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라도 확실히 배우는 ‘테마 방학’

노는 게 남는 거다.” 부산 장덕기씨(내과의원 원장, 41)네 가족의 올 여름 목표다. 장씨와 아내 염정애씨(41) 사이에는 중학교 2학년인 아들 현지와 초등학교 6학년인 딸 현빈이가 있다. 장씨 부부는 그동안 두 아이를 키우면서 빈틈 없는 프로그램을 준비해 왔다. 현지는 네 살 때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언어는 현지경험이 중요하다고 해서 방학 때 두 차례나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보냈다. 외국인 영어선생을 따로 두기도 했다. 제2외국어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엄마가 먼저 일어를 배운 뒤 아이들에게 영어와 일어를 병행해서 가르쳤다. 여기에 한문까지. 부모의 계획대로 두 아이의 학습 진도는 착착 진행되었다.

95년 마침내 호주 유학을 결정했다. 현지가 초등학교 2학년, 현빈이가 유치원 생일 때였다. 그러나 엄마와 함께 떠났던 아이들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이들의 부적응 때문이 아니라 한국에 홀로 남은 장씨의 부적응이 문제였다. 재미있는 호주생활에 젖어 있는 아이들은 점점 아버지의 존재를 잊었고, 장씨는 “내가 무엇 때문에 아이들을 호주로 보냈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가족 간의 유대와 인성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아내가 돌아온 후 장씨 부부의 교육관도 달라졌다.

“그때부터 노는 법을 가르쳤죠. 나이 먹어서 노는 법 배우는 게 더 어렵잖아요. 부모가 자식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는 그냥 시동만 걸어주고 아이들 스스로 운전하도록 해야죠.”

장씨네 가족은 테마가 있는 방학을 준비한다. 그냥 빈둥거리면서 노는 게 아니라 한 가지라도 배우면서 놀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2년 전 겨울방학부터 장씨네 가족은 스키와 스노보드를 배우고 있다. 그냥 탈 줄 아는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배워보자는 계획으로 겨울방학 내내 연마를 했다. 아직까지는 장씨의 스노보드 실력이 가족 중 최고지만 조만간 아이들이 아버지를 뛰어넘을 것 같다.

장씨 부부는 스키를 배우는 과정도 공부로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부모가 따라가지 않고 두 아이만 스키캠프에 보냈다. 2년 전 겨울 두 아이가 모두 초등학생일 때 김해 비행장에서 표를 사주고 김포에 내려 5호선 지하철을 타고 서대문 입구까지 가면 두 아이를 인솔할 스키 강사가 기다리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어린 아이들을 보호자 없이 먼 길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남매는 잘 해냈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서 돌아왔다. 하긴 둘째가 유치원생이던 시절 오빠와 함께 이집트로 해외여행을 보낸 적도 있다. 단체여행인 데다 인솔자가 잘 아는 분이어서 특별히 부탁한 일이었지만 역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우려와 달리 유치원생이었던 현빈이는 어른들 도움 없이도 단체여행객 중 제일 먼저 이집트 시내산에 올랐고, 또 당시 웬만한 영어를 구사하던 아들 현지는 어른들을 대신해 통역을 하며 즐거운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장덕기씨는 벌써부터 올 겨울방학 구상으로 분주하다. 이번 겨울에는 아예 무주에 집을 하나 마련해 온 가족이 한 달간 머물며 스키와 스노보드를 타기로 했다. 일을 해야 하는 장씨만 주말마다 일터와 그곳을 오간다는 계획이고, 아이들이 꼭 해야 할 공부는 인터넷이나 화상전화로 대신할 방법을 찾고 있다. 물론 머지 않아 시작될 여름방학에 대한 계획도 분명하다. 윈드서핑와 웨이크보드 마스터. 지난 여름 내내 장씨와 두 아이는 바다에서 살았다.

“부산에 산다는 게 엄청난 혜택이죠. 윈드서핑으로 먼 바다로 나가는 것은 해변에서 물장구 치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스포츠를 즐기면서 유대를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일단 바다에 나가면 혼자에요. 혼자서 생존해야 하는 거죠. 작년 여름 아직 기술과 힘이 부족한 현빈이가 윈드서핑을 하다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는 바람에 혼쭐이 났죠. 그런 경험을 통해 강한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았을 겁니다.”

윈드서핑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아들 현지에게 올해는 웨이크보드(스노보드처럼 생긴 물에서 타는 보드)를 연습시킬 계획이다. 아이들에게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의욕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 하던 일을 몽땅 걷어치우는 것은 아니다. 1년 여 전부터 시작한 천체공부는 이제 아이들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비싼 망원경 사주면 그냥 별이 보이는 게 아니다. 집 부근에 천체에 관해 해박한 교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장씨가 과학잡지에서 읽었다) 그분을 초청해 직접 강의를 듣고 꾸준히 별보기를 한 덕분에 이제 아이들은 날씨만 좋으면 자연스럽게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부모가 방향타만 잡아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노를 저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