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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 ‘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배수아가 제시하는 독서방법과 현실독법¹’
단평 ‘중간자 작가의 탄생(『핑퐁』) ’
                      - 이 광 진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배수아가 제시하는 독서방법과 현실독법


1. 불가능한 낭만, 불안(정)한 자기

배수아에게 끈덕지게 따라붙는 수식어, ‘낯섦’은 두 갈래로 해석 가능하다. 첫째, 프로이트의 용어, 섬뜩함(친숙하면서도 낯선 대상에 대한 불안감)을 연상케 하는 무의식적 기제이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묘미는 자아의 틈서리, 즉, ‘나’를 피해 달아난 ‘자기’의 탈구를 찾는 데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의식으로부터 미끄러지고 비껴나가는 ‘자기’는 분명 ‘나’에게서 비롯되었으나(친숙하지만), ‘나’와는 이질적인(낯선) 운명을 타고났다. 주체가 자기 이야기의 객체가 된다는 점에서 일인칭 주인공 화자는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을 경험한다. 즉, 문장의 세계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문장 속에 갇힌 주어 ‘나’는 분리된 목적보어 ‘자기’를 발견하는데, 이때 바라보는 ‘나’는 바라보여지는 ‘자기’와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이를테면, 일인칭 소설 『에세이스트』와 『독학자』의 이야기 발단은 각각 M과 S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순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에세이스트』에서 주인공 화자(이하, ‘에세이스트’)와 다른 인물들과의 대화부분은 직접화법으로 서술되는 반면, 화자와 M의 대화는 화자에 의해 간접화법화 혹은 자유간접화법화 된다. 즉, M의 언술은 에세이스트(‘나’)의 언술 속에서 목적보어(‘자기’)가 되는 것이다. 『독학자』의 경우 대화부분은 통상 쓰이는 큰따옴표가 아닌, 혼잣말이나 혼자 생각을 묶음 할 때 사용되는 작은 따옴표로 묶음 된다. 『독학자』의 대화 부분이 대개 주인공 화자(이하, ‘독학자’)와 S간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감안할 때, 작은따옴표 속의 대화는 하나의 인물이 두 개의 주어(‘나’와 ‘또 다른 나’)가 되어 겪는 내적 갈등과 같다.

말하자면, 독학자와 S는 다른 인물이 아닌 동일 인물로, 두 개의 주체로 분열하여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두 소설에 나타나는 기본 플롯의 요점은 결합이 아니라 분열에 있다. ‘나’는 “나 자신이 타인일지도 모름을 의심”하는 순간부터 스스로부터의 이탈을 시도한다.[회색 時, 33쪽] 에세이스트와 독학자의 무의식에서, M과 S는 각각 상상적 자기(Moi imaginaire)와 상징적 주체(Sujet symbolique)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에세이스트는 “M과 분리된 후,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태고의 광경”을 목격하며,[에세이스트, 138쪽] 독학자는 자신에 의해 “발견당한 존재”였던 S와의 결별을 작정하면서부터 독학자로서의 일생을 설계한다.[독학자, 194쪽] 한편, 『당나귀들』에 등장하는 야니네의 독백에서 거울의 테마는 앞선 두 소설들에서보다 직설적인 방식으로 이원화된 세계를 반영한다.

  그 집의 창문을 통해서 안이 들여다보이는데, 거기는 거울이 있고 거울 안에는 다시 좁고 긴 벽과 유리창이 보인다. 어느 날 나는 환희에 차서 반으로 갈라졌고, 고통도 없었고, 내 반신은 지붕 위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불충분한 ‘나’를 이제 주저해야 한다.[…] 까마귀들이 그의 눈을 파먹지 못하게 나는 빗자루를 들고 휘두르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그가 말했다.[당나귀들, 128쪽]

‘나’에게서 떨어져나간 ‘자기’를 가리키는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벌을 받고 있다. ‘그’는 누군가의 흉내를 내며, “누군가의 역할,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대신”한다.[당나귀들, 129쪽] 야니네의 이야기 세계에서 모든 ‘나들’은 “반쪽으로 나누어질까 봐 두려워한다”.[당나귀들, 130쪽] 이와 같은 분열-변신의 과정은 이야기 내용뿐만 아니라 서술법의 층위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나’는 ‘그’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나’로 변신한다. 이윽고 ‘나’는 진짜로 “반으로 갈라진 채 창 밖으로 흘러나가”버린다.[당나귀들, 133쪽]

  나는 멀리서 나를 감상했다. 그 행위를, 그 모든 시선을, 피아노 치는 달 속의 여자들과 거리를 두고 멀리 앉아 말없이 있는 나를.[회색 時, 29쪽]

이와 같이, 일인칭 화자의 분열된 시선(‘바라보는 나’와 ‘바라보여지는 나’) 및 메타 인칭적인 서술(일인칭의 삼인칭화)은 자아의 분열 혹은 경계적 상황을 외연한다.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이러한 정황을 불안(정)함(intranquillite)이란 용어를 통해 풀이한다. 불안(정)함이란 ‘의식적 무의식, 무의식적 의식’을 뜻하며, ‘나’에게서 떨어져나간 ‘자기’가 처한 경계 혹은 틈새의 불안하고도 불안정한 상태를 가리킨다. 무의식이 의식화되고 의식이 무의식화되는 임계지점에서 ‘자기’는 여러 인물들로 창조되며, 주체는 스스로를 자기의 밖으로 추방한다.[Peut-on appliquer la litterature a la psychanalyse?(Minuit, 2004), 101-102쪽 참고]

배수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정체성은 종종 주변의 다른 인물(심지어 동물)의 그것과 맞물리거나 겹쳐진다. 「집돼지」에서 ‘반인반수’의 부조가 새겨진 벽장은 주체의 불안(정)함과 그로 인한 괴물성을 상징한다. “벽장 문을 열면 그것은 두 조각으로 깨어졌다가 문을 닫으면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하나로 합쳐”진다.[집돼지, 194-195쪽] 사건의 발단은 “거대한 돼지”처럼 묘사되는 M이 요란의 집 지하에 살고 있는 돼지를 사냥하러 오는 데서 시작된다.[집돼지, 218-219쪽] M은 요란의 제의에 따라 벽장 안에 들어가 돼지의 동태를 살핀다. 돼지는 벽장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벽장을 공격하다가 M을 발견하고 잡아먹는다. 그런데, 요란은 “돼지가 나오는 집에는 살 수 있어도 돼지가 죽은 집에서는 살 수 없”으며, 실제로는 가끔씩 찾아오는 돼지가 그리 불편하지 않다는 고백한다.[집돼지, 225쪽] 돼지는 요란의 잠재된 충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벽장은 요란의 아기집(무의식)이며, 그 벽장 안에 들어간 M은 요란이 잃어버렸던 ‘자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집돼지 사냥은 요란에게 잠재된 불안(정)함이 육식성(살해를 사주하고 또 다른 살해를 방치하는 초자아 요란, 사냥을 나섰다가 외려 죽임을 당하는 자아 M, 죽음을 거행하는 이드 돼지)으로 표출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결국, M의 죽음과 돼지의 실종 이후, 요란은 “생김생김이 요란을 닮”은 군중들 사이로 영영 사라져버린다.[집돼지, 230쪽]


2. 은둔하는 주체

배수아의 낯섦은, 둘째, 초현실주의적 서술 전략(낯설게하기와 자동기술법 등)으로 파악될 수 있다. 예의 야니네의 독백에서, ‘나’의 분열은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온 지형학적 이동이며, 거기에서 파생된 ‘자기’의 둔갑술은 의식 안에서 무의식을 쓰는 자동기술이다. 이러한 전략은 ‘나’의 자의식을 자동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의식으로부터 ‘나’를 소외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배수아의 주어는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나의 금기’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다. 때문에 ‘나’는 범속한 ‘나들’의 “낭만적인 부주의함” 혹은 나르시시즘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² [독학자, 208쪽]

배수아의 근작에서 ‘나’는 이름이 없다. ‘나’는 어떤 고유한 명사로도 대변되거나 대체되지 않는다(‘나’를 실종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나’라는 안전한 대명사 속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훌」은 일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닮은 소설이지만 독자는 어느 문장에서도 ‘나’라는 주어를 찾을 수 없다. ‘내’가 ‘나’를 지칭하는 대신, 타자가 ‘나’를 훌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기 때문이다. 사실 훌은 이름이 아니라 다중의 인칭이다. ‘나’는 훌이고, ‘너’도 훌이며, ‘그’도 훌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물들의 성정체성 역시 무의미하다. 에세이스트는 M에 대하여 “단순한 자웅결합의 쾌락에 순응하기에”는 “너무나 독립적이고 너무나 중성적”인 인물로 묘사한다.[에세이스트, 136쪽] 독학자의 경우,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그는 “폐쇄적인 성 정체성”의 구속을 받지 않으며, 성적으로 전혀 분화되지 않은(세속적 의미의 성장을 거부하는) 상태의 애어른이라 할 수 있다.[독학자, 126쪽] 때문에 S를 향한 그의 동성애는 실제적인 결합을 추구하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인 동시에 둘인 존재가 그리는 영원한 평행선과 같은 것이다. 들뢰즈 표현을 빌자면, 배수아의 인물은 ‘하나도 둘도 아닌, n개의 성’을 외연하는 무성적인 존재인 것이다.

무명무성(無名無性)의 ‘나’라는 존재가 친숙하면서도 낯선 목적어 ‘자기’에 대해 느끼는 섬뜩함은 “완전한 번역투” 문장들에서 두드러진다.[일요일, 235쪽] 언어를 낯설게 하는 것은 언어의 공간적인 이동에 해당된다. 작가가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쓰는 것은 익숙한 우리말을 그 기호로부터 낯설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배수아의 인물들에게 언어는 거울단계에서 교환되는 시선과 같다. “나와 타인의 존재 이유”는 “오직 언어를 교환하기 위해서”이다.[독학자, 91쪽] 그런데 교환적 의미의 언어는 즉물적 언어 형태에 대한 대자의 물음에 연관된다. 배수아의 일인칭 문장에서 ‘나’는 “절대값과 언제나 일치”하지 못한다.[에세이스트, 6쪽] 예컨대, “목소리는 말했다”라는 표현에서, ‘나’는 인격화된 목소리에 대하여 타자화 되고 소외된다.[에세이스트, 5쪽] 이런 식의 사물주어 번역 문장은 즉물적 자아의 상태를 동경하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내재한다. 즉자로서의 ‘나’는 “불만과 결핍과 갈증으로 가득한” 인간 내부에서 비롯되었으나,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응시한다”.[에세이스트, 145쪽] 언술의 주체인 ‘나’는 문장밖에 있고, 문장 안에 실재하는 것은 언술의 대상인 목소리뿐이다.

  멘델스존 바톨리 거리, 음악에 집중하면서 눈앞에서 내가 타야할 기차가 왔다가 사람들을 싣고 가버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열한 개의 노래, 일곱번째 노래, 열네번째의 심포니, 작품번호 135, 로르카, 아폴리네르, 릴케 그리고 퀴셀벡커의 시. 독창이 시작된다, 어떠한 위안도 잔영도 찬양도 없이 죽음은 전능하다.[에세이스트, 8-9쪽]

즉자는 대자의 자리를 노리고, 대자는 즉자화 하기를 자청한다. “청각이 스스로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기억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반면, ‘나’는 그 기억들, 문장들의 주어도, 주체도 아니다.[에세이스트, 8쪽] 사물주어(전능한 죽음)가 문장을 점령한 것이다. ‘이름’이 되어버린 시인들의 시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주어로서의 ‘나’는 결락한다. 즉, ‘나’는 “수동적으로 기록되는 신분”, 즉, 목적어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 문장 안에 실재할 수 없다.[당나귀들, 231쪽] 문장에서 “나는 분명히 존재하였으나, 기억도 인식도 없”다.[당나귀들, 265쪽]


3. 물질적 에너지

문장의 진짜 주어는 절대값에 일치하는 언어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 일찍이 언어를 터득한 배수아의 ‘나’에게 학교는 지리멸렬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나’는 수업시간에 몰래 다른 책들을 읽었으나, “내가 읽은 것들은 진정 내가 읽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내 불안이 읽은 것에 불과했다.”[에세이스트, 101쪽] 수업 중에 책을 읽던 에세이스트는 여교사에게 걸려 책을 빼앗기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 이후 에세이스트는 “문자와는 너무도 다른” 세계에서 강요되는 “심각한 불의”에 대해 분개하게 된다.[에세이스트, 149쪽] 또한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리고 글을 쓰면서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하는 것을 그 불의에 맞서는 행위로 간주하기에 이른다.[에세이스트, 146쪽]

배수아의 인물들에게 책은 자꾸 다르게 읽히는 ‘자기’이며, 어딘가 숨어있는 ‘나’이다. 진짜 삶은 책이 생산하는 ‘자기’를 읽는 것이며 ‘내’가 생산하는 책을 갖는 것이다. 때문에 책을 빼앗기는 것은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다.³

즉, 책의 모티프는 삶의 부조리함에 관련됨으로써 죽음의 충동(삶의 충동 이면에 잠재된 소비 가능한 에너지)과 동시에 삶의 이유를 환기시키는 요소다. 에세이스트와 마찬가지로, 독학자는 여교사로부터 책을 빼앗긴 기억이 있으며, 그 경험을 “부조리라는 철학에 지배당하고 포섭당”한 사건이라 일컫는다.[독학자, 163쪽] 이 에피소드에서 흥미로운 점은, 책을 빼앗긴 데 대한 대응의 방법이다. 독학자는 여선생이 교실을 비운 사이, 여선생의 핸드백(으로 추정되는 가방)에서 오백 원 권 지폐 한 장을 훔친다.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책을 되찾아 오는 것이 아니라, 책을 돈으로 대신함으로써 “신성한 명예를 수호”한 것이다.[독학자, 177쪽]

배수아 소설에서 책은 종종 돈의 문제와 연계되며, 교환경제 원리에 따르는 값어치로 묘사된다. 『일요일』은 구순기적인 결핍과 항문기적인 요구를 형상화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결핍된 것을 채우는 방법은 순수하게 그리고 직설적으로 돈의 문제와 연관된다. “사람들은 돈을 아주 세속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반대”로,[일요일, 81쪽] 돈은 “정신의 독립성”을 위해 필수적이다.[일요일, 82쪽] 때문에 물질적 궁핍(“밥주머니와 돈주머니를 위협하는 어떤 실질적인 것”[당나귀들, 25쪽])은 종종 정신적 가난(“계몽의 부재”[같은 곳])에 비유된다. 경제적 교환 가치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돈”이란 표현에서 보듯이 천진하리만큼 현실적이다.[마짠, 159쪽]

이러한 맥락에서 배수아의 소설에서 유난히 자주 눈에 띄는 선물이란 단어는 구순기적 수요에서 월반한 항문기적 공급(황금-돈)으로 간주된다. 이를테면, 음악에 대한 선물의 비유는 정신적 가치를 물질적 가능태에 빗대어 구체화한 실례라 할 수 있다. 『당나귀들』의 주인공 화자(이하, ‘당나귀’)는 평범하게 들리던 음악이 어느 날 “진짜 소리를 선물”할 때 비로소 삶을 재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당나귀들, 97쪽]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떠나는 여행을 위해서,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지불할 일이 없”다.[당나귀들, 251쪽] 에세이스트는 음악을 듣는 산책길을 “난생 처음 선물”에 비유하며,[에세이스트, 93쪽] 책과 음반을 사기 위해 돈을 아낀다. 게다가 에세이스트는 돈의 물질적 가치를 M의 정신적 가치에 빗대면서 사랑(삶)을 강조하는데, “책이나 음반을 사는 데 전혀 돈을 아끼지 않”는 M은 영혼을 바쳐 읽어야 하는 “그림이 전혀 없는 책”이다.[에세이스트, 120쪽, 157쪽]

독학자가 사랑했던 S의 성장 일화에서, S는 어머니로부터 착한 일을 하면 아버지의 수첩에 그것을 기록하는 법을 배웠다. S가 수첩에 착한 일을 적으면 그것을 읽은 어머니는 S에게 선물을 주었다. 여기서 독학자는 선물이 선행을 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기록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런 식으로 선물의 모티프가 책-글의 테마와 맞물려 서술되는 경우는 빈번하다. 배수아의 화자는 돈이란 게 음악과 책을 사랑하는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당당하게 말한다.[당나귀들, 117쪽] 즉, 책-글로 이루어진 세상은 돈-선물의 물질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물(이란 단어)은 물질적 교환가치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가치체계까지 은유하는 거대한 질료이기도 하다.

  우리는 움직임 없는 이동을 선물 받는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우리와 우리의 가방의 이동일 것이나 기억으로 자리잡는 것은 오직 말 없는 풍경의 이동, 소리 없는 마음의 이동, 문자로 나타나는 세계의 이동, 시詩의 이동이 될 것이다.[당나귀들, 50쪽(이하, 필자 강조)]

일찍이 프로이트는 항문기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아이=대변=페니스=선물’의 등식을 제시한 적 있다. 구순기를 거친 아이는 필요와 요구의 단계를 경험하고, 항문기에 접어들면서 욕망과 충족의 메커니즘을 어머니를 통해 배워나간다. 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현실에 부딪치면서 스스로를 어머니에게 선사할 수 있는 황금빛 대변으로 여긴다. 어머니에게 선물할 수 있는 황금-돈은 물리적으로는 페니스를 표상하며, 심리적으로는 팔루스를 상징한다. 이러한 동일시의 과정에서 어린아이는 상상적으로 어머니의 팔루스로 존재하느냐, 상징적으로 아버지의 팔루스를 소유하느냐의 셰익스피어(혹은 사르트르) 식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말하자면, 항문기는 상징적인 거세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아이의 과도기에 해당하며, 성기기(상징계)에 편입하기 위한 홍역기와 같다.

주목해야할 점은 배수아 소설이 프로이트적 성장 이론을 설명하는 효과적인 텍스트인 동시에 일방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공식을 전복하는 열린 텍스트란 것이다. 즉, 인물들은 ‘죽느냐 사느냐(존재냐 소유냐)’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두 가지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를테면, ‘내’가 제기하는 존재론적 의심은 그 물음을 예시하는 과정(책을 빼앗기다)과 해답을 얻어 가는 방법(선물을 받다)을 통해 추상적 관념의 세계를 극복한다. 항문기 특징이 성기기(오이디푸스기)와 겹쳐지거나 성기기마저 포괄하면서, 선물-돈은 팔루스-글의 등식 선상으로 확장된다. 물질적 에너지는 거세 이전의 팔루스 되기를 표상하며, 문자적 가치는 거세 이후의 팔루스 갖기에 해당된다. 그만큼 항문기적 값어치는 주인공의 글쓰기를 실현하는데 주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거세 이후의 가치관을 설계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다.


4. 상징적 리비도 - 가능한 글쓰기

배수아 소설에서 편지는 전오이디푸스 단계와 오이디푸스 단계를 포괄하는 하나의 모티프(팔루스) 역할을 한다. 교환과 글에 의존한단 점에서 편지는 선물-돈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

  노용 오빠에게.[…] 그들은 그러면서 우리 모두에게 무슨 서류에 서명을 시켰어. 우리는 그 서류의 정체도 모르고 있는데 말이지. 지금도 그날의 식사 생각을 하면 구역질이 나. 우리의 손이 얼어서 곱아 있었던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푼도 주지 않으면서 언제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해...... 하고 말하지.[일요일, 227-228쪽]
준희에게./ 돈을 보내주어서 고맙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 네가 생각도 못할 만큼 엄청나게.) 그러나 왜 너는 나에게 돈을 보내주지?[일요일, 232쪽]
지선에게.[…] 나는 그냥,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쓰면서 낙서할 뿐이다...... 정말 글을 쓰고 싶어하는 것은 너라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이중인격자나 욕구불만자이거나 혹은 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글 따위를 발표하는 것으로 마스터베이션할 생각은 없다.[일요일, 233-235쪽]

『일요일』에 등장하는 노용과 준희, 지선 등이 주고받는 편지들은 구순기적 결핍과 항문기적 충족을 고스란히 직역하고 있다. 결핍, 욕구, 해소의 과정은 편지에서 구순기적(식사, 구역질), 항문기적(돈), 성기기적(서명, 낙서, 글) 표현들과 한데 뭉쳐 드러난다. 편지들은 결핍-욕망-글의 다중적이며 모순적인 기표로 작용한다. 스무살의 독학자 역시 편지를 쓴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리비도)에 시달리다가, 자신이 흠모하는 P교수에게 편지를 쓰는 데 열정을 소비한다. 편지를 읽은 P교수는 독학자에게 답장을 보내는 대신, 퍼스널 컴퓨터를 선물로 남긴다.

  작년에 S도 이 년치 대학 등록금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고 마련했다고 나에게 자랑했던 16비트 IBM XT 기종이었다.[…] 그 편지에서 나를 읽은 것이다. 나를 만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선물을 남길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어쩌면 S가 질투할지도 몰랐으나―분명히 그럴 것이다―나는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나는 그에게서 받는 퍼스널 컴퓨터에 글을 쓰고 있다.[독학자, 101-103쪽]

축적된 자유 에너지는 압축과 전치의 이차 가공, 즉 이미지에서 상징으로의 이동 과정을 통해 억압된다. 그런데 배수아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과잉 에너지는 일반적(일방적) 에너지 공식을 역전시키거나 소통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독학자가 편지를 쓰고 선물을 받고, 선물을 매개로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에서 우리는 ‘상징적 리비도’라는 전혀 새로운 이름의 에너지를 발견하게 된다. 앞서 책의 신성성이 물질의 교환을 통해 증명되듯이, 편지의 상징성은 리비도의 소비-축적의 순환으로 설명된다. 독학자는 리비도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적 행위로써 글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서 물질적 에너지를 소비한다. 독학자는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하기를 바란다.[독학자, 172쪽] 그가 궁리하는 이차원의 세상이 “소박하고 낮은 수준의 경제와 단순육체 노동”을 요하는 삼차원의 장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글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는 (구순기적) 필요와 (항문기적) 충족의 관계에 얽혀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같은 곳]

에세이스트의 경우, 편지의 상징적 리비도는 더욱 간명하게 나타난다. “M에게 무엇인가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된다.[에세이스트, 166쪽] 에세이스트가 편지의 가능성(상징적 리비도)을 통해 글쓰기 세계로 편입되는 반면, 배수아의 다른 주인공들은 편지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글쓰기 문제에 봉착한다. 편지 쓰기와 반대로 편지 읽기는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또한 그는 많은 편지를 책상 위에서 썼다. 관청이나 은행에 보내는 것뿐 아니라 개인적인 편지들도 썼다.[…] 그러니 혹시 편지를 받게 되더라도 답장을 보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 다음은 너무나 흐려 읽을 수가 없다)[마짠, 137-138쪽]

『당나귀들』에서, 편지는 고착과 퇴행의 단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상상계에 빚졌으며 항문기에 머문다.⁴ 때문에 받지 못한 편지는 타나토스-에로스의 문턱 앞에 서 있는 사자(使者)-검열자로 전치 된다. 배수아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편지 전달하는 사람’은 이러한 사자-검열자의 역할만 아니라, 읽을 수 없는 편지의 기표이다. 당나귀는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꿈’을 꾸면서 우체부의 방문을 받는다. 꿈속의 우체부는 꿈을 꾸는 당나귀를 깨우고 싶어한다(“당신이 죽지 않았나 걱정되었어요”[당나귀들, 272쪽]). 그에게서 어느 여인이 쓴 편지를 건네 받았지만, 당나귀는 그것이 꿈이므로 편지를 읽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타인이 쓴 편지는 영원히 읽을 수 없다.”[당나귀들, 271쪽] ‘내’가 읽는(읽을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쓴 편지가 아니라, ‘내’가 쓰는 글이다. 그렇게 당나귀는 꿈속의 편지를 매개로 ‘나’의 기억과 타자(‘자기’)의 기억을 뒤섞고, 그 꿈을 현실과 혼동한다. 편지는 그것이 타자에 의해 읽히기를 바라지만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글쓰기를 암시한다.

「양곤」에서 주체의 거울단계적 분열은 항문기적 불안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칼에 손이 베인 적 있는 ‘그’는 열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것을 일생의 가장 중대한 일에 빗대어 표현한다. 한편, 칼로 남자의 손을 찌른 적이 있는 ‘그’는 고열로 정신을 잃을 뻔하다가 ‘또 다른 그’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그’가 스스로의 손을 찌른 사건이 각각 능동태와 피동태의 기억으로 서술된다는 점, 그리고 편지를 쓰고 받는 과정에서 심부름을 하는 여자(마을의 소녀, 가정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등의 정황으로 볼 때, ‘그’가 쓴 편지의 수신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편지는 박제기술자인 ‘그’가 박제하고 싶어하는 ‘또 다른 그’의 기억이다. 모든 억압된 것은 회귀하기 마련이다. 배수아의 ‘내’가 읽지 못한 편지는 사실 ‘내’가 ‘자기’에 대해 쓰는 글이다. 그래서 편지는 글쓰기의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 즉, “전달에 의해서 자신이 타자화되는” 결정론적 운명을 상징한다.[당나귀들, 232쪽] 그 운명을 피해 여태껏 배수아의 ‘자기’는 둔갑해왔고, ‘나’는 은신해왔던 것이다.

오늘날 배수아의 경향은 비루함의 전형성(공주들과 왕자들의 기호화된 팬터지와 그 좌절)에서 보편성의 비범함으로의 진화로 요약될 수 있다. 작가의 근래 소설들은 주로 ‘내’가 기억하고(기승전결 없는 무의식의 기술), 읽고(시, 소설, 에세이 등의 인용), 쓰는(수신수취인 불명의 편지, 어법에 어긋난 작문) 세 겹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소설의 서사와 글의 테마가 그만큼 밀접하게 연관돼있는 것이다. 즉, 작가의 세계는 글이란 질료에 문화적 주석이 삽입된 철학적 하이퍼텍스트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질료인(글)과 동력인(쓰기)이 소설의 형상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동시에 형상인의 가능한 공간을 넓혀주고 있는 셈이다.

배수아에게 목적인은 한층 확장된, 그리고 자꾸 확장되는 글세계이다. “쓰기를 원했으나, 그것이 단지 소설의 형태로만 나타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탈영토화된 글쓰기는 새로운 가능성의 글세계를 재영토화 하고있다.[‘작가의 말’ in 에세이스트, 197쪽] 주체이되 주인이기를 거부하는 작가의 재영토화 작업은 이미지와 상징이 얼레진 지형학을 설계하는 것이고 그 미지의(실재의) 세계와 소통하는 것이다. 배수아네 근경(rhizome)의 텃밭에서, 무의식의 싱싱한 줄기는 의식의 문턱을 넘고, 글의 질긴 뿌리는 쓰기를 통해 무성 생식하고 있다. 거기서 꽃핀 변전의 이미지와 잡종화된 상징이 언젠가 실하게 열매맺기를, 새삼 기대해본다.

¹ 본문에서 인용되는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은 ‘일요일’로,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은 ‘에세이스트’로, 『독학자』(열림원, 2004)는 ‘독학자’로, 『당나귀들』(이룸, 2005)은 ‘당나귀들’로, 소설집 『훌』(문학동네, 2006)의 중단편들은 각각 ‘회색 時’, ‘훌’, ‘양곤’, ‘마짠’, ‘집돼지’, ‘시취’, ‘우이동’ 등으로 약식 표기함을 일려둔다. 아울러, 졸고의 제목은 작가도 인용한 바 있는 페터 한트케의 문장에서 따왔음을 밝혀둔다 :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에세이스트, 174쪽]

² 모든 문장은 ‘나는......’으로 시작하며 모든 책의 제목도 ‘나는......’ 혹은 ‘나의......’ 또는 ‘내......’ 그런 식이다. 그는 유독 여자들에게 일어나기 쉬운 망상증의 한 종류로 그런 징후를 미리부터 낌새 채고 있었다.[일요일, 220쪽]// 그러나 그 납득과 함께, 동시에 내가 마치 뭔가를 짐짓 꾸며 말하고 있으며, 늘 변명을 늘어놓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의식에 가득 찬 설명을 항상 덧붙이며, 나는 말이야, 나는 말이야, 하면서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말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콧대 높은 중하류급 에고이스트 계층에 속한다는 인상도 함께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에세이스트, 118-119쪽]

³ ‘죽음? 그것이 두렵지는 않아. 나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준비하고 기다릴 뿐이지. 내가 정녕 두려워하는 것은, 시체처럼 누워, 아무것도 읽지도 못한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면서 내 일생의 마지막 시간을 헛되이 흘려 보내는 거야.’[당나귀들, 173쪽]

⁴그녀가 편지를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훨씬 나중에야 전해들었다. 나와 야니네 사이에는 너무 많은 다리와 실개울들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의 실개울과 다리를 건널 때마다 숲 속 들장미 덩굴 사이에서 나타난 난장이에게 지폐를 건네야만 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모두 빚졌다.[당나귀들, 134-135쪽]


단평: 중간자 작가의 탄생(『핑퐁』)

박민규의 신작 『핑퐁』(창비, 2006)은 집단 따돌림과 구타에 시달리는 못과 모아이가 탁구를 배우면서 어른이 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성장소설이다. 그럴 리가. 사실은 우주로부터 경고를 받은 인류가 두 소년들에 의해 포맷된다는, 어이없이 끔찍한 공상과학소설이다. 박민규의 지구는 시뮬라시옹, 즉 프로그래밍 된 세계이다. 따라서 지구의 생성원리는 복제된 이미지들이다. 지구는 한 조각의 카스테라로 반죽되거나, 한 마리의 거대한 개복치로 납작해지거나, 너구리나 대왕오징어 따위의 외계생명체가 출몰하는 모형의 세계이다. 하나의 세기와 세계를 정리하고 무화시킨 냉장고가 스스르 열리듯이, 세계의 원형이며 집약인 탁구대가 못과 모아이 앞에 슬그머니 놓인다.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모두 좀 덜 자란 사람들이다. 육체적 발육이나 정신적 성장의 의미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 조금 쳐지는 사람들인 것이다. 세계를 끌고 나가는 건 2퍼센트라던데, 못과 모아이는 나머지 98퍼센트에마저도 들지 못하는 인간이다. “누락도 아니고, 소외도 아니다. 어떤 표현도 어떤 동의도 한 적 없”다.[핑퐁, 19쪽] 단지 세상이 그들을 ‘깜박’했을 뿐이다. “세상을 박해하는” 2퍼센트의 “프로”들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계레신문사, 2003), 243쪽] 그렇다고 듀스포인트의 세상을 1할 2푼 5리의 승률로 살아가는 98퍼센트가 될 의지도 없었다. 어느 날 운명처럼 ‘아마추어 탁구인’으로 거듭난 못과 모아이는 ‘비지구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찾게 된다. 세계가 강요하는 “자기만의 산수”는 그렇다 쳐도, 자신들을 ‘깜박’한 ‘지구의 수학’에 굴복할 순 없었던 것이다.[카스테라(문학동네, 2005), 73쪽]

상상력에도 문법이 있고 검열이 있다. 마찬가지로 복제 세계에도 규율이 있고 감시자가 있다. 지구를 관리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수상해하고 궁금해하는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방’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어쩌면 “아메리칸 히어로들”이 세계를 모니터링 하는 “정의의 본부, 중앙통제실”일 지도 모른다.[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 38-40쪽] 박민규의 인물들은 그 방에 들어가 보고 싶어한다. 이를테면 “협회의 〈관계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카스테라, 269쪽]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는 관계자란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와 같은 중간자이며,[카스테라, 273쪽] “여기, 저기, 그리고 거기”의 문지방에 발을 걸친 경계인이다.[핑퐁, 213쪽] 니체(신의 대행자)는 짜라투스트라의 목소리(신의 관계자)를 빌어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세 가지 변용을 통해 초인의 탄생과정을 설명했다. 타율적인 낙타, 자율적이되 고독한 사자, 긍정적이고 궁극적인 어린아이가 그것이다. 여기서 못과 모아이는 낙타의 단계(잉여인간), 사자의 단계(탁구인), 초인의 단계(비지구인)를 거치는 일인칭의 인간형을 환유하며, 세끄라탱은 우주적 비밀과 세계의 허상을 폭로하는 삼인칭의 짜라투스트라를 은유한다.

박민규는 스스로를 신이나 니체보다는 짜라투스트라로 여긴다. 말하자면, 세끄라탱은 소설 속에 틈입해서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소설 밖에서 뒷짐지고 ‘쿨한 포즈’를 취하고도 싶은 작가의 소설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작가 관찰자 시점(탁구 선생)과 전지적 작가 시점(우주의 관계자)에 두루 충실한 세끄라탱은 ‘중간자 작가 시점’을 대변한다. ‘낮말을 듣는 새 밤말을 듣는 쥐’로 자기를 명명하고 “탁구계(卓球界)의 간섭자”로서 자기를 선언하면서, 세끄라탱은 두 시점을 교묘하게 혼합하고 교차시킨다.[핑퐁, 119쪽] 그의 존재 자체가 작가의 외피이며 서술전략인 셈이다. 결국 세끄라탱은 인류의 운명을 담보로 탁구 시합을 주관하고, 비지구인들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지구/소설의 시뮬라시옹을 유지할 것인가 삭제할 것인가. 소설의 안과 밖에 두 다리를 걸친 작가는 소설 밖 독자에게 결정권을 떠넘긴다. 지구/소설이야 어찌 되더라도 당신은 살아남을 것이라 위로하면서. 고마워, 과연 박민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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