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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호


스크린을 누비던 원로영화배우 최무룡 세상 떠나던 날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간 명배우와의 이별식'

□ 글·이정아(출판기획팀 기자) □ 사진·박해윤, 최문갑 기자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당사자들이라고 가고 싶어 떠나는 길이겠냐마는 남은 사람들에게는 야속함과 아쉬움이 남기 마련인가 보다. 지난 11월11일 밤 10시쯤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고 최무룡씨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병원으로 이송 중 별세한 까닭에 이들의 놀라움은 너무나 컸다.

고인이 된 최무룡씨는 그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쉬는 도중 몸이 편치 않음을 느끼고 평소 다니던 병원의 담당의사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하필 담당의사가 없는 날이라 다음날 아침에 병원에 가려고 했던 것인데 갑자기 심장마비 증세가 와서 급히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세상을 뜬 것이라고 한다.

빈소를 지키던 고인의 친인척들은 그가 폐와 심장이 워낙 안 좋았다며, 사망하던 날도 미국에 공연을 다녀온 뒤 피로가 쌓인데다 건강상태도 나빠져 과로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말년에는 일도 없고 금전적으로도 어려웠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세상을 뜨는 날까지 TV에만 안 나왔지 정력적으로 국내외 활동을 계속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임종의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은 미망인 차금자씨(55)와 자녀인 최정우·진경씨였다고.

한밤중에 영안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에 다음날 오전에야 빈소를 마련했고 늦게 소식을 접한 고인의 친인척과 친우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살아 생전 정이 많고 친구를 좋아했던 그답게 빈소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로 가득차 고인은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상주는 7명이었다. 최민수, 최정우, 최현숙, 최예숙, 최진경, 박종화, 최영숙(밍크). 최무룡씨는 여러 번 결혼을 했었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고인의 친구들도 누가 누구인지 상주들을 몰라보았다. 다만 강효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능가할 만큼 스타로 자리한 아들 최민수와 김지미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밍크 정도만 기억할 뿐이었다.

상주이자 장남인 최민수는 꺼칠한 모습에 초점없는 눈동자로 멍한 모습이었다. 눈물을 많이 흘려서인지, 울음을 참으려 했는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조문객을 맞았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마음 아프다고 했다.

고인의 며느리인 최민수의 아내 강주은씨는 “평소 자주 뵙진 못했어도 한자리에 있을 때면 늘 ‘우리 아기’ 하며 예뻐해주셨어요. 이제 그 모습을 뵐 수 없게 돼 무척 슬픕니다”라고 했다. 상중이라 경황이 없다면서 몇마디 못하고 자리를 떴지만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 빨갛게 충혈된 눈을 보니 얼마나 시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 엘리트 직원에서
한국 최고의 영화배우까지


고인인 최무룡씨는 영화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그가 자서전이라도 냈다면 책 몇권 분량은 됐을 만큼 갖가지 풍파와 영화, 스캔들 속에 살았다.

최무룡씨는 1928년 경기도 파주군 문산에서 선주이면서 곡물도매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무진년에 태어나 용처럼 살라는 뜻에서 무룡(戊龍)이란 이름을 얻게 된 그는 뛰어난 용모 덕분에 동네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고 한다.

개성상업학교를 나와 한국은행에서 근무했던 그는 해방되던 해 문맹퇴치를 위한 소인극을 하면서 연극에 매료돼 사표를 던지고 경성법전(현 중앙대 법학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49년 셰익스피어의 연극 <햄릿>에서 주연을 맡은 후 51년 채만식의 소설을 영화화한 <탁류>에 출연, 영화배우로서 발을 내디뎠다. 이후 <육체의 길> <꿈은 사라지고> <장마루촌의 이발사> <오발탄> <5인의 해병> <빨간 마후라> <남과 북> 등 5백여편에 출연하면서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무대의 화려함 뒤에는 한 남자로서의 그림자도 짙었다. 연기에 몰입하던 초창기까지 여자에 별 관심이 없었던 그는 당시 ‘눈물의 여왕’이라고 칭송받던 여배우 전옥의 딸 강효실씨(96년 11월 작고)를 만나면서 첫사랑을 싹틔웠다. 전옥의 반대를 무릅쓰고 52년 부산 해군함정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 신랑의 나이 23세, 신부 19세였다. 딸 셋과 아들(최민수)을 두기까지 두사람은 무척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촬영 도중 강씨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들떠 당장 포도주를 사갖고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을 만큼 최씨는 로맨티시스트였고 부부 사이의 금실이 좋았다”고 동료 영화배우 엄앵란은 회고했다.

하지만 62년 해외로케 때 생긴 동료 여배우 김지미와의 스캔들로 이들 부부는 이혼을 했다. 자존심 강한 장모 전옥씨의 간통죄 고소로 김지미씨는 모든 재산을 위자료로 내놓아야 했고 최씨는 가족과 헤어졌다. 이 때도 최씨의 인기는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사생활과 관계없이 절정에 달했다.

김지미씨와의 사이에 1남1녀(아들은 어릴 때 사망했고 딸 밍크가 있다)를 두고 단란하게 살았던 최씨는 무리하게 영화제작에 뛰어들어 막대한 빚을 졌고, 할 수 없이 김씨와 이혼을 해야 했다. 당시 그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마 경제적인 어려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이혼을 선택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영화빚 때문에 고생하던 그는 조력자로 나서준 여성들과 끊임없이 염문설을 뿌렸으며, 거액의 사기사건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연기활동에 열정적인 명배우로서의 모습을 잃은 적은 없었다.

중년 이후 한동안 활동이 뜸하던 그는 지난 13대 총선 때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의 추천으로 파주에서 출마,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예전의 인기가 여전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화려한 영화 경력만큼이나 풍파가 많았던 개인사


황혼기에 들어선 최씨는 본격적인 영화일보다는 원로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에 심혈을 기울였고, 소극장 공연이나 유랑극단, 해외동포 위문공연 등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펴왔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후배들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원로배우가 설 자리는 너무나 좁고 열악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오죽하면 약장사 하는 유랑극단의 무대에까지 섰다가 ‘약광고 사기죄’를 뒤집어쓰기도 했을까.

“당시 함께 유랑극단 무대에 섰던 송해, 장소팔, 남철, 남성남, 양훈, 김상순, 배삼룡, 트위스트김 등등… 이런 친구들이 모두 생활고에 시달렸던 건 아니야. 무대에 서고 싶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쓸모없는 늙은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했던 거지. 특히 최무룡씨는 무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어. 아무리 작고 초라한 무대라도 연기가 정말 하고 싶어 오른다는 걸 느끼게 했지. 아들 민수가 성공해 도와주기 전에는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리 어려웠던 건 아니고….”

그와 함께 상록회에서 활동했다는 한 원로배우의 씁쓸한 회고담이다.

왕년의 대스타의 장례식인만큼 그의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졌고 한때 아내였으며 현재 영화인협회 이사장으로 있는 김지미씨가 장례절차를 총괄했다. 조문객으로는 윤일봉, 남궁원, 신성일·엄앵란 부부, 태현실, 최지희, 이대근, 안성기, 문성근, 한석규, 이미연, 이병헌까지 함께 영화계를 이끌던 동료배우들을 비롯, 연기자 선후배와 영화계 관계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영안실을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모두들 살아 생전 그의 화려한 경력과 탁월한 연기력에 대해 입을 모았다.

3일장을 마치고 영화인장 영결식이 끝나자 고인을 태운 영구차와 유족들은 벽제화장장으로 떠났다. 최씨는 평소 주변인들, 특히 부인 차금자씨와 매제인 홍진환씨(59·전 비디오프로덕션 사장)에게 “묘지가 국토를 너무 많이 잠식해 문제다. 장례문화가 빨리 바뀌어야 한다”면서 “나 죽으면 화장해달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고인의 뜻에 따라 시신은 11월13일 낮 서울시립 벽제화장장에서 화장됐으며, 파주 통일동산 동화경모공원묘지에 안치됐다. 이 공원묘지에 최씨 가족의 납골당이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여성들에게는 잘생긴 이상형 남자로, 후배 영화인들에게는 연기자의 모범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대스타 최무룡. 이제 우린 더 이상 고인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한국 영화발전에 크나큰 족적이 된, 그가 출연한 5백여편의 영화를 통해 새로운 세기에도 변함없이 ‘쾌남 최무룡’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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