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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호/2000.02.24

■ 추적 / 법학교재 표절사건

“내용보다 표현방식에 주목”
‘남의 표현’ 그대로 베껴 써도 표절 …
“인용출처 꼭 밝혀야”

엄밀하게 말해 백지상태에서 출발한 독창적인 창작물은 어디에도 없다. 학위논문이나 대학 교재에서 인용 근거나 각주를 상세하게 붙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교과서나 논문이 표절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이론에 대해서는 인용 근거를 밝히지 않고도 사용해 온 것이 우리 학계의 오랜 관행이기도 했다. 비교적 최근인 지난 96년 사회문제화됐던 서울대 장승화교수(법학)의 하버드대 박사학위논문 표절 논란에서도 장교수측은 일관되게 언론이 자신의 학위논문에서 문제삼았던 부분은 △법령 및 절차에 관한 부분인데다 △관련학자들이나 실무자들이 자유롭게 공유하는 영역(이른바 Public Domain)이기 때문에 인용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표절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인용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관련 분야에서는 상식에 속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다 유야무야


그러나 저작권 전문가들이 문제삼는 표절의 기준은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표현방식이다. 저작권법을 전공한 성균관대 오승종교수(법학)는 “남의 표현방식을 빌려와 사용하면서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기 글인 양 사용했을 때는 표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번역물에 근거한 논문이나 교과서 역시 표절의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외국 학자의 저작물을 번역하는 데는 역자의 고유한 견해가 담긴 번역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헌법해석이나 법철학 등의 법률 문제를 다루는 학문에 있어서 이러한 엄격성이 더욱 강조된다. 예를 들어 보자.

헌법상의 보호법익들이 서로 충돌할 때 독일 헌법학자 헤세가 주장한 해석 방식, 즉 ‘das Prinzip der praktischen Konkordanz’를 국내 헌법학자들은 ‘규범조화적 해석의 원칙’(연세대 허영), ‘실제적 조화의 원칙’(고려대 계희열), ‘실천적 조화의 원칙’(전북대 국순욱) 등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한다. 대부분의 헌법학자들도 이들 원로학자의 번역 방식을 따른다. 그러나 각각의 번역 방식에는 서로 다른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는 만큼 설령 독일어 원본 텍스트를 보고 인용했다고 주장하더라도 최초 번역자에 대한 인용 근거를 밝히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표절 여부를 가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 증거는 오역이나 잘못 인용된 부분이 다른 논문이나 서적에서 그대로 인용된 것들이다. 이른바 ‘공통의 오류’. 오승종교수는 “민간업자가 전화번호부를 발행하는 미국에서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출판사의 표절 여부를 밝혀내기 위해 수많은 전화번호 사이에 일부러 실수를 가장한 허위 전화번호를 끼워넣은 채 발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학계에서 벌어진 표절논란은 대부분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채 교수들 사이에서만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다가 유야무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법조 주변에 알려졌던 저서 표절논란도 △당사자가 해당 교수를 찾아가 사과하고 △학회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되거나 △이미 출판된 책을 회수하는 소동을 빚기까지 했지만 외부로 알려지거나 정식 저작권침해 사건으로 이어진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중대한 저작권을 침해받고도 논란 자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꺼리는 교수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다.

만약 논문이나 저서 표절문제가 법정으로 갈 경우 관련 사건에 대한 판례가 전무한 국내 법조계에서는 치열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문선영변호사는 “내용의 일부만 갖고 표절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려우며 목차가 동일한지 여부 등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96년 서울대 장승화교수는 자신의 하버드대 박사학위 논문의 표절의혹을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5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소송을 통해 학계의 표절 여부를 둘러싼 법적 논란이 본격적으로 제기될 뻔했으나 장교수측이 제출한 증거의 조작 시비가 일고 이 언론사가 장교수를 사기 및 사문서 위조혐의로 맞고소하는 등 논란을 거듭하다가 소송은 당사자간 합의형태로 중단됐다.

결국 표절은 학문의 창의성과 연구 의욕을 죽이는 암적 존재라는 점에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학생시절부터 성실한 훈련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화여대 송덕수교수(법학)는 “대학원생들이 논문을 쓸 때도 표절현상이 비일비재하다. 논문을 쓸 때 3, 4줄 이상을 통째로 인용해서는 안된다. 석사과정에서부터 제대로 된 인용과 논문작성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베껴 쓰는 버릇이 생긴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저작권침해 더 엄하게 다루어야”


설령 제자의 논문을 지도교수가 그대로 인용하는 것처럼, 상대방이 인용을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서울대의 한 교수는 “표절이나 근거를 밝히지 않는 인용에 대해 상대방이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교수로서의 훈련이 전혀 안돼 있는 것이며 윤리적으로 문제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헌법재판소 황치연연구관보는 표절문화에 대한 ‘한국적’ 풍토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일부 교수들이 제대로 된 교과서는 하나도 내지 않으면서 곁가지 문제집만 내서 상업적 이익을 보겠다는 태도가 문제다”고 말했다. 그는 “저작권 침해에 관한 한 현실적 피해액보다 훨씬 많은 배상금을 물리는 ‘징벌적 배상’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수험생 입맛 맞춘 해설-요약서 판친다
일부 교수들 “한 권이라도 더 써 돈벌자” 베끼기 편승

법학을 전공한 교수들이 가장 문제삼는 것은 ‘수험법학’ ‘고시법학’으로 전락한 법학의 현주소이다. 교과서보다 참고서가, 기본서보다 해설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은 법조 인력의 전문성을 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병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예비 법조인들을 가르치는 사법연수원 교수들도 최근 들어 사시 합격자들의 평균적 수준이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데에 공감하고 있다.
좋은 수험서의 조건은 아무래도 기본에 충실한 것보다는 깔끔하게 요약, 정리해낸 것들이다. 해설서나 요약서들이 목차와 구성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민법의 경우 최근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과락만 면하자’는 생각이 팽배해 기본 교과서를 외면한 채 해설서나 사례 중심의 요약서만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수험생들의 입맛에 일부 교수들이 편승하면서 빠른 시간 안에 ‘잘 편집된’ 요약서를 펴내려다 보면 표절에의 유혹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수험생들에게 인기있는 교과서를 펴낸 몇몇 교수들이 ‘신림동 강의’를 통해 교수 연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한다.
표절에 대한 학생들의 무감각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만난 한 수험생은 “일부 해설서가 법학계의 원로들이 쓴 특정 교과서와 비슷한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거나 내용이 유사하다는 소문이 나면 표절 논란에 휩싸이기보다는 오히려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하기 도 했다.
몇 년 전 정년퇴임한 명예교수 K씨는 “젊은 학자들이 뼈를 깎는 연구에 정진하기는커녕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내서 돈을 벌겠다고 나서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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