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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복귀문제로 논란 이는 한국축구 간판스타
홍명보·조수미 부부

“부상선수 두고 이러쿵저러쿵 매도하는 언론 태도에 너무 화가 났어요”
‘아시아 최고 리베로’ ‘생각하는 축구선수’ ‘한국축구의 희망’ 등 홍명보를 지칭하는 말들이 많다. 또 그를 두고 한국축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인물이라고 축구인들은 한결같이 말하곤 한다.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10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간판스타로 군림했던 홍명보 선수가 4년8개월 간의 일본 생활과 최근 자신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국가대표 선발논쟁에 대해 솔직한 심정들을 털어놨다.


홍명보 선수(34)를 만나기 위해 포항 영일대호텔을 찾았을 때는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막 식사를 마친 상태였는데, 시무식과 산행으로 무척 피곤해 보였다. 각종 매체의 연이은 인터뷰 요청에 시달렸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친절하게 취재에 응했다. 그리고 인터뷰 내내 본인의 뜻을 정확히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축구실력은 두말할 나위 없고) 모든 일에 의연한 인물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러한 모습 때문에 그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한국축구의 희망’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아내 조수미씨(30)는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성민(5), 정민(3) 두 아들 역시 참 귀엽고 예뻤다.

홍명보 선수와 아내 조수미씨의 만남이 참 궁금했다.

“94년 월드컵을 앞둔 시기였을 거예요. 명보씨가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왔을 때였죠. 제가 아는 분께서 ‘한국대표팀이 LA에서 친선경기를 하는데 같이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명보씨를 잘 알고 계시다고 하시면서 말이죠.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따라나섰어요. 그때 운동장에서 처음 소개받았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바로 그가 말을 이었다.

“처음 집사람을 보는 순간 첫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바로 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그때는 월드컵 준비중이어서 바빴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마음에만 두고 운동에 전념했어요. 모든 걸 월드컵 이후로 일단 미루었죠.”

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와 자신이 예사롭지 않은 관계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말을 했다.

“처음 명보씨를 만났을 때는 갓 대학에 들어간 때라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어 별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아무렇지 않게 만난 후에 한참동안 잊고 살았죠. 그런데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잘 지내?’ 이러면서요. 뜻밖의 전화여서 처음에는 당황했죠.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몇 마디 안하고 그냥 끊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그는 잊을 만하면 몇 개월에 한번씩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두 다 작전이었어요. 여자는 천천히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름대로 했었거든요. 그래서 가끔 한번씩 전화해서 안부를 물었던 거예요.”

94 미국월드컵에서 대표팀은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도 아쉽게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경기 후 심신이 지쳐있었지만 그녀를 생각하자 힘이 생겼다. 월드컵이 끝난 뒤 그는 본격적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월드컵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바빴어요. 일정이 항상 빡빡한 것이 프로선수 생활이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여기저기 많이도 불려다닌다. 경기 시즌이 아니어도 항상 바쁠 수밖에 없는 한국축구의 간판 선수이니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년 동안을 가끔씩 안부 전화하는 것으로 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전화로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95년이었을 거예요. 느닷없이 ‘된장찌개 만들 줄 알아?’ 이러면서 전화를 하더라고요. 미국생활을 오래해서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몰랐어요. 한참을 생각한 다음에야 그 얘기가 결혼하자는 얘기라는 것을 알았어요. 정말 무드 없죠. 남들은 예쁘게도 프로포즈하고 그런다는데….”

된장찌개 얘기가 나온 후부터 그는 미국에 있는 그녀에게 매일 전화를 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둘의 사랑은 무르익었고 97년 3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세인들의 관심 속에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 2개월 만에 일본진출, 아내의 마음고생 커

처음 그들이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포항이었다. 홍명보는 오랫동안 숙소생활을 하다가 퇴근해서 돌아갈 가정이 생겼다는 것이 무척 좋았고, 그녀 역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운동선수는 집에서의 뒷바라지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처음에는 실수도 많았어요. 살림을 안 해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다행히 어머님께서 많이 도와 주셨죠. 만약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명보씨 불만이 만만치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행복한 한국생활은 아쉽게도 2개월에 그쳤다. 홍명보 선수가 일본 프로축구리그에 진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고생도 많았고 마음의 부담도 컸어요. 내가 잘못하면 후배들이 일본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 같다는 부담이었죠. 생활패턴도 우리와는 다른 나라였고, 언어도 문제였죠. 구단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줬고 오로지 운동만 전념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 맘처럼 안되잖아요.”

‘벨마레 히라스카’에 입단한 그는 한국에서의 멋진 플레이를 일본에서도 펼치며 역시 홍명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에서보다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욕을 먹으면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열심히 하다보니까 일본 선수들도 나를 받아들였고, 잘해주더라고요. 외국 선수가 잘하면 뒤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앞에서는 잘해주는 게 일본 스타일이잖아요.”

한국과 일본은 민족적인 갈등이 언제나 존재하는 이웃 아닌 이웃으로 살아왔다. 그런 일본에서 그의 대우는 특별했다. 그 또한 언제나 노력하는 자세를 보였고 팀의 일원으로서 충실했다. 그런 그에게 일본 선수들이 마음을 열고 존경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일주일에 3∼4일 원정경기를 다녀야 하는 그였기에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다고 한다.

“명보씨가 원정시합을 가면 저는 매일 집안에만 있었어요. 말도 안 통했지만 갈 곳도 없었죠. 집에서 음악 듣고 책 보고 집안 청소하는 일의 반복이었어요. 정말 외로웠죠. 아는 사람도 없을 때였고요.”

낯선 땅에서의 생활과 매일이다시피 하는 남편의 원정으로 조수미씨는 외로움을 홀로 견디며 일본 생활을 해야했다.

일본 축구시장에서 그의 상품성은 대단했다. 일본 팬들과 관계자들에게 인정받은 그는 대스타에 걸맞는 이적료와 연봉을 보장받으며 ‘벨마레 히라스카’에서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했다. 당시 외국인 선수들에게 배타적인 면이 많던 일본에서 그것도 팀을 옮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 축구역사상 첫 외국인 출신 주장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우리 팀에는 실력 있고 유명한 외국 선수들이 많았어요. 대표적인 선수가 스토이코비치 선수와 카레카 선수였죠. 그 선수들에 비하면 저는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어요. 물론 잘하는 일본 선수들도 많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주장으로 선임한 것은 훈련자세와 경기에 임하는 태도, 동료들과의 친화력을 높이 인정해서였다고 나중에 니시노 감독이 그러더군요.”

스토이코비치와 카레카 같은 세계적인 선수들과 같은 팀에서 경기를 해봤지만 많은 차이를 못 느꼈다는 그는, 한국 선수들도 조금만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충분히 세계무대에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아내 임신했을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해 지금도 미안하다는 홍명보

옆에서 한참동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그의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다름 아닌 일본 땅에서 한국선수로 당당히 선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모든 일본사람들이 인정을 했다는 것이 더욱 기뻤죠. 제대로 뒷바라지도 못해줬는데…. 오히려 저를 다독거리면서 자기관리 철저히 하고 멋지게 선수생활 하는 모습이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첫아이와 둘째아이 출산 때문에 집을 5개월 동안 비웠을 때도 불평 한마디 없었던 것도 고마웠고요. 또 제가 외로워 할까봐 운동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오곤 했어요. 아이들 임신했을 때도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면서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는 자상함도 보여줬고요.”

그녀의 말에 홍명보는 홍조를 띠며 무척 쑥스러워 했다. 비록 한국축구의 거목으로 통하는 그이지만 아내 앞에선 역시 다른 평범한 남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내가 첫아이 가졌을 때 많이 고생했어요. 입덧을 너무 심하게 해서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죠. 정말 미안했어요. 나중에는 저까지 같이 입덧을 하게 되더라고요. 밖에서는 인정받으면서 생활했지만 집에서는 0점 짜리 가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일본에서 앞날이 보장된 선수생활을 해오던 그는 가시와 레이솔 팀 관계자들의 끈질긴 설득과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가 한국행을 결심한 데는 그만한 계기가 있었다. 니시노 감독의 시즌중 중도하차가 그 것.

“니시노 감독은 저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고 주장까지 시켰던 분이었어요. 호흡도 잘 맞았는데, 가슴이 아팠어요. 감독이 팀을 떠난 것에 대한 주장으로서의 책임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가시와 구단에 한국복귀를 이야기했죠.”

그는 그렇게 4년8개월 간의 일본생활을 마무리하고 친정 구단인 포항스틸러스에 복귀했다. 일본진출 당시 한국에 복귀하면 꼭 포항으로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저는 의리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니시노 감독과도 그랬고 포항 복귀도 그랬고요. 의리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항상 머릿속에 가지고 있죠. 포항은 제가 원하던 해외진출의 기회를 준 팀이에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의리거든요.”

요즘 그를 두고 국가대표팀에 선발하느냐 안 하느냐 말들이 많다. 각 언론 매체에서 그를 무척이나 괴롭히고 있기도 하다. 현재 그는 부상에서 회복중이다.

“옆에서 지켜보기가 무척 안쓰러워요. 명보씨가 11년을 국가대표로서 헌신하고 노력했는데 부상중에 명보씨를 평가한다는 것이 너무 속상해요. 운동선수들의 경우 부상중에는 신경이 상당히 예민하고 힘들어하거든요. 일본은 선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구단이나 언론에서 보호해주는데 한국은 안 그런 것 같아요. 너무 개인 사생활까지 들추며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요즘 한국 언론이 홍명보 선수에 대한 평가절하에 대해 무척이나 속상해 했고,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홍명보 역시 불편하고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국가대표팀은 제 팀이 아니예요. 저보다 나은 선수가 있으면 당연히 그 선수를 선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중요한 것은 빨리 부상에서 회복하는 거죠. 또 포항에 복귀했으니까 팀에 기여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그는 히딩크 감독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을 맡고 난 뒤에 우리 선수들의 플레이 스타일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일단 선진축구를 접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하고요. 선수선발과 기용은 전적으로 감독의 고유 권한이예요. 저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잘하는 선수를 우선 발탁하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저는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더라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선발되더라도 대표팀에서 필요하지 않다고 제 스스로 판단되면 과감히 옷을 벗고 후배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고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가 그동안 대표팀에서 해왔던 것들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도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가슴 아프게 하죠.”

언론 보도내용에 대해서도 그는 말하기 꺼려할 정도로 불쾌해 했다.

“얼마 전에 모 신문사 기자에게서 아침 일찍 전화가 왔어요. 수화기를 들자마자 들리는 첫마디가 ‘목소리 멀쩡하네’였어요. 정말 황당했죠. 제가 다친 곳은 다리지 목이 아니니까 목소리가 나쁠 것도 없는데 무슨 뜻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지…. 기자들의 생활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선수에게 전화해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죠. 선수들은 컨디션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아침부터 리듬을 깨는 말을 들으면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고, 그런 날은 부상당할 확률도 높아요.”

남편의 말을 듣고 있던 조씨는 가슴이 아픈 듯 눈물을 지었다.

“요즘에는 제가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는지 답답해요. 곁에 있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그리고 언론보도 내용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그래요. 소속팀에서 잘하면 대표팀 문제는 자연 해결될 거라고 말해주기도 하고요. 지금 중요한 것은 부상에서의 회복이니까 그것에 대해서도 같이 노력하려고 해요.”

얼마 전 신문선 SBS 축구해설위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홍명보 선수는 ‘국가적인 보배’다. 그를 두고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분명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필요한 선수”라고 단호하게 말했었다. 그 말에 공감을 하기에 ‘국가의 보배’를 대하는 한국 축구문화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리한 출장으로 인한 ‘피로골절’로 부상

그는 그동안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면서 한번도 제대로 휴식을 취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99년 50경기에 출전했고, 2000년 40경기에 출전하는 등 계속된 피로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2001년 1월에 좀 쉬어야 하는데 두바이 4개국 대회와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로 쉬지 못했어요. 그렇게 강행군을 하다 보니까 ‘피로골절’이라는 부상도 왔고요. 3개월 정도 운동을 쉬다가 얼마 전부터 운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지금 컨디션은 60% 수준이에요. 부상으로 힘들어 할 때 항상 옆에서 따뜻한 말을 해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너무 고맙고 힘이 돼요.”

그는 천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부상부위도 이제는 완전히 완쾌되어 정상 컨디션을 찾는 일만 남았다. 이제 앞으로 4개월여 남은 2002년 월드컵. 현재의 컨디션이라면 그는 다시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 경기장에 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되든 안되든 홍명보는 여전히 한국축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대한 선수임에 틀림없다.

 
 
글·김성호<자유기고가>
사진·김장훈<프리랜서>

기사 입력시간 : 200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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