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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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모든 것은 진리라는 문자주의가 문제”

2명의 신학자가 말하는 화제의 책 ‘예수는 신화다’ … “교회를 넘어서는 통찰력 제시”

  • < 정현상 기자 > doppelg@donga.com

    입력2004-10-13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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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모든 것은 진리라는 문자주의가 문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신약의 4복음서가 목격담이 아니라 기원 이전의 이교도 신화를 유대인식으로 각색한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예수는 신화다’(티모시 프리크·피터 갠디 지음)가 출간돼 잔잔한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책은 발매 2주일 만에 4쇄 1만부를 찍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는 ‘악마의 책’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저자들은 1970년대 이후 활성화된 고대 신비주의 문헌과 성경을 정밀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1999년 이 책이 출간되자 영국에서는 학계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격렬한 논쟁이 일었으나, ‘데일리 텔레그라프’지는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이 책이 던지는 주제는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 것인가. 7월18일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 정현경 교수(45)와 민중신학자이자 목사인 김진호씨(40)가 인사동의 한 한식집에서 만나 화두를 풀어봤다.

    성경 문자주의 폐해 지적은 큰 의미

    정현경: 저는 예수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우리는 예수의 생애와 실재성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지만,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반영하지 않은 듯합니다. 미국의 크라송 같은 학자들은 많은 역사적 증거를 들면서 예수는 농민혁명을 일으킨 신비주의자였다고 합니다.

    김진호: 그렇지요. 불트만은 신학이 역사를 얘기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 말을 했던 것인데, 그것을 예수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말로 읽은 것은 오독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은 진리라는 문자주의가 문제”
    정: 물론 예수에게도 신화적인 면은 있습니다. 현대 민중운동의 효시인 전태일이 실존 인물이면서 학생운동의 ‘신화적’ 존재가 되지 않았습니까. 비유하자면 예수 역시 후세에 신화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지요.

    김: 예수의 행적과 동일한 내용이 다른 신비주의 종교에도 있다고 해서 예수를 허구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예컨대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멕시코 산투빌라의 신화는 세계 공통의 영웅신화와 아주 비슷합니다. 다른 곳에 유사신화가 있다고 해서 산투빌라가 허구적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 그러나 이 책은 너무나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비교적 개방적인 학교를 다녔는데 이 책에서 언급하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 같은 것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 신인(godman) 신화와 예수의 복음이 그렇게 많은 공통점이 있는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기독교가 고대 이방신앙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데이터를 갖고 비교한 것은 굉장한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조적 기독교가 말하는 이방종교는 사악한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자궁이 이방종교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 아닙니까?

    “성경의 모든 것은 진리라는 문자주의가 문제”
    김: 저는 이 책이 지적한 문자주의의 폐해를 의미있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속의 모든 것은 문자 그대로 진리라는 문자주의 말입니다. 이는 성경에만 매달려 맹신으로 치닫는 한국 교인들의 잘못된 신앙 관행을 지적하는 데 적합합니다. 한국 기독교가 착각에 빠지는 것은 교회를 전제하고 예수를 읽는 것입니다. 예수는 교회 이전이잖아요. 역사학자들의 지적처럼 ‘기원의 망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 신앙은 실존적이고 고백적이며 신비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 본 사람 있어요? 유니언신학대에 트리브리부라라는 성서학자는 ‘성서는 하나님께 보내는 연애편지’라고 합니다. 즉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고백한 게 성서라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증명해서 쓴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성 신학자 셀리 멕페그는 ‘신학은 은유의 언어’라고 했습니다. 신학의 언어는 픽션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문자주의의 문제는 사랑을 교조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일주일에 한 번 만나야 하고(교회 가야 하고), 월급의 10분의 1을 내놓아야 한다(십일조)는데, 그렇게 하면 사랑이 이뤄집니까? 사랑이 죽어버리지요. 문자주의는 하나님을 문자에 가둔 우상 숭배입니다. 문자가 하나님이 된 거지요.

    “한국인이라면 이런 책 쓸 수 있을까”

    김: 실제 종교는 교인들이 교회에서 배우는 신앙적 강령들과 달리 혼합적인데 한국 교회는 겉으로 아닌 것처럼 표현합니다. 순수에 대한 편집증, 즉 문자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은 그래서 가치가 있습니다. 생활 속에 살아 있는 신앙을 고민케 하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교회주의를 넘어서는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비극은 313년 가톨릭이 로마의 국교로 제정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지금과 같은 양적 팽창을 이뤘고 승자의 종교가 되었지만, 작은 목소리들을 죽였습니다. 예컨대 중세 300년 동안 900만명의 여자를 죽인 마녀사냥 같은 죄악도 저질렀습니다. 당시 인구를 감안하면 동네에서 튀는 여자는 다 잡아죽였던 거지요. 저도 중세에 태어났다면 마녀가 됐을지도 몰라요.(웃음) 프로테스탄트 때문에 힘을 잃어가던 가톨릭이 힘을 되찾기 위해 희생양을 필요로 했던 겁니다. 그래서 경제력이 있는 과부나 독신녀들을 상대로 마녀사냥을 했습니다. 그런 권력자의 기독교가 놓친 것이 바로 신비와 침묵입니다.

    김: 4복음서는 예수에 대해 서로 다르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양성을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성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종교적 생명을 걸어야 하는 어려운 싸움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한국인이었다면 과연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까요?

    정: 문자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여성해방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남성 중심의 기독교 문자주의가 살해한 신의 모성적인 측면을 되살려야 합니다. 중세의 어느 시기에는 예수보다 마리아가 더 중심에 있을 때도 있었고, 지금 남미 원주민들의 가톨릭에는 예수보다 마리아가 더 중심에 있습니다. 그들은 백인이 데려온 성모가 아니라 멕시코계 갈색 피부의 마리아(Our Lady of Guadalupe)를 만들었습니다. 신의 여성적 측면이 강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김: 구조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상상계 안에 공통의 신화소(神話素)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유사성을 갖는다는 거지요. 인간의 공통된 종교 심성은 세계 모든 이를 만나게 합니다. 못 만나게 하는 것이 종교의 제도이고, 교파이며, 위계 구조입니다. 오늘날 종교 분쟁의 핵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신화에 대한 상상력은 제도를 넘어서 신을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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