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여성과 요리학원

요리학원은 상류층 사교장?
사모님-딸-며느리들 너도 나도…음식 배우고 사람 사귀는 창구로 활용

결혼 후 매스컴에 좀체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삼성가 며느리’ 고현정씨의 외출 장면이 최근 모 주간지에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그와 함께 사진에 찍힌 사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둘째아들 재용씨의 부인 최정애씨. 두 사람은 서울 서대문구 연남동에 위치한 중국요리학원 ‘향원’에 요리강습을 받으러 가던 길이었다. 이로써 ‘재벌가를 비롯한 상류층 여성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유명 요리학원에 다닌다’는 항간의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이른바 ‘명문가’ 사모님과 딸, 며느리들이 그룹을 이뤄 요리를 배우러 다니면서 사교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에겐 널리 알려진 사실. 이런 사실은 지난 봄 옷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상류층 여성들의 문화’에 언론이 포커스를 맞추면서 일반인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해 국내 ‘가정요리’ 강습의 1인자로 꼽히며 상류사회 여성들에겐 ‘방배동 최선생’으로 회자되어 온 최경숙씨가 지난 5월 요리책을 펴내며 공식적으로 처음 얼굴을 드러내 관심을 모은 바 있다.

7~8명씩 묶어 그룹 지도

방배동에서 ‘라 맘마 꾸시나’라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최씨의 요리강습은 80년대 중반부터 명문가 여성들의 ‘필수 신부 코스’로 꼽혀 온 터. 삼성 현대 LG 등 재벌가는 물론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의 며느리들과 국무총리 국회의원 교수 등 웬만한 집안 여성들은 대개 그를 거쳐갔거나, 현재도 배우고 있다. 한나라당 박성범의원의 부인 신은경씨나 아나운서 황수경씨도 그의 오랜 제자다.

최씨와 더불어 우리나라 가정요리 분야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옥수동 심선생’ 심영순씨 역시 마찬가지. 최씨보다 좀더 일찍 가정요리를 보급하기 시작한 심씨도 보해그룹 등 재벌가 부인들과 정계-법조계 부인들, 개그맨 서세원씨의 부인 서정희씨 등을 가르쳤다. 심씨의 학원은 최경숙씨 학원보다 다소 폐쇄적인 성격을 지녔고 규모도 작은 편이라고 한다.

이런 학원에 드나드는 상류층 여성들은 대개 어머니나 시어머니 권유로 ‘신부 수업’을 받기 위해 개인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가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뒤 자신들끼리 자연스레 무리를 이뤄 요리를 배우러 온다.

“10~15년씩 학원을 다닌 명문가 사모님들은 딸이나 며느리를 직접 데리고 오기도 하고 전화로 미리 귀띔한 뒤 보내기도 한다. 대개는 7~8명을 묶어 그룹으로 지도하는데, 돈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끼리 몰려다니기보다는 가정의 법도나 품격이 비슷한 이들끼리 팀을 짜서 온다”는 게 최씨의 이야기.

그러나 요리선생들은 대개 ‘제자들’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공개하기를 꺼리는 입장이다. 밖으로 말이 나면 아무래도 이들이 학원을 드나드는 게 불편해질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상류층 여성들은 학원을 다니는 대신 아예 구성원 중에서 요리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선생으로 모시고 자신들끼리 요리를 배운다. 옥수동 심선생에게서 다년간 요리를 배운 B그룹 총수 부인을 중심으로 재벌가 부인들이 모임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 예. 그 외에도 심씨나 최씨에게서 실력을 쌓은 뒤 비슷한 부류끼리 요리모임을 갖는 ‘사모님’들이 많다.

이번에 언론에 공개된 고현정씨의 경우 한식, 양식, 일식, 이탈리아 요리 과정을 마스터했고, 마지막 코스로 향원에서 중국요리를 배우는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고씨는 그러나 명문가 여성들과 그룹을 지어 요리를 배우러 다니지는 않았고, 향원도 평소 남편끼리 친분이 두터웠던 최정애씨와 단 둘이 수강했다. 그나마 그 사실이 공개된 이후 “더이상 학원에 배우러 올 수 없다”고 통보한 뒤 발길을 끊은 상태.

고씨를 향원에 소개하고 3회에 걸쳐 함께 개인지도를 받은 최정애씨는 전두환전대통령의 세 며느리 중에선 맨 마지막으로 향원에서 요리를 배웠다. 전 전대통령은 20년 전 향원의 원장 이향방씨가 같은 이름의 중국식당을 개업할 당시부터 단골 고객. 자연 전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부모가 좋아하는 향원의 맛비결을 배우기 위해 모두 이곳에서 중국요리 실습과정을 거쳤다. 전씨의 세 며느리는 모두 ‘라 맘마 꾸시나’ 수강생들이기도 하다.

‘시부모와 남편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결혼을 앞두고 요리학원을 다닌 것은 삼성 이건희회장의 맏며느리 임세령씨도 마찬가지. 대상그룹 임창욱회장의 맏딸인 임씨는 ‘시아버지가 좋아하는 치즈케이크와 예비 신랑이 좋아하는 잡채를 배우기 위해’ 대학생 신분으로 3개월간 집중적으로 요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들만의 문화’ 평가 엇갈려

그렇다면 왜 명문가 여성들끼리 요리를 배우러 다니는 것이 상류사회의 풍속도로 자리잡게 된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이들이 배우려고 하는 요리의 특성 때문. 이들은 외국의 VIP를 집으로 초청해 접대할 일이 많으므로 자연 집에서 해먹는 일상적 음식 이외에 ‘특별한’ 요리를 익힐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요리는 재료나 메뉴의 특성상 일반 학원에서 배우기 어렵기 때문에 필요한 이들끼리 모여 특정 학원을 찾게 된다는 것. 이들의 경우 수강료는 일반인들과 차이가 없는데(‘라 맘마 꾸시나’의 경우 수강료는 1회 4만원 선) 자라, 삭스핀, 전복 등 고급 재료를 사용하는 만큼 재료비에서 일반 수강생들과 크게 차이가 난다.

그들끼리의 매너를 배우고 사교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막 상류계층에 합류된 ‘신참’들에게는 이런 모임이 서로간에 안면을 익히고 ‘명문가의 예의와 법도’를 익히는 창구가 되고, ‘사모님’들에게는 지속적인 사교무대 역할을 하는 것. 결국 이들은 ‘배타적 요리 모임’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급문화를 유지하고 2세에 계승,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그들만의 문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선망과 질시의 시선도 있고, 어느 계층에게도 있는 ‘하위 문화’(sub-culture)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옥수동에서 수년째 요리를 배우고 있는 한 여성은 “함께 요리하고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비싼 옷이나 액세서리를 사러 다니며 어울리는 것보다 훨씬 건전한 모임이 아닌가”라며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판 ‘귀족’들의 폐쇄적인 문화를 바라보는 서민들의 눈길이 마냥 고울 수만은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한푼이라도 아끼고 허리띠 졸라매며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옷로비 사건과 같은 ‘그들만의 문화’의 후유증이 던져준 충격과 배신감이 너무나 크고 아픈 때문이 아닐까.

김정희 기자 yhong@donga.com

“끼리끼리 모인다는 식으로 보면 곤란”
‘라 맘마 꾸시나’ 운영 최경숙원장 … “요리 배우는 건 아름다운 자세”

80년대 초부터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사람들에게 가정요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다 93년 정식으로 ‘라 맘마 꾸시나’(‘엄마는 요리중’이라는 뜻)라는 학원을 개원한 최경숙원장(47). 그는 명문가 여성들끼리 모여 요리를 배우러 다니는 풍토에 대해 “색안경을 쓰고 보아서는 결코 안된다”고 강조한다. “요리를 배우는 것은 가족이나 타인에게 접대를 하겠다는 아름다운 자세다. 게다가 명문가 여성들은 집에서 외국 손님들을 접대하는 기회를 통해 ‘민간 외교관’ 역할까지 맡기 때문에 요리의 중요성이 더욱 크다”는 것.

학원에서 만나는 상류층 여성들에 대한 그의 평가는 매우 호의적인 편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치스럽다거나 거만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정교육을 잘 받고 검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현대그룹처럼 형제가 많고 가족규모가 큰 집안일수록 ‘남의 눈을 많이 신경쓰고 살아온 탓’인지 며느리나 딸들도 매사에 조심스레 처신한다는 것.

“상류층 여성들은 요리를 배움으로써 음식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손이 가고 정성이 필요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고로움이나 애로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단지 ‘끼리끼리 모인다’는 것만을 문제삼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닌 것 같아요.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려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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