이 바로 지아 장커가 표현하는 여백이다. 나는 이 여백을 질서 잡힌 세계의 풍경에서 배제된 ≪죽은 풍경≫, 세계가 죽은 것으로 간주한 풍경이라 칭할 것이다.

다시 소양강 앞으로 돌아와 보자. 언뜻 보아 호수를 앞에 둔 두 남자와 한 여자는 모두 풍경을 '완상'하고 있는 듯하다. 십 초 가까이 지속하는 이 샷의 다음 샷은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하고 있는 두 사람의 정면 샷이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관객-가 화면 뒤쪽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이들이 풍경 대신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장면은 홍상수가 어떻게 의도적으로 풍경을 자신의 영화에서 지워내는가,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어떻게 풍경의 부재를 목도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홍상수가 작심하고 풍경을 (찍기를/보여주기를) 거부하는 감독이라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영화는 대체로 집을 벗어나서야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옆집 화단에 심어진 채소의 짧은 클로즈업에 이어 주인공이 옥탑방 문을 열고 햇살 아래로 나와 집 문을 걸어 잠그는 모습을 세세히 보여주며 시작한다. 집 밖에 나선 존재들의 피곤함,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인물들은 ≪죽은 시간≫을 살고 있고, ≪시간을 죽이려≫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온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를 꼬셔 여관방을 들락거리며, 길 위에서 택시를 잡는데 세월을 소모할 뿐 도통 도시의 풍경이나 자연의 풍경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집 안과 집 밖, 이곳과 저곳, 이 여인의 몸과 저 여인의 몸은 매양 한 가지여서, 이들은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지아 장커의 영화가 죽은 풍경(여백)을 통해 질서잡힌 공간 밖의 혼돈과 생기를 보여준다면, 홍상수의 영화는 죽은 시간의 반복을 통해 풍경의 부재를 보여준다. 부재를 보여주기, 이것은 다시 말해 부재하고 있는 것의 프레임화이다.

2. 들끓는 여백 또는 프레임의 밖

여백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아 장커의 화면은 전통 동양 산수화의 화폭을 닮았으면서도 이를 넘어 선다. 우선 그는 지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땅을 가르고 시점의 중심을 만들어내는 서구 풍경화의 전통(이는 회화뿐 아니라 영화 등 시각 이미지 구성에서 하나의 규범이 된다. )과 확연히 구분되는 화면 구성을 위해 지평선이나 수평선의 설정을 피하는 산수화의 기법을 가져 온다. 이는 ≪스틸 라이프≫ 속 샨사의 묘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영화가 산밍이 탄 배 ≪세계≫호를 보여주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호에 승선한 인민들의 육체를 흩어가던 수평 트래킹은 배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산밍을 잡아내고, 산밍의 뒤편 열린 공간 사이로 산샤가 내다보인다. 이 장면은 두 가지 의미에서 풍경을 대하는 지아 장커의 태도를 고스란히 나타낸다.

첫째로 강을 따라 흐르는 배 위에서 산샤의 풍경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풍경은 고정된 자리를 가진 주체의 시선이 관찰해 낸 상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지아 장커의 영화에서 풍경은 단 한 번도 정지된 자가 바라보는 정지된 세계의 풍경이었던 적이 없다. 세계의 풍경은 늘 배, 버스, 트랙터, 모노레일, 오토바이 위에 올라탄 사람들의 시선으로 목격되었고, 이 풍경들은 늘 흐트러져 있다. ≪임소요≫ 도입부의 부산한 거리 풍경-달려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들, 길을 걷는 행인들의풍경-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빈빈과 '함께' 시작한다. 원신 원샷의 정적인 화면으로 유명한 그의 영화 ≪플랫폼≫ 역시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고자 밤버스를 탄 단원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하고, 영화 내내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떠도는 문화 선봉 대원들과 이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요동치는' 풍경을 보여준다. 영화 ≪세계≫에서 여 주인공 타이셍은 세계 공원 내의 모노레일을 타고 공원 내에 축소 전시된 모형들 사이를 지난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거나 모노레일의 속도감 속에서만 비현실적인 공원의 풍경을 지각해 낸다. 벤야민은 사거리에서 돌진하듯 달려오는 차량이 주는 충격 체험을 영화의 지각 체험에 비교한 바 있다. 영화의 태동은 넘쳐나는 시각 이미지-사진, 광고, 포스터 등-들을 빠르게 변화하는 운동 상태 속에서 지각하면서 예지되었다. 다만, 이 때 속도를 체감하며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의 도래를 목격한 인물들이 길을 걷는 산보자였다면, 지아 장커의 영화 속에서는 지각 주체 자신이 교통수단에 몸을 싣고 있다. 주체는 세계에 대한 투사를 시작할 고정된 자리를 잃어버리고, 세계는 움직이는 주체,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선에 흐트러진 풍경을 선사한다.

둘째로, 이 장면은 풍경과 인물의 공존을 보여 준다. 본래 중국 산수화는 조화로운 자연을 나타내는 것을 큰 이념으로 하고, 이 산수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을 드러낼 때는 인간의 감정과 자연 풍광이 하나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려고 애쓴다. 덧붙여 큰 스케일의 산수를 담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산수화는 전경의 작은 부분에 인간 혹은 인간사 풍경을 덧붙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크게 보아서는 인간사의 세밀한 풍경을 담아내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지아 장커는 영화의 제목을 ≪스틸 라이프≫, 곧 정물이라 붙이고, 산샤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정물처럼 그려낸다. 이는 서로 다른 스케일-원경으로 표현해야 하는 풍경과 근경에서 세밀하게묘사해 내야하는 인간세계-과 이념으로 인해 동시에 주제화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풍경과 인물, 풍경과 정물을 하나의 프레임 속에 표현해내려는 야심 찬 의도의 반영이다. 또한, 지아 장커의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인 풍경은 산수화에서와 달리 주인공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지아 장커가 풍경과 정물을 나란히 놓으면서도 대조하는 영화적인 수단은 리듬이다. 풍광과 이 풍광 '내'에 거주하는 인간들은 정(靜)과 동, 짖고 부숨의 대립적인 리듬과 작용으로 그려진다. 기어이 재회한 산밍과 아내가 부서진 건물 실내에 쭈그리고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이들 뒤 부서진 틈으로 바깥 공사장의 풍경이 보인다. 이 때 세계의 풍경은 반듯한 프레임 속에 들어 있지 않고, 곧 무너져 내릴 건물 외벽의 울퉁불퉁하게 벌어진 틈 사이에 들어 있다. 이 흐릿한 틈이 바로 지아 장커의 여백인 셈이다. 이 여백은 때로 화면 전체에 넘쳐 나기도 한다. 앞서 밝혔듯, 서구 풍경화는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기준으로 원근법 적인 공간의 중심을 설정한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탄생'한 장르이자 용어인 풍경화는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땅, 또는 하늘과 바다를 갈랐다. 따라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로프≫에 등장하는 지평선 없는 대지의 풍경, 거스 반 산트의 영화 ≪엘레펀트≫에 등장하는 하늘의 풍경은 이런 원근법적인 공간의 규범을 흔드는 이미지들이다. 이들은 화면 전체에 넘쳐나는 여백, 프레임을 넘어서는 무균질의 카오스, 죽은 풍경들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아 장커는 공사장의 돌무더기를 찍어 낸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돌무더기는 ≪플랫폼≫의 성벽, ≪임소요≫의 공터의 평평한 이미지와 공명을 이루어 낸다.

3. 풍경의 소거 또는 텅 빈 프레임

지아 장커가 산수화를 차용하고 극복하며 여백, 반풍경을 통해 풍경에 대한 근대적인 규범을 거스른다면 홍상수는 풍경 자체를 소거하고, 풍경을 바라보는 일의 불가능함을 피력한다. 일례로 ≪스틸 라이프≫가 건물 외벽이 만들어 내는 울퉁불퉁한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구획 짓는 네모 반듯한 프레임 자체의 형식에 의문을 표한다면, 홍상수는 프레임을 벗어난 풍경을 보여주기보다, 프레임 자체만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두 사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차 속 장면을 비교해보자. 지아 장커는 차 속에 앉아있는 인물을 창을 배경으로 찍어내는 것을 즐긴다. 반면, 홍상수가 즐겨 찍는 샷은 앞좌석과 뒷좌석의 교환 샷이다. 지아 장커에게 창은 세상을 보여주는 열린 틈인데, 홍상수에게 창은 아무런 내용을 담지 않은 프레임이다.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중교통 수단을 타고 있어도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그의 인물들은 어쩌면 안과 밖의 구분 자체에 회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공간의 시학≫에서 바슐라르는 공간을 내부와 외부, 둘로 구분하여 나누는 자명한 방식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 이 구분이 (근대 사고의) ≪기하학적 규범≫에 길든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공간을 내부와 외부로 구분하여 사고하는 대신 내부와 외부를 변증법적으로 사고하자고 제안한다. 앞서 필자는 홍상수의 영화는 주인공들이 집 밖을 벗어날 때, 자신의 영토를 벗어날 때에야 시작될 수 있다고 적었다. 홍상수의 영화 중 유일하게 대구가 깨어지는 영화라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출발점에서도 '외출'이 아닌 '방문'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문호의 집에 들리기 위해 집 앞까지 찾아온 헌준을 문호는 마당에나 기껏 들일 뿐 부인 핑계를 대며 집 안에 들이지 않는다. 헌준과 문호 역시 홍상수 영화의 다른 인물들처럼 우선 '외출'을 해야 한다. 집 밖으로 벗어난 인물들은 탈 일상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리 같은 모습의 행위를 반복한다. 이들은 밖으로 나오지만, 밖에서 아무것도 목격하지 못하고 다시 (여관이나 술집) 안으로 돌아온다.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를 탐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답습하는 것이다. 이들이 반복해서 시간을 죽이는 동안, 영화는 그들이 지나치는 장소의 특정한 좌표를 의도적으로 지우며 풍경을 비워낸다. 좌표가 지워진 자리에서, (장소를 지각하는) 우리는 내부(에 대한 지각)에서 외부(에 대한 지각으)로 곧장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제자리를 맴돌며, 같은 풍경만을 바라보거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더 정확히 표현해 우리는 비어 있는 프레임만을 보게 된다.

비어 있는 프레임을 보여주는 과정은 프레임 속의 내용을 지우거나, 애초에 내용이 지워진 프레임을 보여주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현된다. 가령 ≪극장전≫에 등장하는 남산 타워의 경우를 보자. 줌인을 통해 타워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당겨져 보이긴 하지만, 이 타워는 원경에 속해 있다. 본래 원경에 속한 사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방향을 알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아무 데서나 보이는≫ 남산 타워는 동수에게나 관객에게 동수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남산 타워는 동수나 극 중 극의 주인공이 남산 근처를 배회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식(repere)이거나 기념비적 풍경이기 보다 아무 데서나 나타나 이곳이나 저곳, 이 장소와 저 장소를 마찬가지의 장소,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무규정적인 공간(quelconque)으로 만들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 등장하는 모뉴먼트 밸리와 같은 기념비적 풍경들, 웨스턴이 영화사에 기재한 풍경의 좌표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강원도의 힘≫의 강원도 동해나 설악산에서조차 우리는 기념비적 풍경을 목격하지 못한다. 웨스턴에 등장하는 기념비적 풍경은 미국민, 미국 영화의 정체성을 과시하는 기호들이었다. 상권과 그의 후배는 기껏해야 내설악과 외설악을 아우르는 조형물을 통해서야 풍경의 전체성, 허구의 전체성과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남산을 오르고, 여관에 들어가고, 나오는 동안 우리는 점점 방향 감각을 잃어간다. 이곳은 집 안인가, 여관 방 속인가, 남산 발치 아래인가, 극장 앞인가, 극장 속인가? ≪극장전≫ 영화 시작부에서 나뭇가지 뒤로 보이던 남산 타워가 뿌연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이 풍경이 등장 인물에게 미치는 무기력함을 반영하면서 풍경의 자기 소멸을 암시한다. 남산 타워와 함께 시작하는 ≪극장전≫은 홍상수의 영화 중 단연 프레임 자체를 강조하는 영화다. 영실과 하루밤을 보낸 동수가 2층에 자리한 여관 계단을 걸어 나오는 현관 장면은 마치 동수가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오는 듯이 보인다. 그는 이미 이영수 감독의 회고전이 상영되던 극장 문-또 하나의 프레임-을 열고,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온 바 있다. 영실이 동창회에 오는 장면 역시 영실이 음식점 대문으로 들어오는 샷과 방문으로 들어가는 샷을 끊어 구분하면서 문-프레임에 대한 통과를 강조한다.

내 집, 내 영토가 아닌 곳의 풍경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내 집과 내 집 밖의 구분이 희미해질 때, 내 집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흔적을 남길 수 없다. 벤야민은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즉 우리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곳은 개인의 우주, 개인의 실내 공간이다. 그는 부르조아들이 자신들의 실내 공간에 개인의 흔적을 새기기 시작했을 때, 이 흔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구성되는 탐정 소설의 장르가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유일하게 등장인물들이 새기는 흔적-수정된 원고지, 찢어진 콘돔 사이에 남은 흔적-을 뒤 따라 가며 보여주는 영화였고, 다른 어떤 그의 영화들보다 등장 인물의 거주지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반면 이후의 영화들은 술집과 여관, 택시 안을 보여주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오! 수정≫에서 정보석은 이불을 빨아 흔적을 없애려 하고( 수정은 이불을 빨려고 애쓰는 재훈에게 ≪우리 흔적 남기는 게 그렇게 싫어요?≫라고 말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헌준은 눈 위에 난 발자국을 지우며, ≪강원도의 힘≫에서 지숙은 벽의 낙서를 지운다. ≪해변의 여인≫의 김 감독은 아내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지워내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 풍경의 지배권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이다.

≪해변의 여인≫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서해안 최고의 휴양지라는 신도리 바닷가의 수평선은 극 중반에 이를 때까지 화면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김 감독과 그 후배, 문숙 세사람은 바다를 바라보며 일자로 서서 ≪저기 등대가 있네≫, ≪황사가 심하네≫같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카메라는 고집스럽게 세 사람의 모습만을 비추고, 서해안 바닷가의 풍경은 장면 밖에 남겨 둔다. 식당에서 다툰 후 바닷가 쪽으로 뛰쳐나온 김 감독과 후배가 지리하게 싸우는 동안에도 카메라는 팬 기능이나 파노라마 기능이 고장이라도 난 듯이 화면 왼쪽에 있을 바다를 비켜가며 어중간하게 서 있는 세 사람을 담는다. 김 감독과 하룻밤을 보낸 문숙이 다음 날 아침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김 감독을 벤치에 남겨 두고 바닷가로 내려갔을 때, 바다와 그 바다 위의 등대는 모습을 드러낸다. 지루한 욕망의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우리는 풍경을 바라볼 수 없다. 김 감독처럼 말을 잘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해변의 여인≫에서 바닷가 풍경은 인물의 대사 속에만 존재하며 화면에서 배제되거나, 황사로 뒤덮여 아무것도 분간 할 수 없는 뿌연 공간,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래사장의 이미지로 남는다. 지아 장커의 평면적인 화면에선 마치 마띠에르의 예술을 통해 탄생한 듯 흙더미, 돌무더기의 질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와 달리 홍상수의 평평한 화면은 내용물이 빠져 질감과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풍경이 배제되는 것은 풍경 속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과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며, 무언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수정≫의 두 번째 부분, 재훈과 관계를 맺고 난 수정은 재훈의 품에 안겨 창 밖을 내다본다. 이때 재훈은 이리오라며 수정의 시야를 실내로 돌린다. 애초 제주도에 가고 싶어했던 수정을 재훈은 서울의 한 호텔방으로 데려왔고, 수정은 제주도의 풍경도 서울 호텔 방 밖의 풍경도 바라볼 수 없다.

4. 청각적 풍경화 잡음들 또는 웅얼거림

지아 장커가 화면에 담아 내고자 주력하는 또 다른 풍경은 소음/잡음의 풍경이다. 잡음은 불어로 'parasites'인데, 이 단어는 '기생충 같은 존재, 기식자'라는 본래의 뜻이있다. 그렇다면 다시 기생하는 자, 식객이란 무엇인가. 식객은 본래 부잣집 식탁에 끼어들어 흥을 돋워주고 그 대가로 밥을 얻어먹는 자를 일컬었다. 그래서 잡음이란 본래의 음에 끼어들어 그 음을 흐리는 소리이긴 하지만, 우리는 잡음 제로의 순수 음을 상상할 수 없다. 잡음은 어쩌면 세상의소리가 존재하는 조건이다. 지아 장커는 시종일관 거리의 소리를 영화에 담아왔다. 역의 안내 방송, 길거리 가라오케 가판대의 노래 소리, 당국의 선전 방송 등이 그것이다. 이 소리들은 극의 흐름에 필수적인 정보를 주거나 주인공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대변하거나 하는 기능이 없이, 화면에 끼어든 '잡음'들이었다. 이 '밖'의 소리들은 평평하고 황량한 시각 이미지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해준다. 이차원의 공간은 이 잡음들과 함께 삼차원의 생명감-현실과 환영을 아우르는 기운-을 획득한다. ≪스틸 라이프≫에서 지아장커는 꼬마 아이가 부르는 유행가 소리 이외에도 공사장에 울려 퍼지는 망치 소리를 잡아냈다. 이 망치 소리의 리듬에 맞춰 시간을 잃어버린 듯한 산샤의 풍경은 역동성을 획득한다. 물론 이 역동성은 멜랑꼴리한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는 산샤의 죽은 풍경들이 유독 ≪근원적 세계 unmonde originaire≫의 풍경을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가 자연주의 영화가 나타내는 세계라고 부른 ≪근원적 세계≫는 규정된 세계, 질서 지워진 세계 내 어디인가에 존재하는 어떤 무정형의 세계를 일컫는다. 이 외따로 떨어진 세계는 질서 지워진 세계의 시작점이면서 종결지점으로 세계를 축조해 내면서, 세계로부터 부서져 내리는 그런 세계라고 할 수 있다. 2000년을 흘러온 강 물길을 뒤 바꾸어 버리는 공사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는 돌무더기들, 돌무더기를 쪼는 망치질 소리는 이 근원적 세계의 거친 기운을 전해 낸다. 또한 ≪세계≫ 속 세계테마파크 역시 이런 양면적인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가?

일상의 넘쳐나는 소음에 민감한 지아 장커와 달리 일상을 꼼꼼히 담아낸다는 홍상수는 이런 거리의 소리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홍상수가 관심을 기울이는 잡음은 거리의 소리, 소음이 아니라 인물들이 뱉어 내는 쓸데없는 말(이들은 대사일까, 아닐까), 말의 억양, 말 사이의 쉼표 같은 것들이다. 홍상수의 극 중 인물들은 때로 대사를 하기보다, 정확한 대사의 전달을 가로막는 쓸데없는 혼잣말이나 웅얼거림의 톤을 조절하는 데 더 큰 신경을 쓴다. 그때문에 우리는 빈번히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혹은 중얼거림)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사를 극의 텍스트라고 한다면, 이들의 웅얼거림은 텍스트의 빈틈이다. 그러나 이 빈틈은 텍스트 밖의 세계를 지칭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5. 사막의 시간과 시간의 사막

우리는 서로 다른 관심과 전략을 통해 규범적인 공간 구성의 규칙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두 감독의 예를 살펴보았다. 이들의 관심과 전략은 서로 다르지만, 이 둘 모두 풍경을 경유, 이탈의 길을 걷는다. 지아 장커는 기실 들끓는 에너지를 가진 죽은 풍경들을 통해 변화하는 중국의 시간을 나타낸다. ≪여백의 공포≫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는 사람들이 비어 있는 땅, 죽어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사막 아래의 들끓는 움직임에 관해 길게 적은 바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린 왕자≫의 우화는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았던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인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중국 회화의 전통과 서구 근대 시각 양식의 규범이 강요하는 긴장감 사이에서 새로운 영화 형식을 탐구하는 지아 장커는 이 시대의 운송 수단에 몸을 싣고, 황량한 사막 어디인가의 우물을 찾아나서는 자다. 홍상수의 초기작들은 기름진 평야 앞에서 발견한 말라 비틀어가는 잡초 더미, 경치 좋은 설악산 자락에서 발견한 죽어가는 금붕어를 보여주는 작업들이었다. 주인공들의 죽은 시간은 이 죽은 사물들과 공명을 일으켰고, 세계의 풍경을 지워갔다. 하나하나 지워진 풍경은 프레임으로만 남았다. 바다가 참 예쁘다고 말하는 인물들의 대사는 상대편에게 말을 건네기 위한 대화의 프레임일 뿐, 아무런 알맹이를 갖지 못한다. 프레임으로 가득 찬 세계의 풍경 없음을 보여주는 데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홍상수는 모더니즘 영화의 진정한 적자이다. ≪최고의 휴양지≫ 바닷가에서도 그는 출렁이는 물결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해안가의 노랫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아니 그는 보여주지 않고, 들려주지 않을 참이다. 그는 모래 바람과 모래 언덕-시간의 사막만을 생각하는 외롭고 용기있는 모험을 하고 있다.


단평·그 여인의 등 뒤에서 -이창동의 ≪밀양≫에 관하여


그녀는 자신을 배반한 남편을 사고로 잃고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땅에 살러 왔다. 이 사연 하나만 들어도 우리는 그녀의 등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팔자 사나운 년, 지지리 복도 없는 년. 그녀가 남편의 고향, 밀양 땅을 찾은 건,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세상에 등을 지고 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애와 그녀의 아들 준을 태운 차는 밀양으로 진입하는 국도 변에서 고장이 나 서 버린다. 쌩쌩거리며 달리는 차로 변에 그녀가 우리에게 등을 보이며 서 있다. 겨우 세운 트럭을 향해 슬리퍼를 끌며 달려가는 그녀의 애처로운 뒷모습, 고장 난 차 안에서 꼼짝 않고 앉아있는 아들을 향해 다시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녀의 피곤한 뒷모습. 그녀는 밀양 땅에서 우리에게 얼굴에 띤 환한 웃음을 보여줄까. 그러나 좁은 밀양 땅에 도착하자마자 이웃에게 훈계를 둔 탓에 신애는 금세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자신에 대한 이웃의 '뒷담화'를 듣고 있는 신애의 거울 속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녀는 얼굴에서 진짜 표정을 지우고 갑각류의 딱딱한 등짝 같은 가면, 웃음 띤 얼굴의 가면을 쓰기로 결심한다.

이창동의 영화 ‘밀양’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자신에게 닥친 세상의 고통과 대면하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는 영화다. 남편의 죽음, 아들의 납치와 죽음을 겪고, 신의 교회가 주는 은총과 인간의 신앙심이 주는 배신감을 겪은 여인의 얼굴이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등으로 들려주는 영화. 그런데 이 모든 세상의 고통은 타인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서, 우리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문구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진정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있다면, 우리가 타인에게 우리의 진짜 표정을 감출 수 있다면, 타인은 지옥이 아닐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자는 등을 내 보인다. 또는 딱딱하고 표정 없는 등짝 같은 얼굴의 가면을 내 보인다. 그렇지만 타인의 지옥, 내 마음 속 타인의 지옥은 끔찍한 것이어서 신애는 고통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대면하지 못한다). 경찰서에서 범인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지 못했듯이. 그래서 우리는 등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아들의 납치 사실을 안 신애가 종찬의 카 센터로 꺼이꺼이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뛰어갈 때 우리는 얼굴보다 더 큰 격정을 표현하는 신애의 등을 바라본다. 한참을 뛰어가는 신애의 뒷모습, 길거리에 주저앉은 신애의 웅크린 등짝은 신애의 또 다른 얼굴, 얼굴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하는 얼굴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영화‘일식’의 첫 장면을 무기력과 권태에 빠져 소통을 거부하는 모니카 비티의 뒷모습으로 채웠을 때, 모니카 비티의 뒷모습도 그렇게 수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영화들이 등처럼 딱딱한 가면을 쓴 사람들의 얼굴만을 비추거나, 등진 자세가 표현할 수 있는 정념들, 정념의 이미지를 화면 안에서 감춘다. 이창동은 한 여인의 등을 통해 그녀가 외면했던 것, 그녀가 절박하게 표현했던 것,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야기 한다.우리는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신애의 뒷모습을 같은 구도로 두 번 목격한다. 교회에 나가 마음의 평화를 얻은 신애가 싱크대 앞에서 떠오르는 아들 생각에 괴로워하며 서 있다. 그 뒷모습은 신애가 이웃에게 지어 보이는 평온한 얼굴 뒤 감추고 있는 불안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범인을 만나고 난 후 정신을 놓은 신애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일련의 복수 행각을 벌인 후 자살 시도를 하기 전에도 싱크대 앞에 그렇게 서 있다. 하늘을 향해 “봐, 보란 말이야”라고 외치던 그녀 얼굴의 독기보다, 싱크대 앞에서 선 신애의 뒷모습은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이 뒷모습을 당신은, 우리는, 신은 과연 지켜보았던가. 영화의 마지막, 신애는 카메라에 등을 지고 집 마당에 앉아 머리를 자르고,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 사이로 신애의 얼굴이 비쳐 보인다. 우리는 그녀의 등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우리를 바라본다. 내 앞의 타인이 들어주는 거울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등 뒤를 바라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에게 얼굴과 등, 두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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