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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년 만에 아버지 몽양 여운형 묘소 찾은
여원구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아버지는 남과 북을 아우르려 했던 민족지도자, 국가유공자로 추서하길 바랍니다”
해방 전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몽양 여운형 선생. 그동안 좌익으로 분류돼 현대사에서 사라졌던 고인의 업적을 되살리는 운동이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몽양 선생의 딸이자 북한 최고위급 인사인 여원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지난 8월14일 서울을 방문하여 몽양 선생의 묘를 찾았다. 57년 만에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눈물을 떨군 여원구 여사를 단독으로 만났다.


“탕! 탕! 탕!” 1947년 7월19일 오후 1시경.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귀를 찢는 듯한 세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이 가운데 두발의 총알이 자동차 안에 있던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의 오른쪽 어깨와 등 한복판을 관통했다. 몽양 선생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그가 평소 즐겨 입던 흰색 양복은 선홍빛으로 변해 갔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쏜 총에 맞은 몽양 선생은 그 즉시 인근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유명을 달리했다.

그로부터 57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지난 8월14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몽양 선생의 묘소에서는 불귀의 객이 된 아버지와 살아생전 아버지의 나이를 훨씬 넘긴 고희의 딸이 만났다. 소복 차림으로 잡풀이 엉킨 묘역의 비탈길을 오르는 여원구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74). 그가 아버지의 묘소를 향해 흔들리는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여의장은 아버지의 영정 앞에 흰 국화 한 송이를 바친 뒤 잔을 올리는 것으로 57년 만의 상봉을 짧게 끝냈다. 이날 누군가 몽양 선생의 무덤 앞 상석에 수박을 비롯한 과일로 상차림을 해놓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몽양 선생은 반세기가 넘도록 친자식이 올려놓은 물 한 그릇 받아볼 수 없었던 외로운 혼백이었다. 남한에 묻힌 아버지와 북한에 살고 있는 딸. 현재진행형의 ‘분단’이 살아남은 자의 눈물로 엉겨붙는 슬픈 밤이었다.

지난 8월15∼16일 ‘8·15 민족통일대회’가 남북 민간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워커힐호텔에서 열렸다. 남북 민간단체가 서울에서 8·15 공동 행사를 치른 것은 해방 이후 처음 있는 역사적인 일이다.

8·15 민족통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8월14일 오전 고려항공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북쪽 대표단은 총 1백16명. 몽양 여운형 선생의 셋째딸 여원구 의장도 북쪽 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것이다. 원래 서울에 살았던 여의장은 둘째언니(여연구)와 함께 46년 월북한 이후 그곳에서 아버지의 암살 소식을 들었고 남한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만큼 남한에 살고 있는 혈육과도 생이별한 상태. 여의장은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인 8월15일 오후 워커힐호텔에서 남측 혈육 10여명과 극적인 상봉을 했다. 이날 만남은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이하 추모사업회)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는데, 호텔 로비에서 만난 가족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눈시울을 적셨다.

해방 전후 대표적인 민족지도자였던 몽양 선생

곧이어 여의장과 남측 가족들의 오찬이 기자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오붓하게 마련됐다. 이 자리에서 사촌오빠 여성구씨의 아들 여인성(37), 여명구씨의 아들 여인호씨(35) 등 사촌 조카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여의장에게 큰절을 올렸고 이를 바라보는 여의장은 무척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1시간30분 남짓 이어진 가족 오찬 자리에 필자도 어렵게 동석했는데, 가족들의 모임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여의장은 ‘핏줄’과의 만남으로 다소 감정이 흥분된 상태였는지 식사할 생각도 잊은 채 “이게 얼마 만이냐?” “반갑다!” “남쪽에 살아있는 가족들의 이름과 직업, 나이를 또박또박 적어 달라”는 등의 말을 건네며 대구에서 올라온 사촌올케 윤기수씨(77)와 오세연씨(72)의 얼굴을 연신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여의장은 또 “인호가 누구냐? 연구 언니가 서울 갔다 오더니 ‘인호가 똘똘하니 아주 훤하게 생겼더라’하시며 매일 네 자랑만 하셨다. 그래서 특히 네가 많이 보고 싶었어!”라며 사촌 조카의 등을 토닥거리기도 했다.

여의장은 주로 호박죽, 김밥, 수박, 빵 등으로 가볍게 식사를 하며 남쪽 친척들에게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물었다. 주로 여의장이 대화를 이어가고 남쪽 친척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산의 아픔이 되살아나서일까. 간혹 무거운 표정과 한숨도 이들 사이에 오갔다. 옆 테이블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북쪽 대표단은 상당히 경직된 표정이었지만 간간이 남북 핏줄의 만남에 애틋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필자가 “김정일 위원장의 꽃바구니 선물이 이번에는 없었나 보죠?” 하고 여의장에게 묻자, 그가 필자를 기관원으로 착각했는지 순간 멈칫 하는 표정이다.

“이번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바빠서 예전처럼 아버지 산소에 갖다놓으라고 꽃바구니를 주시지는 못했어요. 저도 남한에 올 계획이 없었는데 갑자기 서울에 오게 됐으니까요.”

지난 91년 몽양 선생의 둘째딸 여연구도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남북 여성 토론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 부친의 묘소를 참배한 일이 있었다.

“그때 김정일 위원장님이 연구 언니랑 저랑 남동생 붕구까지 함께 부르셨어요. 아버지 묘소에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이는 언니에게 위원장님은 ‘45년 만에 가는데 어떻게 아버지 묘소에 안 갈 수 있냐. 그냥 오면 아버지가 욕하신다’면서 언니 이름과 제 이름으로 2개의 꽃바구니를 보내주셨어요. 그때 우리 형제들 기분이 참 좋았죠.”

몽양 선생은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딸 여연구, 셋째딸 여원구, 넷째아들 여붕구씨만 월북했다. 여붕구씨는 91년 여연구 누나가 서울을 방문하던 날 누나를 배웅한 후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누나인 여씨는 9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현재 몽양 선생의 자녀 가운데 여원구 의장만 유일한 생존자다.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어도 여의장이 추억하는 몽양 선생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날 오찬 자리에 참석한 추모사업회 여철연 회장(86)은 여의장에게 몽양 선생에 대한 질문을 서너 차례 던졌다.

“여운형 선생은 ‘태양 같은 사람’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그분을 쫓아다녔죠(웃음). 강원룡 목사는 ‘내가 살아오면서 만나본 남자 중에 제일 잘생겼다. 남자인 내가 봐도 멋있다’고 늘 말하는데, 아버지 여운형 선생은 어떤 분이셨소?”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의장은 미소로 답을 대신할 뿐, 몽양 선생에 관한 이야기는 도무지 꺼내지 않았다. 다만, “북쪽에서는 몽양 선생을 ‘항일투쟁’과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한 ‘반일애국열사’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다”는 말만 덧붙였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여의장은 엷게 화장한 얼굴에 피부가 상당히 고왔다. 연두색과 하얀색이 섞인 체크 무늬 상의에 연두색 스커트를 차려 입은 모습이 무척 단아해 보였는데, 왼쪽 가슴에 단 붉은 깃발 모양의 김일성 주석 배지만 없으면 영락없이 남한의 인자한 할머니다. 부드럽고 낮은 음성은 그의 우아함을 돋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는데 추모사업회 여철연 회장의 질문을 슬쩍 비켜나갈 때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란 그의 직책이 퍼뜩 상기될 만큼 단호한 일면도 느껴졌다.

현재 그는 최고 인민회의 부의장 직책도 맡고 있는데 그의 서열을 굳이 남쪽 식으로 따지자면 국회 부의장쯤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이번에 여의장이 다른 북쪽 인사들을 제치고 대대적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유가 결코 그가 북쪽에서 차지하는 서열 때문은 아니다. 그는 몽양 선생의 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전국민의 이목을 끌었다.

“몽양은 카리스마와 언변이 남달랐던 뛰어난 민족지도자였다”

몽양 선생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양반 가문의 9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그가 22세이던 1908년, 부친의 3년상이 끝나자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집안의 모든 노비를 해방시키는 등 당시로선 무척 파격적인 사건을 저질렀다. 그후 일제식민통치 기간에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상해 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무엇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그의 활동무대가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모스크바, 상하이, 싱가포르 등의 각 나라를 돌며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구추백, 모택동, 주은래, 손문 등 당시 세계 변혁을 주도한 주인공들과 직접 만나 민족의 독립을 고민했다. 심지어 28년 한해 동안에는 다른 약소민족들의 변혁운동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겠다며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세계 각지로 여행을 다닌 전력도 있다. 요새 말로 하면 ‘배낭여행’인데 그만큼 시대를 앞서 간 통이 큰 인물이었다.

몽양은 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이듬해에 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했는데, 그 역시 일제시대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의 배후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마라토너 손기정은 몽양 선생의 둘째아들 여홍구와 동기동창인데, 34년 8월7일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 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동아일보는 시상식 사진에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워버린 후 내보내 동아일보 신문은 물론 자매지였던 신동아, 신가정(여성동아 전신)까지 폐간당했다. 이때 몽양선생이 운영했던 조선중앙일보도 일장기 말소 사진을 내보내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이 일로 조선중앙일보는 완전히 폐간되고 말았다.

여원구 의장은 9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40년 아버지는 일왕과 조선독립을 담판했다”고 증언한 바 있는데, 이번 방문기간에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를 청원하는 인터넷 서명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에서는 지난 3월 국가보훈처에 몽양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해둔 상태. 추모사업회는 인터넷 홈페이지(www.mongyang.org)에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 청원’란을 개설하고 이를 위한 인터넷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몽양 선생의 화려한 항일운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몽양 선생의 9촌 조카인 추모사업회 여익구(56) 사무총장은 “몽양 선생이 분단 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좌파로 분류돼 그동안 보훈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몽양 선생은 친소, 친미도 아니었고 좌우합작운동을 통한 반외세 민족통일을 외친 진보적 민주주의자였을 뿐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앞으로 몽양 선생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제식민통치 기간이던 29년과 42년 두 차례 옥고를 치른 몽양 선생은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당을 결성하며 10여 차례의 테러사건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종로구 계동 집 앞에서 납치되어 소나무에 묶이는가 하면 괴한이 침실을 폭파한 사건도 있었다. 밧줄, 곤봉, 수류탄, 사제폭탄, 권총 등 온갖 잔인한 수단이 총동원된 추악한 테러가 그의 생명을 위협했고, 결국 그는 열두번째 테러에 목숨을 빼앗겼다.

몽양 선생은 그만큼 불행한 한국 근대사를 살다 갔고, 여전히 분단이라는 첨예한 상황이 그에 대한 역사적·객관적인 평가를 유보하게 만드는 어려움이 있다. 역사적 진실을 안다고 해도 ‘자기 검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추모사업회 고문으로 있는 강원룡 목사의 말은 몽양 선생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제공한다.

“월드컵 때 본 ‘붉은악마’의 ‘신기(神氣)’가 어느 순간 갑자기 터져나온 게 아니예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기층민중들의 무의식이 확 표출된 것이죠. 그동안 가부장제 유지에 급급한 기득권층에게는 이런 ‘무당 기질’이 없어서 붉은악마 같은 국민적 정서와 에너지를 이끌어나갈 수 없어요. 21세기에는 붉은 악마와 같은 ‘컬처 샤먼(Culture Shaman)’이 지도자가 돼야 해요. 역사적으로 이런 지도자가 딱 한명 있었어요. 여운형 선생이야말로 ‘컬처 샤먼’ 기질을 가진 뛰어난 지도자였죠.”

강원룡 목사는 특히 몽양 선생의 ‘컬처 샤먼’다운 면모로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뛰어난 언변을 꼽았다. “스물여덟 살 때 몽양 선생을 처음 봤어요. 정말로 뛰어난 대중연설가예요. 지금껏 몽양 선생만큼 대중 강연에 능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만일 몽양 선생이 죽지 않고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지도 몰라요.”

강원룡 목사처럼 몽양 선생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그의 역사적 재조명을 바라는 사람들은 매년 7월19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묘소에서 추모제를 갖는다. 그나마 추모제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을 추억했던 원로들도 이젠 세월의 물살에 밀려 그 수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 사람을 잃는 것은 그만큼의 역사를 잃는 것과 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때다.


    미니 인터뷰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 여익구 사무총장

“독립 유공자 서훈 추서를 통한 역사적 재조명 시급하다!”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의 창립취지는?

몽양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널리 알리고 몽양 사상의 재조명을 통해 남북통일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가기 위해 91년 7월 창립되었다. 강원룡 목사,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이기형 시인, 장을병 한국정신문화원장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추모사업회 고문으로 참여해 몽양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현재 추모사업회가 가장 중점에 두고 있는 사업은?

국가보훈처에 몽양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를 신청한 상태다. 분단 이후 몽양 선생은 좌익인사로 매도되어 사상과 행적에 대한 연구는커녕 일제하의 독립운동 공적까지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추모사업회는 독립유공자 서훈 추진을 계기로 몽양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조명을 시도할 예정이다.

●몽양 선생의 ‘생가(生家) 복원 사업’도 추진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난 번 여원구 의장에게 ‘몽양 선생의 생가가 집터 흔적만 남아있다’고 했더니 ‘북에서 나무를 베어 보낼 수도 있는데…’ 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앞으로 경기도 양평군 신원리 몽양 선생의 생가 터와 암살 당하기 직전까지 몽양 선생이 생활했던 서울 종로구에 있는 본가를 복원하고, 이를 기념관으로 만들어 몽양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널리 알리는 교육관으로 만들 계획이다.


    현장 인터뷰
 
몽양 선생 다큐멘터리 제작하는 신동진 감독

“몽양 선생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유일한 사람!”

‘8·15 민족통일대회’ 기간 동안 6㎜ 디지털 카메라로 역사적 현장을 부지런히 채집하는 ‘꽁지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각 중앙일간지 공동기자단에게만 지급된 촬영허가증도 없이 홀로 ‘마이너리그’를 치르는 철저한 아웃사이더는 바로 해피닥스프로덕션 신동진 감독(36). 현재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독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6·15공동선언을 지켜보면서 몽양 선생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몽양 선생은 친소, 친미파도 아닌 민족주의자라는 점에 이끌렸어요. 늘 ‘가운데’에 있었던 분이죠. 우리 민족의 살길과 통일의 해법 또한 어느 한쪽에 치우친 극단이 아닌 ‘가운데’에 있을 것이라는 고민이 다큐멘터리의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몽양 선생을 놓고 무언가를 주장하다간 자칫 ‘마녀사냥’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 분단의 현실. 게다가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가 ‘서자’ 취급을 받는 열악한 제작·배급 환경까지 고려해 봤을 때 신감독의 ‘의욕’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몽양 선생을 둘러싼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많이 취재했어요. 그런데 어느 수위까지 편집을 해야 할지 고민이네요. 평범하게 가면 ‘고작 그것밖에 못 찍었냐?’고 할 테고, 제 욕심대로 담아내면 사회적 파장이 너무 클 것 같고…. 아무튼 일본, 미국에도 가서 나머지 분량을 찍을 계획이고 가능하면 북한에도 가보고 싶어요.”

그는 이미 독립 다큐멘터리 <고백> <연어를 기다리는 사람들> <포기할 수 없는 약속-동강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등으로 국내외에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주목받는 다큐감독. 특히 <고백>은 한국 영상물로는 최초로 포르투갈 국영방송의 전파를 타기도 했다. 그는 파인더를 통해 ‘사람’ ‘자유’ ‘역사’를 들여다보고 일관되게 ‘경계 또는 가운데’에 포커스를 맞춘다.

“흑백논리가 제일 싫어요. 이성과 감성의 가운데, 운동과 삶의 가운데 그 지점에 바로 제가 서 있을 겁니다.”

 
 
기획·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글·박윤희<자유기고가>
사진·박윤희,고승범

기사 입력시간 : 200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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