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스동아일보[동아일보매거진:주간동아 204호]

■불붙은 러시아 대권경쟁 "크렘린 주인은 나" 프리마코프 0순위…야블린스키·주가노프 "두고보라"

옐친의 시대는 20세기와 함께 막을 내리고 있다. 소련 공산당을 포고령 하나로 불법화하고 탱크로 의회를 해산했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현대판 차르（황제）였다. 그는 이 막강한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 안감힘을 쓰고 있지만 이미 역사는 노쇠한 옐친의 퇴장을 강요하고 있다. ‘곰’처럼 인내심 강한 러시아인들이지만 경제파탄과 혼란으로 상징되는 옐친시대의 연장을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2월 총선과 내년 여름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옐친은 크렘린궁을 비워 주어야 한다.

친위 쿠데타설, 선거 연기설 등 ‘정변’에 대한 무성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옐친 이후’를 노리는 대권 주자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보면 러시아의 대권 경쟁은 5강（强）의 대결로 좁혀지고 있다.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총리（70）가 가장 앞서가고 있다. 러시아가 사실상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국가 부도의 위기에 놓였던 지난해 9월 의회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총리에 올랐던 프리마코프는 8개월만에 전격적으로 해임되었다.

옐친과 그의 측근들이 견제구를 던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해석. 그러나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각 정파가 다투어 그를 영입하려고 줄을 섰다.

프리마코프는 라이벌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시장（63）과 손을 잡는 승부수를 던졌다. 두 사람은 8월‘조국－모든러시아’당을 만들었다. 당의 간판은 프리마코프. 비례대표 1번으로 총선에 나선다. 구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으로 대부분의 공직생활을 음지에서 보낸 프리마코프로서는 대중정치 무대에 처음 선을 보이는 것이다.

프리마코프의 가장 큰 강점은 폭넓은 지지기반이다. 공산당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싫고 부패하고 무능한 우파도 지겨워하는 사람들은 중도를 표방하는 프리마코프에 끌리고 있다.

특히 해외정보부장과 외무장관 시절 프리마코프가 서방에 대해서 보여준 강한 면모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소련 붕괴후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위상이 형편없이 추락한데 대해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은 프리마코프가 러시아의 자존심을 찾아 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내년 여름 대선 … 후보간 짝짓기 활발

프리마코프가 크렘린으로 가는 길에 가장 큰 걸림돌은 같은 당의 루슈코프. 루슈코프가 끝내 후보를 양보하지 않고 당을 깨고 나가면 프리마코프도 상당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프리마코프가 부통령제 도입, 권력분점 등을 들고 나오는 것도 루슈코프를 겨냥한 것이다.

루슈코프는 96년 90%에 가까운 경이로운 득표로 모스크바 시장에 당선된 뒤부터 옐친 이후를 노려 왔다.

그는 활발한 투자유치로 모스크바를 놀라운 속도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른 지역과의 격차가 커지면서 지방에서는 루슈코프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재혼한 젊은 부인 엘레나 바투린（35）이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고민이다.

96년 대통령선거에서 4등을 차지했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야블로코’당대표（47）는 고르바초프 시절 경제개혁 프로그램 ‘500일 계획’을 입안한 경제학자로 서방에서 더 유명하다. “50회 생일은 크렘린에서 맞겠다”는 말을 스스로 입에 올릴 정도로 야심만만하다. 아직 크렘린의 주인이 되기에는‘너무 어리다’는 평과 유대계라는 악소문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

3개월의 단명 총리로 물러난 세르게이 스테파신 전총리（47）는 ‘야블로코’당에 입당했다. 스테파신이 동갑내기 야블린스키와 손을 잡은 것은 뜻밖의 선택. 경찰과 첩보기구에서만 평생을 보낸 전형적인 ‘공안통’인 스테파신은 철저히 대중 정치인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12월 총선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출마해 공산당 거물인 겐나디 셀레즈뇨프 하원의장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안전하게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서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본인이 지역구를 고집했다는 후문이다. 스테파신은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 개혁을 이어갈 우파의 대표주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야블린스키와 후보 단일화를 이루는 것이 급선무다. 지난 대선에서 옐친과 결선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석패한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의장（55）은 범 여권 후보가 난립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자신은 이미 좌파의 대표주자로서 위치를 굳혔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서도 프리마코프와 선두를 다투고 있다. 농촌지역과 서민층을 기반으로 고정표를 가지고 있지만 중산층과 대도시 지역에서 완강한 반대세력이 많아 결선투표에서 40% 이상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것이 고민이다. 다른 후보와의 제휴로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처럼 정치인의 부침이 심한 곳도 없다. 한때 옐친의 후계자로 꼽혔던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총리나 보리스 넴초프 전부총리, 알렉산드르 레베드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 등은 이미 대권 경쟁에서 상당히 멀어진 느낌이다. 현재 선두주자들 역시 어느 한순간에 몰락할지 모른다. 러시아의 대권경쟁이 ‘삼국지’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기현/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포스트 옐친은 대머리?
시민들 사이에 입소문 … 나이·옐친 행보·미국 지원도 변수

나이와 건강이 러시아 대권경쟁의 숨은 변수이다. 임기 대부분을 병원과 휴양지를 옮겨 다니면서 보낸 옐친에게 러시아 국민은 너무 지쳐 있기 때문이다. 선두 주자인 프리마코프는 옐친보다도 2세나 많은데다가 최근 다리수술을 받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불리한 입장.‘건강은 문제없다’고 자신하지만 상대 진영이 끈질기게 물고늘어질 경우 난처해진다. 루슈코프는 육순을 넘겼지만 힘이 넘친다. 한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수영하는 그의 별명은 ‘백곰’. 나머지 후보들은 상대적으로 젊어 건강문제와는 일단 무관하다.

‘옐친 변수’도 남아 있다. 옐친의 속내는 가능하면 선거를 연기해 권력을 연장하려는 것.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목숨을 건 승부수를 던졌던 옐친이 마지막 정치적 도박을 할 가능성은 항상 남아 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옐친은 최소한 퇴임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만한 후임을 고르려 하고 있다. 반면 대선 주자들은 ‘인기 없는’ 옐친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옐친이 특정 후보와 물밑에서 거래를 하고 지원할 가능성이 커진다.

‘서풍’（西風）도 무시 못할 변수. 선거 때마다 서방측은 공산당을 견제하고 공공연하게 옐친을 지원했다. 지난 대선 당시 미국 선거전문가들이 모스크바에 캠프를 차려 놓고 옐친 진영을 지원했을 정도다. 현재 서방이 선호하는 후보는 야블린스키 같은 온건 시장개혁파. 반대로 공산당의 주가노프나 대（對）서방 강경파로 꼽히는 프리마코프는 껄끄럽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 하나. 다음 러시아의 지도자는 대머리가 될 것이라는 그럴 듯한 설（說）이다. 레닌 이후 대머리와 머리숱이 있는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최고 지도자가 됐다.대머리인 고르바초프의 뒤를 이어 옐친이 집권했으니 다음 차례는 대머리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이 ‘법칙아닌 법칙’에 따라 다음 대통령은 주가노프나 루슈코프가 되리라는 것이 호사가들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